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 김태희 옮김 | 교양인(2006)

 

예전에 나는 내 개인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person-goebbels.htm)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닥터 괴벨스에 대한 제법 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책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이 다루고 있듯 1,000여 쪽에 육박하는 분량은 아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나는 하나의 뿌리를 가진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전쟁이 1648년, 30년간 지속된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 의거하여 생겨난 유럽의 근대민족국가체제의 종말이자 혹은 지속적인 파국의 시원(始源)이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중사회의 도래 이후 대중과 정치, 대중과 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괴벨스를 다루게 되고, 그에 대해 글까지 썼던 이유 역시 그와 같다. 로버트 O.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제 정치가들은 좌우를 막론한 누구든 대중선거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기존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대중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라고 파악하고 있는 동안, 파시스트들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깨우치고, 이들을 동원하는 프로파간다 능력을 이용해, 그들이 선전선동에 있어 모범으로 삼았던 좌파를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한 나치 세력 가운데 이 방면에 있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이가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디. 우리가 지난 독재정권 아래에서 했던 여러 정치적 경험들 역시 독일의 민중들이 겪었던 선동의 경험과 유사한 측면들이 있었다.

 

나치 독일과 제5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경로를 겪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이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였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히틀러의 뮌헨 폭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합법적 정권 장악의 초석이 되었고, 12.12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박정희 식으로 곧바로 집권 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추는 절차는 거쳤다. 이후 나치가 독일 제국의회 건물 방화사건을 빌미로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5공 역시 5.17 확대계엄조치를 통해 5.18 광주 민중항쟁을 유도하고, 이 과정을 통해 공세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악명을 떨친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조처 등도 매우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라디오 대량 보급과 컬러 TV보급, 프로 축구, 야구, 나치의 분서와 5공의 금서, 국민차 "폴크스바겐""티코", 베를린 올림픽과 서울올림픽, 유대인 탄압과 지역감정 등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독일 나치 정권의 정책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 혹은 대중 선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유럽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는 네오 나치즘과 파시즘적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 오랫동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내면화하도록 강요받아온 우리 사회의 근저를 흐르는 기류가 그만큼 심상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리 사회가 국가주의화 되어가고 있다거나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파시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탈국가주의, 탈민족주의 역시 앞서의 염려만큼이나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서양의 역사적 경험들을 단선적으로 우리에게 대입시켜 해법을 강구해볼 수 없을 만큼, 급속하고 변화무쌍하게 일어나고(어제까지는 산아제한을 관장하던 단체가 오늘은 출산을 독려하는 것처럼) 있으므로 모순 자체를 살피는 시각 자체도 복잡하고,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자녀들인 헬가, 힐데가르르, 헬무트의 모습(1937)이다. 마그다는 괴벨스 못지 않은 히틀러 추종자로 자녀들 이름을 모두 히틀러의 'H'를 따서 지었고, 히틀러와 제3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히틀러 없는 세상에서 살 필요가 없다며 자녀들 모두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뒤 괴벨스와 함께 자살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제목 역시 원제인 "괴벨스"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으로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내는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분량에 미리부터 진력을 내지만 않는다면 퇴근 후 두어 시간씩 넉넉잡고, 사오일이면 한 차례 정도는 무리없이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무려 2주 가량이 걸렸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나의 넘치는 흥미와 지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의 글이 매끄러운 문장과 번역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나오고 한 달쯤 뒤였던가? 우연히 퇴근하는 길에 이 책의 옮긴이인 김태희 선생이 CBS(?)던가 모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말씀도 논리정연하게 잘 하고, 번역 솜씨 역시(독일어는 모르지만 우리말은) 빼어난 편이라 생각이 들었다. 대개 책이 재미있으려면 소박하게는 우선 주제가 관심있는 분야여야 하고, 문장이 좋아야 한다. 물론 장정이나 기타 등등이 좋으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삼박자를 두루 갖추고 있어 높은 점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다만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것은 오로지 저자의 문제이지 옮긴이나 출판사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렵지 않게 다른 평전 작가들, 예를 들면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이를 연상할 수도 있고, 파시즘과 관련해서는 로버트 O. 팩스턴, 빌헬름 라이히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사실 우리가 쉽게 입에 올리긴 하지만 슈테판 츠바이크, 아이작 도이처, 이사야 벌린, 요아힘 C. 페스트가 저술한 평전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를 이들에게 비유하는 것은 크나큰 결례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들과 로이트의 가장 큰 차이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사실 한 인물이 시대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해 그에 대한 평전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앞서 말한 이들이 이뤄냈던 작업들 역시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평전이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한 명의 뛰어난 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안목과 통찰을 통해 인물을 심도있게 파고 들어가는 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지루하고, 험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평전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선 성실성일 것이다. 그 점에서 로이트는 일단 합격점이다. 괴벨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달리 생전에 일기를 남겼고, 이 일기는 나치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괴벨스에 대해서는 제법 풍성한 자료들이 있으나, 문제는 로이트가 새롭게 입수한 자료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그 부분에서 로이트가 지나치게 자료적인 충실함, 작가이기보다는 역사가적인 입장을 관철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료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 임팩트한 순간이 모자라고, 그의 새로운 해석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괴벨스에 대한, 그가 살아온 행적, 그가 역사 속에 남겼던 여러 궤적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 쉽지 않다. 앞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괴벨스는 이전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정치인들과 달리 대중을 상대로 정치 선동을 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행적을 고려했을 때 괴벨스 평전에서 대중과 괴벨스의 상관 관계, 실제 대중의 반응 등 의미있고 생생한 일화들도 충분히 삽입되었을 법한데(전체 페이지 분량를 보자면 더욱더) 그런 내용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물론, 앞서의 문제에 대해 로이트는 괴벨스 평전을 아래의 관점(소위 '野史'라고도 하는)보다는 정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 부족하다는 나의 느낌은 남는다. 분량은 넘치지만 괴벨스의 그런 행적들이 당시 독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다시 인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로이트는 잘 드러내질 못하고 있다. 다소 역부족이란 인상이 든다는 것이고,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날 괴롭혔다. 다소 우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책 속의 사진에 달린 설명(캡션)이 작가의 본 문장보다 도리어 의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끝으로 정리하자면,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에서 나는 "괴벨스"는 필요충분으로 읽을 수 있었지만, "대중선동의 심리학" 영역에 대해서는 다소간 아쉬움을 느꼈고, 그 원인을 작가가 자료들을 적절하게 요리해내는 능력, 통찰력 부족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악하였으므로 그 유능함이 더욱 돋보이는 괴벨스에 대한 책이 우리 말로 이렇듯 훌륭하게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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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 김진석 | 나남출판(2003)


지식인은 무엇인가? 지식인은 누구인가?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를 묻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있다. 이때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사람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물을 뿐 어째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는다. 제갈량과 정약용이 살던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도 '현실 참여'와 '안빈낙도' 사이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인들과 달리 이 시절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엔 마르크스가 말하는 그런 류의 "소외 현상"은 없었다. 188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사이 서구 사회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사상 유례없는 대변동의 시대를 경험했다. 정치적으론 프랑스 대혁명 이래 꾸준히 지속되어온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정치 혁명이 나름의 결실을 맺으며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권의 제한이란 사회 위계질서의 마지막 정치(형식)적 보루가 해체되었다.

 

보통선거 이전의 정치란 교양인들(소위 지식인들)의 몫이었다. 이제 지식인들이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대중이란 필터를 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이제  과거 노동자들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듯, 그들의 지식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렇기에 지식인의 위기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은 항상 구체적 사실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그는 항상 구체적 해답을 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식인에게 사회가 부여한 책무이자 동시에 지식인 스스로가 자신에게 내린 책무이다. 지식인이 맞닥뜨리는 구체적 사실이란 현실이자,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사건이다. 지식인들 앞엔 매일매일 해석과 분석을 요구하고 있는 새로운 사건들이 터져나온다.

 

오늘날 파시즘은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이기 보다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감이 있다. 그러나 로버트 O. 팩스턴의 말처럼 "환호하는 군중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버리면 파시즘의 출현이 "한나라의 결함있는 역사가 파시즘을 탄생시켰다는 겸손한 듯 오만한 믿음"을 품게 만든다. 팩스턴은 이런 손쉬운 믿음이 "쉽게 파시즘을 방관하는 국가들의 알리바이로 바뀔 수 있다. 즉, 자기네 나라는 그런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고 믿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즉, 파시즘은 단순히 민족적 증오를 부추기는 능력이 있는 파시즘 지도자의 카리스마 탓만도, 문제 있는 역사의 결과만도 아니란 것이다. 대중의 동의없이 파시즘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김진석의 책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의 글은 때로 단호하게, 때로 솔직하게, 때로 부드러운 어조를 구사하면서 마치 '패스트리(pastry)'처럼 여러 겹으로 겹친 이론과 현실의 자장 사이를 "포정의 칼"처럼 움직여 나간다. 머리말에서 김진석은 "파시즘이나 극우 세력처럼 거대하고 명백한 악이 있는 듯 하지만, 문화권력의 경우처럼 문화에 관한 세심한 구별이 요구되는 폭력"도 있다고 말한다.

 

"폭력과 파시즘을 비판하는 일에는 이상한 맹점이 있다. 이것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열성이 지나친 나머지, 알게 모르게 모든 폭력을 파시즘과 동일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모든 폭력적 경향이나 제도들이 그 자체로 악이며 따라서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주장은 거기서 불과 한 걸음 거리에 있다. 도덕적 근본주의. 여기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일상생활의 관습과 제도 속에 조금이라도 폭력의 기미가 있으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여기 또 파시즘이 있다!'라고 호들갑을 떨며 소리치는 지식인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 평화주의에 근거하여 보통 세속인들이 실행하는 다소 복잡한 모양의 행위와 실천에 모두 폭력의 낙인을 찍는 지식인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가 그 이념에서 현실적 폭력을 반대하기에 실제로도 폭력과 뚝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에!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이런 근본주의도 폭력적 성향을 띤다. 폭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별 탈이 없는 이상주의 같지만, 어떤 폭력적 실천이든 파시즘이라고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즉시 그것도 또한 그것에 고유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를 테면 사제적 권력의 전통."

 

지식인 김진석은 이렇듯 자청하여 "여러 차원에서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운다." 스스로 싸우기를 자청하여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문제의 여러 결들을 짚어간다. 그 와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그의 고백대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다.

 

"폭력뿐 아니라 근본주의는 어떤 차원에서는 그저 분석하거나 서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폭력과 근본주의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싸우는 방식을 자청했다. ...<중략>... 힘든 이유는 그렇게 글과 담론을 통해 양쪽으로 싸워도, 결국은 현실의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바닥에서 기기 때문이다.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현실의 바닥에서 기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철학적 글쓰기는 "사회와 정치의 바닥, 밑바닥으로 내려와서 기어야 했다. 특별한 혹은 뛰어난 개인들의 정신적 성취를 목표로 삼는 대신, 세속적 삶을 사는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력의 존재를 성찰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어떤 이는 우리 사회는 행동이 과소하고 말과 글이 과대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분명 우리 사회의 말과 실천의 비율에선 압도적으로 실천이 과소하나,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엔 이 둘 모두 절대적으로 과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김진석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이 책은 그가 계간 "사회비평"의 편집주간을 맡아 보면서 그간 우리 사회의 "폭력과 근본주의" 문제에 대해 그가 그때그때 발언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의 연원이 그런 탓에 읽는 중간중간에 다소 겹치는 부분도 보이지만, 그의 비판이 보여주는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이 책은 전체 4부 - "제1부 안티조선에서부터, 제2부 통제권력에 시달리는 자율, 제3부 위험한 근본주의에 빠진 파시즘론, 제4부 개혁을 위한 철학" - 로 구성되어 있다. 안티조선 문제에서는 강준만 중심의 안티조선 운동이 지닌 선명성에 비해 대중들의 내면화된 지배논리가 강조되는 차원에서는 어떤 대응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응 차원의 빈곤함을 지적한다. 김진석은 과연 안티조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여러 운동 가운데 배타적 우선권을 부여받아야 할 만큼 시급하고 긴급한 문제인가를 반문한다. 극우경향에서는 조선일보가 제일이겠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다른 유사한 악덕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안티조선운동이 비판의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선명성을 주장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대오의 단일화만을 강조해 냉정하고 섬세한 비판의 가능성, 즉 유연성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다.

 

무엇보다 김진석의 비판이 가장 날카롭게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3부 "위험한 근본주의에 빠진 '일상적 파시즘론'과 비폭력주의 - 임지현과 문부식, 그리고 박노자"에 대한 것이다. 김진석은 근대적 국가권력과 제도 전체를 '악'(때로는 절대악)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전면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는 임지현, 문부식, (박노자) 등의 '우리안의 파시즘' 논의가 지닌 맹점, 사회내의 모든 권력(혹은 권위)를 파시즘과 맹목적으로 동일화하면서 현실적으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어 보이는  '유토피아'적 상태를 상정하는 것 자체를 또 다른 폭력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박노자를 괄호 안에 집어 넣은 것은 임지현, 문부식과 조금 다르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박노자에 대한 비판 역시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문제들이 민중을 과도하게 메시아적 변혁의 주체로 삼는 민중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성찰한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략>... 이런 내면적 성찰을 실행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의 폭력에 대해서만 저항하는 태도가 일면적이라는 점도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지식인이라면 어렴풋이 알려진 사실이더라도 새로운 개념을 빌려 설명하려는 욕구와 의무가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지만, 임지현과 <당대비평>은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이론적 틀의 소유권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그 개념 자체가 공허해질 정도로 그것을 총체화시켰을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이중적 결과를 낳은 듯 하다."

 

민중을 변혁의 주체라고만 보는 민중주의가 형이상학적 오류에 빠졌다면, 거꾸로 임지현의 비판, 민중이 무조건 억압되어 있기에 전면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에 못지 않게 형이상학적이며 관료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권력을 추방해야 할 것처럼 주장하면서도 어떤 저항이 조금이라도 권력을 행사하면 서슴없이 끝내는 저항운동 자체가 권력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을 가하는 파시즘의 낙인을 찍을 준비를 한다. '일상적 파시즘'의 주장이 위험한 것은 그 논리 내부에 있다.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도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미시 권력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기에 모든 저항이 권력과 파시즘 코드를 이미 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면, 저항 그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박노자는 "폭력과 절대로 어떤 형태로든 인연(악연)을 맺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고 하는데, 그런 각오는 한 개인에게는 내면적 성찰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기원을 가진 사람도 좀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화되고 제도화된 폭력은 군대나 궈투를 즐기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경쟁적 교육환경 속에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행위조차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다. 개인적 성실함은 암묵적으로 폭력적 구조를 용인하거나 추인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배타적으로 상징적 권력과 상징자본을 취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소련 체제에서 대학생은 병역을 면제받았기에, 그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폭력적 사회에서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도 특권적 집단에 속해야 한다는 평범하고도 무서운 진리가 확인되는 것이 아닐까."

 

김진석은 "박노자가 이처럼 '절대로 비폭력적인 양심'에 지나치게 호소할 때, 효과적 정치 경제적 관점이 많은 경우 근본주의"로 뒤덮히게 된다고 비판한다. '일상적 파시즘론'이 대중의 마음에 온통 파시즘의 낙인을 찍어놓고 권력과 국가로부터의 전면적 해방을 외치는 것은 공허하다. 극우적 민족주의, 정치경제적 파시즘과 싸우는 실천적 차원에서 박노자의 양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차원으로 변환될 때 일상적 파시즘은 근본주의의 공허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진석이 폭력과 싸우며 동시에 폭력의 완전한 제거를 주장(혹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하는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얼핏 우리가 오래전부터 혐오해 마지 않던 양비론과 닮아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김진석의 좌충우돌을 양비론과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앞서 김진석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비판은 "현실의 바닥에서 기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대로 우리는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현실의 바닥에서" 기어갈 수 밖에 없다. 현실을 거세한 이론의 공허함으로 무장했을 때, 비록 미끈해 보이는 논리를 따르는 개인의 양심은 흡족할지 몰라도 그것은 더러운 땅을 여의고는 누구도 깨끗한 땅을 밟을 수 없다는, 땅에 넘어진 자 그 흙을 짚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다. 물론, 나는 김진석이 긋고 있는 전선의 동일한 위치에 서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긋고 있는 전선에 동의할 수는 있다. 그것이 내가 그의 이 책을 읽고 내렸던 결론이다. 현실의 바닥을 기고 있기에 우리는 현재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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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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