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와 보리스 - 윌리엄 스타이그 | 우미경 옮김 | 시공주니어(1996)




"아모스와 보리스"
의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톰과 제리" 같은 우리 부부가 떠올랐다. 톰은 고양이고, 제리는 생쥐다. 그런데 이 둘 사이는 그렇게 단순한 고양이와 생쥐 사이가 아니다. 비록 톰은 고양이지만, 영리한 생쥐인 제리에게 늘상 골탕을 먹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한나와 조셉 바바라 콤비는 그들 자체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에 통칭 "한나 바바라(Hannah Barberra)"라고 불린다. 한나 바바라 시리즈 중 하나인 "톰과 제리"를 내 동생은 넋을 놓고 보았었다. 입에 밥 숟가락 넣는 것도 잊은 채 넋을 빼놓고 보았기에 종종 야단을 맞곤 했는데, 어렸을 때는 나 역시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 이 시리즈를 다시 보면 어렸을 적엔 왜그리 넋을 빼놓고 웃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배경과 소재만 약간씩 변화를 줄 뿐 판에 박힌 듯 빤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못되고, 음흉하지만 늘 골탕만 먹는 고양이 톰과 작고 힘없지만 영리해서 늘 승자가 되는 생쥐 제리 사이의 슬랩 스틱풍 액션이 반복되는 에피소드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리에겐 늘 사납지만 우둔한 불독 부자가 있어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해준다. 이 시리즈의 매력은 그런 역전과 반전의 미학에 있다. 현실 세계에선 당연히 강자인 고양이와 생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고, 음흉한 계획을 세운 톰의 흉계가 결국 톰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판에 박힌 이야기뿐이었다면 "톰과 제리"가 그렇게 인기있는 만화 시리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나 바바라 콤비는 종종 대중의 이런 반응을 알아채고, 톰에게 실컷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언제나 착하기만 한 제리가 아니라 종종 음흉해지는 제리가 있고, 그런 제리는 벌을 받는다. 혹은 톰과 제리가 합작해서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한다. 톰과 제리는 할리우드 고전 코미디 영화의 전형이랄 수 있는 슬랩 스틱과 스크루볼(톰과 제리의 우정은 종종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 같다는 점에서) 코미디를 만화로 절묘하게 옮겨온 것이 성공의 배경이다.

 

아모스는 생쥐다. 그러나 제리 같은 생쥐는 아니다. 아모스는 제리보다 진지하고, 무엇보다 바다를 사랑하는 생쥐다. 아모스는 뭍에서 태어나 뭍에서 살았지만 바다를 동경했고, 어느날 우연히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곤경에 처하고 만다. 뭍에서 태어난 뭍에서 자란 생쥐, 아모스의 이야기는 마치 부모의 품을 갓 떠나 좀더좀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과 흡사하다.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어머니의 품을 떠나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사회로 점점더 넓고 각박한 세상으로 나간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도 언젠간 자식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다. "아모스와 보리스"는 어린이들에게 이별의 의미, 우정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랑도...

 

종종 우리네 어린이문학 책들을 읽다보면 천편일률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아동문학평론가 원종찬은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에서 우리 아동문학엔 "쿠오레주의"에 비해 "피노키오주의"가 부족하단 말을 하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문학에는 해방과 교화의 기능이 있다. 해방이라 함은 거칠게 말해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교화란 일종의 간접체험(교육)을 의미하는 말인데, 우리 어린이문학이 많이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동문학에서 "피노키오주의"는 여전히 결핍상태이다. 혹여라도 그런 판타지를 다룬 아동문학작품들도 뭔가 사유의 뿌리가 없이 수경재배된 식물성 이미지를 지닌다. 식물성 느낌을 주는 건 교화를 주어야한다는 강박과 현실에 뿌리박은 동화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가 결합되어 생긴 가장 안좋은 경우를 의미한다. 톰과 제리, 아모스와 보리스는 모두 의인화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 자체가 일종의 우화적 판타지라 할 수 있다. ("톰과 제리"의 경우엔 약간의 이견이 있겠지만 긍정적인 부분에만 집중해 말하자면 재미라는 측면에서 다소 비교육적일 수 있는 요소들 혹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실 낯선 판타지의 세계는 절대 아니다. 도리어 이 이야기는 매우 낯익다. 힘은 없지만 항해를 꿈꾼 생쥐 아모스는 겁도 없이 바다로 나간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파선되고 넓디넓은 바다를 떠다니게 된다. 그런 아모스를 구한 것은 바다에서 아니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 보리스이다. 아무의 도움도 필요없을 것 같은 보리스도 어느날 바다로부터 밀려나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그런 보리스를 발견한 아모스는 친구 코끼리들을 불러 보리스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이것이 이 야기의 전체적인 얼개이다. 낯설기는 커녕 너무 낯익어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는지 도리어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다.

 

기실 아동문학시장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질좋은 창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저런 전래 동화 혹은 국적 불명의 세계 민속 동화,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위인전들이 난립해 있다. 게다가 워낙 소문에 눈 어둡고, 귀 얇은 유행이다 보니 한 번 입소문을 타고 번진 아동도서들은 불티나게 팔린다. 모모 출판사는 원래 한 번도 아동문학이나 그와 관련된 책을 출간한 적이 없음에도 흥행 대박의 결과로 빌딩을 올리네, 원작자와 저작권료 지급 문제로 송사에 걸리더니 원래의 기획을 살려 새로운 시리즈를 기획 출판하면서 중국에 진출한다고 한다. 저작권협약이 본격적으로 발효되면서 괜찮은 작가들의 작품을 서로 판형만 달리해서 중복 출간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대신에 저작권 시효가 만료된 작품들이나 애초부터 저작권을 따지기 어려운 전래 동화류들이 난립한다.

 

그런 중에 이 작품 "아모스와 보리스"는 낯익은 이야기를 어떻게 낯설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받고 은혜갚는 동물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소재이고, 그러다보니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류의 교훈을 다룬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아모스와 보리스"를 변별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는 아모스의 진지함이다. "아모스와 보리스"의 두 주인공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본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이 둘의 결말은 "그리하여 아모스와 보리스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했더래요"가 아니다. 이 둘의 우정은 서로의 목숨을 구할 만큼 진한 것이지만, 정작 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바다와 육지라는 두 존재가 누리는 삶의 토대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 둘의 결말이 이별이란 점에서 이 둘의 결말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접하게 되는 가장 강렬한 이별은 무엇일까? 졸업과 입학, 전학, 이사, 이민, 실연, 이혼... 여러 종류의 이별이 있지만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오랜 이별은 죽음이다. 바다와 육지라는 삶의 토대를 떠나선 살 수 없는 두 생물의 이별은 각각의 생물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해진다. 이 둘의 이별은, 이별과 죽음에 대해 이승과 저승에 대해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린이들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의 목숨을 구명할 만큼 친한 사이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물론 순진한 아이들은 아모스가 바닷가에 살고, 보리스는 그 해안가에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순진한 아이들도 자라서 언젠가는 이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 어리고 순진한 존재들의 가슴에 이별과 죽음이란 성인이 되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극복할 씨앗 하나를 몰래 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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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아비정전 (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감독 왕가위
출연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
제작 1990(홍콩)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 대.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염훙잉(유가령)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비(장국영)'는 전신 거울 앞에서 혼자 속옷 바람으로 맘보춤을 춘다. 그리고 내뱉는 한 마디. 그게 위에 적힌 대사다. 아비,  우리는 노신(魯迅)의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을 알고 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전후한 농촌을 배경으로, 이름 석자도 명확하지 않아 그저 '아Q'라고 불러야 하는 한 날품팔이 농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작가는 혁명당원을 자처했으나 나중엔 도둑으로 몰려 허무하게 죽어가는 아Q의 생애와 혁명 앞에서도 끄떡없는 권력을 지닌 지주 조가(趙家)를 서로 대조함으로써 혁명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왕가위 감독은 '정전'이라 이름 붙인 또 하나의 예술 작품을 통해 60년대의 홍콩 젊은이 아비의 허무한 죽음을 담아내고 있다.


아비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생모' 를 찾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바람둥이에 일자리라곤 찾아 본 적도 없는 막되먹은 청년이다. 그가 가진 재주라곤 주먹질과 여자 꼬시기 정도라고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아비정전>이란 이름으로 개봉되었지만,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Days of Being Wild>였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막 살아 버린 날들' 정도일 것이다. 내 생각엔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내가 이 영화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다만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일설에는 이 영화의 국내 개봉 당시 흔한 홍콩느와르물인줄 알고,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실망한 나머지 극장문 유리창을 박살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 <아비정전>엔 늘 '저주받은 걸작' 이란 엄청난 칭호가 따라붙는다. 걸작이란 말에는 동의하지만 과연 저주까지 받은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후 이 영화의 진가는 알음알음하여 수많은 영화매니아들에게 '왕가위 신드롬'을 만들어 내는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나의 비디오 컬렉션에서도 보물 1등급에 속한다).
 


 
발 없는 새 - '아비'에 대한 자기 동일시
상처없는 청춘이 어디있을까? 이 말은 이미 매우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내겐 <아비정전>을 남들보다 좀더 진하게 받아들일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아비가 세상을 막 살아 버린 이유가 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가 내게도 있었으니 말이다. 예술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을 때 내게 그런 영험한 효과를 주었던 첫 영화는 <아비정전>이었다.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그 중에서도 포유류(Mammalia). 과학사가들은 인간이 속한 종인 포유류만을 양서류나 파충류와 같이 그들의 서식지나 형태가 아니라 유난히 '젖먹이 동물'이라는 점을 강조한 사실은 당시의 여권신장 움직임에 두려움을 느낀 '카를 린네'의 의도적인 강조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이런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나는 내가 '젖먹이 동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도 인정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Mamma)'를 그리워했다. ('기상학'에서는 'mamma'를 가리켜 '유방운(乳房雲)' 이라고 한다. 이로써 내가 유난히 여성의 '젖가슴'에 집착을 보이는 이유가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하게 되었다. 흐흐) 내 인생의 사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그 육체성을 획득하지 못했던 그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아비'. 덥고 지저분한 기차칸에서 허무하게 죽는 '아비'를 보면서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다른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영화 속 캐릭터를 이해하는 방식은 제각각이겠지만 가장 오래된 이해방식 중 한 가지는 역시 자기동일시(Self-identification)일 것이다. 



영화 속 또 다른 나는 오후 3시쯤 무역체육관 매점에서 콜라 한 병을 사서 마신다. 그는 매점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의 이름을 알고 있다. 사실 바람둥이들은 주변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다만 무관심한 척 할 뿐이다. 아비는 수리진에게 말한다. 꿈속에서 만나자고. 다음날 다시 나타난 아비에게 수리진은 꿈속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비는 말한다. 안 잤으니까. 꼭 만나게 될거야. 오후 4시. 그녀는 꿈을 꾼다. 다시 찾아온 아비에게 수리진은 "뭘 원하시는 거죠? 친구가 되고 싶어. 내 시계를 1분만 같이 바라봐 줄순 있겠지? 그녀는 1분동안 시계를 바라본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수리진의 나레이션. '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아마 널 잊었을 껄 - 당신은 모른다. 버림받는다는 거.
아이가 어려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충격이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어머니와의 이별' 혹은 '어머니의 부재' 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이별' 혹은 '부재'를 가장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방식은 이것이다. '나는 버림받았다'는 인식. 이런 인식을 지닌 아이가 성장하면서 세상에 적응하는 방식 혹은 세상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방식은 아마도 '증오'가 아닐까 한다. 아비는 자신의 증오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다시 그녀를 버림으로써 복수하는 길을 택했다.



아비는 수리진을 찾는다. 그는 거의 매일 그녀를 찾는다. 1분은 2분이 되고, 그들은 함께 잠자리를 한다. 수리진은 아비를 사랑하게 되지만 수리진의 사랑을 느낀 아비는 더 이상 수리진 곁에 머물고 싶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러 갈래가 된다. 아비가 개망나니이므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늘 사랑이 두려운 법이다. 게다가 '아비'는 스스로 풀어야만 할 사랑의 본질적인 질문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버림받은 자는 늘 그것이 궁금한 법이다. 왜 날 버렸는지에 대한 굶주림. 아비가 수리진을 버린걸까? 글쎄, 궁색한 답변이 될진 모르겠지만 아비는 수리진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떠나가는 그녀를 잡지 않았을 뿐이다. 왜 잡지 않았던 걸까? 아비는 스스로 황폐한 인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황폐한 인간인 이유는 사랑이 머물 만한 마음의 공간을 그 자신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아비는 스스로 자유로운 새가 되길 원한 걸까? 나는 앞서 이야기한 새 이야기는 결국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멋부림 혹은 위장 정도에 머문다고 생각한다.

아비는 자신의 계모를 유혹하여 등골을 빼먹는 젊은 제비족을 흠씬 두둘겨 패준 뒤 제비족으로부터 계모의 귀고리를 되찾는다. 이를 지켜보던 루루(유가령)는 아비가 놓고 간 귀고리를 주워 가지고 있다가 곧 되돌아 온 아비에게 귀고리를 빼앗긴다. 아비는 귀고리 한 쪽을 루루에게 주면서 나머지 한 쪽을 얻으려면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다. 루루와 아비는 그날 밤 함께 한다. 루루는 아비에게 자신의 본명을 염훙잉이라고 알려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지만 아비는 별무관심이다. 벽을 타고 기어 올라 온 아비의 친구(장학우)는 아비가 루루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되돌아간다. 아침이 되어 아비의 집을 나오는 루루는 계단에서 아비의 친구(장학우)를 만난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말에 루루는 춤을 추어보이며 자신은 댄서라고 한다.


아비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아비는 계모를 찾아가 자신의 친모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계모는 말해주지 않는다.
"결코 니가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게 아냐. 지금 찾아간다고 뭐가 생겨? 아마 널 잊었을 걸." <엄마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 마르코가 자기 어머니를 찾아 떠날 때, 마르코는 과연 자신의 어머니가 술집의 여급으로 전락해 있을 모습을, 혹은 다방 마담으로, 사창가 포주로 변해있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이라고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을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어미를 찾는 자식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더라도 자식이 어미를 찾을 때, 그것은 태어나면서 끊겨 버린 탯줄의 흔적을 거머쥐고,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세월을 되밟아 나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런 자식에게 계모가 던지는 한 마디 "아마 널 잊었을 걸". 마르코에게 아버지가 어머니는 널 잊었다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이 장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어린 아비가 평생 동안 치렀을 고투가 능히 짐작되고 남는다.


사랑, 그런 걸 난 믿지 않았다 - 인생에는 오직 어긋남이 있을 뿐.
이 영화 <아비정전>은 사랑의 어긋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리진은 아비를, 장학우는 루루를, 경찰(유덕화)는 수리진을, 루루는 다시 아비를. 삼각관계도 모자라 오각관계로까지 보이는 이들의 만남은 그들을 내내 지배하는 홍콩의 어두운 배경들처럼 명암이 불분명해 보인다. 아비의 친구(장학우)는 루루에게 아비의 어린시절을 이야기 해 줌으로써 루루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만 루루는 이런 친구에게 야멸차게 면박을 주고, 빗 속에서 순찰을 돌던 경찰(유덕화)는 비를 맞고 서 있는 수리진을 발견한다. 수리진에게 말을 거는 경찰. 수리진은 다만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경찰은 아비의 집에 가서 수리진이 와 있다고 전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아비는 냉정하게 말한다. "짐을 가져다 줄테니 기다려." 수리진은 말한다. "같이 살고 싶어. 우린 안 어울려. 그리고 난 결혼따윈 안해. 결혼 안해도 좋아. 그냥 함께 있고 싶어. 당장은 내가 좋지만 평생을 좋아할 순 없을거야. 나랑 행복할 수 없어. 날 사랑한 적 있어? 난 사랑하는 여자가 많아. 한 여자에게 집착하긴 싫어." 수리진과 아비가 나누는 대화이다.



아비의 대사 중 중요한 부분은 "당장은 내가 좋지만 평생을 좋아할 순 없을거야. 나랑 행복할 수 없어." 라고 하는 부분이다. 바람둥이가 평생을 말한다. 게다가 행복할 수 없다니. 아비의 인생을 이 세상에 머물게 하는 것은 없다. 짐을 챙겨주는 아비. 루루가 신고 있던 슬리퍼가 원래 수리진 것이라면서 그것을 벗어주라고 말한다. 루루는 화를 내면서 "모든 게 남의 거라면 난 있을 필요가 없지. 갈꺼야. 가면 우린 끝이야. 모든 여자한테 이래? ...아니야. 난 그여자처럼 미련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아비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자신을 떠나게 만드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치 '나 원래 이런 사람이다. 그런데도 날 사랑할 수 있니?'라고 묻는 것 같다. 만약 아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널 사랑할 수 있다'  는 루루의 집착에 안주했다면 그는 그럭저럭 한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는 멈추지 않았다. 아비는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미에게도 버림받은 자식이 사랑이라니.

 <아비정전>의 주인공들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살아있는 캐릭터같이 여겨지질 않는다. 그나마 루루와 아비의 계모 정도만이 그나마 생생한 느낌이 든다. 그 까닭은 이 영화가 인물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나 스토리에 연연하지 않고, 이미지로 승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텅빈 전화박스와 비 내리는 거리, 야자수, 체육관 매점의 텅빈 벽에 걸린 벽시계 같이 영화는 보여줄 수 있는 걸 굳이 말로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로 해야하는 것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수리진을 도와준 경찰과 수리진의 만남도 그런 식이다.




"친구가 없나요? 저는 남이라서…. 맘에 담고 있으면 미칠 것만 같아요! 모두 잊을거라 믿었는 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노력했어요. 일에 매달리고 잠들면 잊겠지 생각했어요. 그 사람을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어요. 내 자신이 미워요. 계속 그럴 순 없잖아요? 오늘만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늘 그얘기군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래요! 내일도 그럴테죠? 감정은 자제가 필요해요. 그를 못 잊겠다면 당장 그에게 매달려요. 아니면 1분내로 그를 잊어요. 1분얘긴 하지 마세요! …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그가 1분을 가리키면서 영원히 날 기억할 거라고 했어요. 그 말에 맘이 끌렸어요…. 이젠 내 스스로 시계를 보면서 1분내로 잊겠어요." 

이들의 만남은 늘 엇갈린다. 경찰은 수리진을 기다리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어머니가 죽은 뒤 선원이 되어 떠나고, 아비는 루루를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아비가 떠난 뒤 루루는 수리진을 찾아가 화풀이를 하지만 "지금 우는 건 너잖아. 난 다 잊었어" 라는 말을 듣는다. 아비의 친구는 루루를 사랑하지만 루루의 마음은 아비의 뒤만 쫓고 있다. 아비의 친구는 홧김에 루루를 때린다. 결국 아비의 친구는 아비가 넘겨준 차를 팔아 그 돈으로 루루가 필리핀까지 갈 수 있는 여비를 마련해준다. 그는 루루에게 말한다. " 뭐든 어울려야 한댔지? 차도 그에게나 어울려. 난 어울리지 않아. 그래서 차를 팔았어. 필리핀에 가고 싶으면 가. 아비를 만나면 차를 팔았다고 전해주고 만약 못 만나면... 다시 돌아와." 사랑은 손아귀 가득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남는 건 그저 어긋난 흔적 뿐.

늦게 깨달은 사랑 - 새는 이미 죽어 있었다
필리핀에 도착한 아비는 생모의 저택을 찾지만 어머니는 역시 만나주지 않는다. 그가 전해들은 이야기는 다만 "이사갔다"는 말 뿐이었다. 아비는 말한다. "난 고개를 안돌렸다. 난 단지 그녀를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기회를 안주니 나도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아비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문득 그가 참 미성숙한, 편협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지만 마음으론 이해가 된다. 한편 선원이 되어 필리핀에 도착한 유덕화는 길에서 술에 취한 채 거리의 여인에게 가진 돈을 전부 털린 아비를 만난다(이 장면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슬쩍 반복된다).  이제는 선원이 된 경찰(이 영화 속에서 유덕화와 장학우는 이름이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 왕가위 감독의 교묘한 트릭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아비를 둘러싼 남자들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아비를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방에 데려다 쉬게 한다. 



영화 <아비정전>은 왕가위가 끊임없이 천착해보이는 '시간과 기억'의 메타포가 반복된다. 특히 <아비정전>에서 시간과 기억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아비가 수리진에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1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1분을, 그를 잊기 위한 1분'을 선사했지만 아비는 수리진과 함께 온 경찰(유덕화)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나?" 라고 묻는다. 경찰 역시 "아니, 만난 적이 없었어. 그리고 난 기억력이 좋지가 못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아비와 선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들이 서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 날 기차를 타고 떠난다던 아비는 친구를 만난다며 약속장소에 가고, 유덕화도 동행한다. 그러나 아비는 돌아갈 비자를 구하기 위해 브로커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아비는 돈을 내놓는 대신 브로커를 칼로 찌르고 그 와중에 두 사람은 함께 도망가는 신세가 된다.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선원이 기차도착시간을 물어보기 위해 잠시 비운 사이 아비는 뒤쫒아 온 일당에게 총을 맞는다. 아비는 말한다.

죽기 직전 뭐가 보이는 지 궁금했어. 난 눈뜨고 죽을 거야. 죽을 땐 뭐가 보고 싶을까? … 발 없는 새가 태어날 때부터 바람속을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었어. 그 새는 이미 처음부터 죽어있었어. 난 사랑이 뭔지 몰랐지만 이젠 알 것 같아. 이미 때는 늦었지만….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에 뭘했지? 난 기억이 안나는 데 어느 친구가 묻더라구. 그녀가 말했군. 그녀를 아직 잊지 않았나? 난 기억해야 할 건 잊지 않아. 서로 사귀었나? 잠시동안… 배를 탄 뒤론 연락이 없어. 우리가 안건 짧은 시간동안이었어. 나중에 그녀를 만나거든 난 다 잊었다고 전해줘….

사랑은 '기억'이란 불완전한 매개를 토대로 축적되고, 완성된다. 우리가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비디오를 찍고, 사진첩을 만드는 행위 역시 사랑이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한다는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비는 수리진에게 "당장은 내가 좋지만 평생을 좋아할 순 없을거야."라고 말했고, 계모는 아비에게 친어머니는 "아마 널 잊었을 껄"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기억과 함께 끊임없이 퇴색하고 노화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기억과 함께 그냥 퇴화해가는 것일까? 어쩌면 그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1분이 아닐런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우리는 소위 '왕가위 스타일'을 알고 있다. 템포를 가늠할 수 없는 편집과 쉼없이 흔들리는 화면, 그리고 의미가 모호한 혹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는 대사들, 그리고 동일한 주제가 무한히 변주되는 듯한 이야기를 말이다.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 벽두를 장식한 왕가위 돌풍은 말그대로 '우리들의 80년대'가 저물고, '나의 9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처럼 되었다. 젊은이들은 <중경삼림>의 짝사랑이지만 결코 어둡지 않고, 끈적거리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자신의 이야기로 간직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무협지 시대로 돌아가서도 왕가위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아비정전>은 그런 왕가위 스타일의 확연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의와 함께 그만의 독특한 이야기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홍콩 영화들과 구분할 수 있다. <아비정전>은 다양한 인물들의 독백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런 시점의 혼란은 영화를 해독하기 다소 어렵게 만드는 대신,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는 일상적인 심리묘사에 강점을 지닌 대만 감독 차이밍량과 흡사하지만 그보다는 덜 건조하다. 왕가위의 카메라는 훨씬 더 다양한 구도로 움직이고, 심지어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바라볼 수 없는 시점들을 제공하여 때로 인물을 화면 속의 사물처럼 비춰지게 만든다.



<아비정전>의 최대 강점은 무엇보다 캐릭터의 창출에 있었다. 그는 바로 '아비'라는 인물을 통해 망가질대로 망가진 젊음의 한 군상을 드러내고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 '아비'는 노신의 '아큐'가그렇듯이 시대를 담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아비'를 60년대의 홍콩, 그리고 90년대 중국으로 귀속될 운명이 좀더 확연해질 무렵의 홍콩으로 치환해 본다면 그 의미는 좀더 명확해진다. 중국이란 태생을 지닌 홍콩이지만 어미는 자식을 계모에게 떠넘기고 사라져 버린다. 홀로 남게 된 홍콩(아비)은 영국의 식민지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지만 결국 그것은 이식된 것에 불과하다. 홍콩의 자식인 '아비'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핑계로 막 살아 버리는 것이다. 결국 새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있는 채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아비를 보면서 감동받았던 이유, 일종의 자기동일시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단지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핑계로 막 살아 버리고 있는 모습에서였다. 정말 'Days of Being Wild'인 것이다. 비루한 삶을 견디게 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소설가 이동하는 그의 연작소설집 『장난감 도시』에서 이런 말을 한다. "빠져나갈 핑계거리를 만들고 시작하는 일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아비의 청춘은 늘 빠져나갈 핑계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생이었다. 그러고보면 나의 어린 시절 역시 늘 그런 핑계들에 젖어 있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겨줄 어머니가 없었던 나는 우산을 챙겨다 주는 어머니가 있는 친구와 주먹다짐을 했고, 가을 소풍에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좀더 나이가 들어서는 시대를 핑계댔고, 모든 정치적 인간들을 혐오했으며 철마다 오르는 등록금을 저주했다. 떠나간 사랑을 저주하며 다른 여자들을 울렸고, 다가오는 강철의 시대를 연마한다고 동지들 곁을 떠났다. "태어날 때부터 죽은 새" 운운하는 아비를 보면서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또다른 나였으므로…. 그러나 어릴 적에나 가능한 핑계를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간직한다는 것은 아찔하다.

핑계를 무기로 아이처럼 투정부리며 살기엔, 우리 앞에 놓인 生의 길이가 너무나 길어보이기 때문이다.


아비가 죽은 뒤 아비를 찾아 필리핀에 도착한 루루는 아비가 묵었던 숙소에 방을 잡는다. 수리진은 이젠 그를 잊었는지 예전처럼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경찰이 순찰을 돌던 텅빈 거리 공중전화에 벨이 울린다. 이제는 받을 사람도 없는 …. 영화가 이렇게 끝나는가 보다 생각할 때, 갑자기 음악이 흐르며 양조위가 등장한다. 그는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며 지폐 뭉치를 세 자신의 양복 웃저고리 안에 쓸어 담는다. 마치 아비가 첫 장면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빗듯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왕가위만의 영화세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끈임없이 주체와 타아는 끊임없이 변주되고, 낯설지 않은 세계에서 낯설은 척 가장하며.... 새로운 사랑과 이별은 연주한다. 어떤 의미에서 왕가위의 작품 중 걸작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아비정전>... 나머지 영화들은이 영화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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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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