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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21 삶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Beyond life nothing goes!) (5)



"고양이는 쥐를 가지고 놀 때, 쥐를 얼마쯤 도망치게 버려두기도 하고 쥐에게서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쥐가 고양이의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즉 공간, 희망, 빈틈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를 권력의 실체, 좀더 단순히 말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다." - 엘리아스 카네티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805, 루브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길가는 사람을 절벽으로 내몰아 죽이고, 돌림병에 시달리던 테베를 구원했지만, 결국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 붙어먹은 인간이었으므로 테베의 시민들에게 버림받았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영국의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후 치러진 선거에서 수상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대규모 융단폭격으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고, 현대적 전략폭격의 개념을 창시했던 이른바 폭격기 해리스로 불렸던 영국의 공군사령관 아더 해리스는 전후 '학살자 해리스'라 하여 훈장도, 기사 작위도 수여받지 못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은 단순히 상대의 육신을 취하는 카니발리즘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인류공동체는 필요에 따라 최고 권력자들도 희생양으로 요구한다. 그것이 군중과 권력의 진정한 관계이다. 

말벌 한 마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수만 마리의 꿀벌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다. 말벌은 학살대상자를 찾아 정탐 말벌을 내보내 벌통을 확인하는 순간 페로몬을 발산해 동료 말벌들을 불러들인다. 정탐꾼의 페로몬 향기에 이끌린 30마리의 말벌은 벌통 하나에 있는 30만 마리의 꿀벌을 유유히 학살한 뒤 꿀벌이 애써모은 꿀과 애벌레들을 이용해 수주일 동안 살아간 뒤 다시 새로운 벌통을 찾아 학살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어떤 꿀벌들은 벌통을 정탐하기 위해 찾아온 말벌 한 마리가 미처 페로몬을 발산하기 전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꿀벌들이 동시에 한 마리의 말벌을 에워싸고 군무를 춘다. 꿀벌은 체내 온도가 48도까지 올라도 견딜 수 있지만 말벌은 47도까지만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말벌 한 마리를 에워싸고 벌어지는 꿀벌들의 군무는 자신들의 체온을 높여 말벌을 쪄 죽이려는 속셈이다. 꿀벌들이 집단적으로 추는 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파괴할 타자에 대한 방어이자 개인적으로는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한 개체를 희생시킴으로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여러 군체들이 생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작은 어류들이 집단을 형성해 포식자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다. 

한 개체로 수만 마리의 꿀벌을 순식간에 살해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인 말벌이지만 꿀벌들의 집단방어체제에 갇힌 말벌은 꿀벌의 아름다운 춤이 빚어내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숨진다. 인류의 집단적 지혜가 숨겨져 있는 신화 속의 수많은 영웅들, 반신반인의 초인적 능력을 갖춘 영웅들이 결국 사소한 질투와 시기로 인해 혹은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결국 비참한 몰락을 맞이하는 까닭은 평범함 군체들의 자기보호본능, 공동체를 핑계로 벌어지는 카니발리즘이다. 영웅은 죽음 이후 최고의 장례로 받들어지지만 살아 생전엔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 

사람은 육신으로 이루어졌고,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업보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업보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업보다. '바보 노무현'은 우리가 부추겨 올린 줄에 올라 한바탕 권력을 누렸다. 그 뒤 줄에서 떨어지자 다시 우리 손에 잡아먹혔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내는 애도 역시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 


▶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 1905~1994)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권력을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비유했지만 나는 가끔 실제로 벌어지는 사회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정치학적인, 사회학적인 학습이나 훈련보다 꿀벌이나 개미 같은 곤충의 생태학, 늑대나 침팬지, 오랑우탄 같이 군체를 이루는 포유류에 대한 생태학 학습이 더 절묘하게 들어맞는 순간들을 발견하곤 한다.

"인간이 먹이를 구하는 방법은 교활하고 피비린내가 나며 끈덕지다. 수동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온건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멀리 있다고 감지하자마자 자기의 적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인간의 공격용 무기는 방어용 무기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을 '보존'하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시에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다른 것들을 원한다. 인간은 다른 것들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그것들을 죽이기를 원한다. 인간은 다른 것들이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살아 있으려 한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라고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했지만 가장 최후에 살아남는 인간, 다시 말해 최후까지 살아남는 권력자는 노무현이나 이명박 같이 특정한 개인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존재가 아니란 점이다. 우리는 모두가 남을 박해하는 존재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나보다 약한 자를 살해하고 괴롭힘으로써 생존하지만 그 결과 죄와 불안은 더욱더 커진다. 우리는 죄와 불안으로부터 구원되기 위해 자신을 박해받는 자와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애도'란 그런 것이다. 애도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닌 산 자를 위한 것,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산 자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다.

마피아의 법칙,
"살인자가 가장 큰 목소리로 애도한다." 노무현의 장례식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 국민장으로 치러진다. 인간사의 보고로 일컫는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이 한 번은 상대의 죽음을, 그 다음엔 자신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 장면에서 제갈공명은 자신의 계교로 죽음에 이른 주유의 장례식에 참석해 크게 곡하고 조문한다. 너무나 서럽고 애닯게 조문하는 제갈량의 모습에 감동한 오나라 사람들은 저처럼 자신을 잘 알아주었던 제갈량을 질시하다가 결국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한 주유를 협량한 인사로 여겼다. 

두 번째 장면에서 제갈공명은 사마중달의 공세로 위기에 처한 정국에서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일련의 사태 진전까지 염두에 둔 계교를 꾸민다.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첩보를 접하자 후퇴하는 촉나라 군대를 급습한다. 그러나 이를 미리 예견했던 제갈량은 자신을 꼭 닮은 목각 인형을 만들고 성문을 활짝 열어 사마중달의 의심을 부추긴다. 자신의 꾀에 자기가 빠진 사마의는 더이상 촉나라 군대를 쫓지 않고 후퇴한다. 이것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삼국지>의 일화다. 

그러나 '바보 노무현'의 죽음에서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주유, 사마의 중달을 떠올리는 것도 부질없는 짓 같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에 대해서는 별로 애도하고 싶지 않다. 그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세상 바람처럼 와서 풍운에 따라 국가권력의 정상까지 올랐다가 떠나매, 전국민의 애도 속에 한 시대의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니 그로서도 후회가 없진 않겠으나 떠나는 마당에 담배 한 개비 이외 무엇이 아쉬웠으랴. 부디 잘 가시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업보 속에 또 무엇을 애도하랴. 

"삶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Beyond life nothing g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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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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