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Dogfight)

감독
낸시 사보카

출연 리버 피닉스, 릴리 테일러
제작 1991 미국, 89분




낸시 사보카 감독은 뉴욕 주립대를 졸업하고, 단편 영화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나름대로 인정받는 여성 인디 감독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영화 중에서 내가 본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하룻밤(Dog Fifht)" 한 편에 불과하지만, 이 영화의 잔잔한 시선은 오래도록 날 사로잡았다. 낸시 사보카 감독의 시선 속에 담긴 리버 피닉스는 멋진 반항아도 아니었고, 청춘 스타가 아닌 젊은 배우, 조금은 으쓱대고 싶고, 조금은 내성적인 그런 평범한 청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이 청춘의 아이돌이나 소녀 팬들의 히어로로서의 리버 피닉스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그럴 듯한, 배우로서의 리버 피닉스의 모습, 친근한 리버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명의 배우는 못생긴 로즈 역을 맡았던 릴리 테일러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하룻밤"부터 "애리조나 드림", "어딕션", "포룸" 등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품들을 통해 좋은 연기를 보여왔다. 혹시 사람들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리버 피닉스를 친구처럼 생각한다. 알고 보면 그와 나는 동갑내기다. 우습지 않은가, 평생 미소년으로 남을 그와 늙어갈 나란 사람... 흐흐. 이 작품의 배경을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대전발 0시 50분"이란 노래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공군에 입대하는 이들은 대전에서 출발하는 0시 50분 기차를 타고 입영한다고 했다. 에디(리버 피닉스)는 군 신병 훈련소를 이제 막 나와서 베트남으로 출발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에디의 동기들은 일명 "도그 파이트"라는 게임을 벌이는데, 주변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를 파티장으로 데려오면 승자가 되어 상금을 독식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 중 하나가 "못생긴 여자는 꼬시기 쉽다"라던가... 어쨌든 에디 역시 그가 원해서든 아니면 분위기에 취해서든 도그 파이트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한국식으로 치자면 이제 막 전장에 투입되기 직전에 벌이는 작취미상의 해꼬지 혹은 깽판에 해당하는 이벤트인 셈이다. 내 친구 중 한 녀석은 입영 전날 술에 취해 주차해 있던 차의 백 미러를 박살내기도 했다. 하여간 에디는 정신없이 샌프란시코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못생긴 여자를 찾았지만, 막상 그렇게 생긴 여자들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에디는 못생긴 로즈(나름대로 못생겼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내 눈에 뭐가 씌인 건지 분위기 있어 보였다)를 보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영화에서 감독 낸시 사보카는 여성 감독 특유(?)의 혹은 여성의 섬세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은 에디를 선뜻 따라나서지 못하는 로즈의 망설임에 있다. 로즈는 첫눈에 에디에게 끌렸으나 어머니의 식당일을 도와야했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에디를 따라나서지 못한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에디를 따라나서 파티장에 가지만 우연히 이 파티가 여자의 외모를 놓고 벌이는 시합이며, 에디 역시 로즈를 못생겼다는 이유로 선택했음을 알고 큰 상처를 받는다. 로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에디에게 주먹으로 한 방 먹이고 파티장을 빠져나온다.

에디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로즈를 파티장으로 데려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처음 로즈와 만날 때부터 시작된 잘못이었다. 이런 걸 일컬어 스노우볼이라고 하던가. 에디는 로즈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하룻밤 사랑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 로즈는 에디에게 자신의 집 주소를 적어준다. 에디는 해가 뜨는 새벽의 샌프란시스코 언덕을 걸어 집결지로 향한다.(여러 편의 영화를 보았지만 정서적으로 이 날 새벽만큼 공감이 가는 새벽도 드물었다. 멋있었다는 말과는 별개로 말이다.) 에디는 전쟁터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로즈가 준 주소가 적힌 종이 쪽지를 바람에 날려 버린다. 



"내 인생의 십계명" 중(단 한 번도 10개의 계명을 모두 채워본 적은 없지만) 첫째로 꼽히는 계명은 언제나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란 말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데 유치한 일은 없다. 황석영의 단편 소설 중에 "몰개월의 새"란 것이 있다. 그 소설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파월 장병 훈련소인 특교대 근처 갈매기집엔 미자란 여자가 있다. 미자는 내일모레, 당장 떠나는 군인이라도 그가 사람 좋게 보여지면 능동적인 애정을 보였다. 사랑을 받기보다 주려는 사람은 언제나 떳떳하고 자유롭다. 미자는 <나>에게 김밥을 싸들고 면회오기도 했고, 담배 한 갑을 주기도 한다. 병사들이 떠나는 날, 몰개월의 여자들은 트럭에 조그맣고 하얀 선물을 던진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보았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오뚜기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야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의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 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에디는 그렇게 60년대 후반이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머나먼 나라, 베트남에 간다. 그리고 그는 전선에 투입되고 얼마 안 있어 다리에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돌아와 제대한다. 이제 그는 전쟁을 경험한 젊으나 젊지 않은 젊은이였고, 거리엔 반전 시위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 젊은이가 다리를 절뚝이며 해병대 팔각모를 쓰고 걸어오는 에디에게 소리친다. "살인자!" 물론 나는 베트남에게 우리가 사과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트남에 사과하는 일 못지 않게 우리는 베트남 혹은 우리가 남들 보지 않는 곳에서 종종 비웃듯 말하곤 하는 참전 용사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위로를 건네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자원한 것이라 할 지라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상처받고 남루해진 마음으로 돌아온 고향에서 에디는 기댈 곳이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상처받은 마음속에 유일하게 따뜻한 기운을 불러일으킨 것은 오직 로즈뿐이었다.  자칫 신파로 흐르기 쉬운 이 대목에서 낸시 사보카 감독은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많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다. 에디가 천신만고 끝에, 죽음의 사선을 넘어 돌아온 그 곳엔 여전히 로즈가 있었다. 그리고 로즈는 아무 말 없이 에디를 포옹해준다. 가끔 나는 "밥 먹었냐"고 물어주는 소박한 안부에 감동하곤 한다. 가끔 비루먹은 개처럼 그런 안부에 꼬랑지가 흔들리는 걸 느낄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그건 개들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럴 때 최인훈의 광장은 참으로 유용한 변명을 제공해준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란 말...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dog fight다. 그리고 개띠 청년이자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리버 피닉스의 반항도, 청춘의 스타성으로 덧칠되지 않은 맨 얼굴의 그를 만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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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마이너리티란 무엇인가?



  마이너리티(minority)라는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마이너리티리라는 개념 자체가 메이저리티(majority, main stream)라는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말하는 마이너리티와 메이저리티는 단순히 수적으로 다수인가, 소수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성리학에 기반 한 노론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의 군주는 외견상 지존(至尊)의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나 신권이 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성했으므로 마이너리티일 수 있고, 히틀러가 지배하던 독일에서의 유태인들은 '한 줌의 쓰레기'로 분류되었으나, 샤론 총리 하의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다수자 그룹에 속한다. 또한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우리 민족은 인적 구성으로는 다수였으나 권력을 장악한 일본인에 비해서는 소수 집단일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리티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자 집단에 의해 '침묵하는 다수'라는 말처럼 주관적으로 조작되기도 한다. 이렇듯 마이너리티의 개념은 시대 상황과 정의하는 이의 현실 인식, 그 사회적 위치에 따라 제각기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대 변천과 상관없이 마이너티리와 메이저리티를 구분지을 수 있는 근거는 '권력의 유무'이다. 권력을 소유하고, 기득권을 누리는 입장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구분의 준거가 된다. 이런 다수자 집단은 소수 집단에 비해서(이것이 단순히 수량의 개념이 아님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수량에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세하다는 의식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마이너리티라 할지라도 수동적으로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경우와 능동적으로 스스로 마이너리티를 자임하는  것은 다른 경우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인가?

  작가 최인훈은 『회색인』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며 식민지 착취를 통한 서구 제국의 자본 축적 과정을 날카롭게 묘파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불공정한 경쟁과 적자생존을 원칙으로 하는 불평등한 경쟁 체제이며 기득권을 소유한 자에게는 축복을, 경쟁에서 탈락한 자, 상대적인 약자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배제와 소외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온 과정은 이렇듯 소수 집단에 대한 배제와 소외라는 '내부 식민지'화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를 확산시켰고, 동시에 노동 소외, 여성 차별, 특정 지역 배제를 전략적으로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적 구성으로는 다수에 속하는 노동자와 여성 그리고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나 호남 지역이 소수자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소수자 집단은 80년대 사회 변혁 운동을 통해 노동자 집단의 세력화, 여성의 지위 상승, 정권 교체를 통해 일정 정도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너리티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같은 한국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숙련된 정규 직 내국인 노동자는 다시 미숙련, 비정규,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 대해 다수자 그룹의 포즈를 취한다. 자신이 획득하게 된 작은 기득권이나마 그들과 공유하지 않으려 하고, 이를 통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정상인이 장애인을, 중산층 여성이 빈곤 여성 가장을, 제도권 교육을 받은 이들이 탈학교생들을, 인문계 고교 출신이 실업계 고교 출신을 상대로 역시 다수자 그룹의 역할을 하려든다. 독일이나 중동 등지에 파견되었던 외국인 노동자로서 마이너리티의 경험만 있던 우리 사회에 어느새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우리들도 상대적인 다수자 집단의 기득권을 그들에게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우리 사회의 지배 구조는 현재 격렬한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다.

  이제 마이너리티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질 들뢰즈는 이와 관련하여 "주류는 수가 적어도 스스로를 다수라고 제시하며 그래야 안심하는 사람들이다. 주류는 또 현재의 지배세력에 참여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과 동조하려고 하거나 독자적인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피지배자로 남길 원하거나 혹은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을 고스란히 역전시켜 보면 문화판에서 말하는 '마이너리티'의 정의는 가능할 것 같다. '마이너리티는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권력의 장악이나 지배 세력에 편입되기를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 세력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삶의 양태를 꿈꾸고 실천하며 기득권을 이용하여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마이너리티의 개념은 앞서 말한 수동적이고, 차별당하고, 배제 당하는 소수자 집단이 아닌 행동을 포함한 적극적인 개념의 마이너리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판에서 통용되는 긍정적인 의미와 달리 현실 속의 마이너리티는 고단하고 아픈 것이다. 들뢰즈의 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경고하고 있는 바가 좀더 명확해 보인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한 줌도 안 되는 혜택과 기득권을 가지고 스스로 주류라고 착각하지 말며, 한시라도 그 작은 권력을 통해 남을 지배하려 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때를 풍미했던 '중산층 되기의 허구'와 같은 것이다.

  마이너리티와 주류의 관계는 영구불변의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당신도 마이너리티일 수 있고, 주류일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좀더 탄력있는 사회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인정되고, 일탈의 허용 범위와 개인의 자유가 보다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상'의 범주가 좁은 사회, 이를 교정하려는 폭력의 강도가 높은 사회는 결국 파시즘에 이르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주류와 비주류 사이를 오가는지 모른다. 마이너리티와 주류의 선택 그것은 당신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선택 속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 2001년 11월 <가톨릭대학교 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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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오는 데에는


-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1897 - 1982)



죽음이 오는 데에는
거의 일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 그때
알몸의 손이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은 되돌려주었다
내 손이 잃었던 색깔을
내 손의 진짜 모습을
다가오는 매일 매달
광활한 여름의
인간들의 사건에로 업무에로

뭐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항상 몸을 떨고 있었던
나에게 나의 생활에
바람과 같은 커다란 목도리를 두르고
나를 가라앉히는 데는
두 개의 팔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렇다 족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만으로
잠결에 갑자기 나를 만지는

저 가벼운 동작만으로
내 어깨에 걸린 잠 속의 숨결이나
또는 한 방울의 이슬만으로

밤 속에서 하나의 이마가
내 가슴에 기대며
커다란 두 눈을 뜬다
그러면 이 우주 속의
모든 것이 나에게 보이기 시작한다
황금빛의 보리밭처럼

아름다운 정원의 풀 속에서
그러면 죽어 있는 것과 같았던
나의 마음은 숨을 되찾아
향긋한 향기가 감돈다
상쾌한 그림자 속에서


*

최인훈의 『광장』에서 나오는 이 대목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광장』에서 이명준은 <광장>을 찾아 월북했지만 그곳에서도 꿈꾸던 광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명준은 대신 무용수 은혜를 만나 그 여자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으로 절망과 허무를 이기고자 했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그는 사랑에서 그 자신이 超克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절망과 허무를 극복하려고 들었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1950년대 소위 먹물근성이라 해야할까. 티토가 끝끝내 소비에트를 버리지 못했던 까닭, 스탈린이 끊임없이 그의 제거를 염원했음에도 스탈린주의를 말끔히 치워버리지 못했던 까닭, 그건 스탈린주의를 경험한 좌파든 한국전쟁을 경험한 우파든 상관없이 그들이 살아왔던 과거가 현재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힘을 다해 성취한 현재의 소비에트, 현재의 반공주의에 입각한 국가 안보, 천박한 자본주의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


루이 아라공....

나는 그가 "미래의 노래"에서 보여준

인간만이 사랑을 가진 자이기에
자기가 품었던 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기가 불렀던 노래가 다른 사람의 입술로
자기가 걸었던 길이 다른 사람의 길로
자기의 사랑마저 다른 사람의 팔로 성취되고
자기가 뿌렸던 씨를 다른 사람들이
따게 하도록 사람들은 죽음까지도 불사한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미래의 노래 - 첫번째 연>

이런 대책없는 낙관주의를 사랑한다. 심지어 응당 시인이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시인이 자기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독자들에게 대책없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아니, 심지어 경멸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루이 아라공의 경우엔 그것이 대책없는 낙관주의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던 듯 싶다. 그래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싶다. 왜냐하면 그에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 러시아 태생의 엘자 트리올레트를 만나 결혼했고, 아내로부터 끊임없는 영감을 받았던 시인. 루이 아라공...

왜 아니겠는가?

그에겐 전 소비에트를 내어주고서라도 얻고 싶은 아니 결단코 바꾸지 않으리라 생각한 엘자 트리올레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조차 그녀의 두 팔이 다가와 안아주기만 한다면 이겨낼 수 있는 ...

루이 아라공은 아내 엘자의 이름을 건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엘자의 눈
나에게는 엘자의 파리밖에 없다

애처가였을까? 남자라서가 아니라 어떤 인간은 둘이되 결코 둘이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들국화의 노래처럼...

"혼자는 너무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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