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앙드레 고르는 내게 있어 마르크스 이후 발견한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중 하나였다. 이반 일리치를 계승한 정치생태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산업문명 전반을 반추해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생태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남성(sex)으로써 태어난 남성(gender)'이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생태주의’를 하나의 실천적 이념(정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모든 문명체계(혹은 문화)를 극복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앙드레 고르가 평생의 반려였던 도린에게 보낸 사랑의 메시지이자 동시에 변명의 편지였던 『D에게 보낸 편지』(학고재, 2007)를 읽고 나는 도저히 그가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발견한다.

첫째는 정치생태학적인 그의 생각을 한 개인이 옮긴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이다. 산업물질문명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없이, 다시 말해 마르크스적 아젠다의 수행 없이 신좌파의 정치생태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는 나의 현실적 판단은 여전하다. 다시 말해 나의 가슴은 프루동과 일리치를 쫓더라도 머리는 여전히 마르크스와 그람시의 제자일 수밖에 없다.

둘째는 앙드레 고르처럼 사랑하며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독일군의 징집을 피해 달아났던 그는 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이론가로서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를 통한 문화사회로의 전이가 자본주의 산업문명이 말하는 진보(?)의 잔인한 흐름을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 여겼다. 당시 이미 그는 80년대 이후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산업시대의 종말을 경고했었다.

앙드레 고르는 1947년 처음 만난 영국 출신의 도린과 사랑에 빠져 49년 결혼했고,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 년간 간호했다. 그리고 2007년 9월 22일, 자택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내가 도저히 그처럼 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아내와의 결혼을 결심하기 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것이 과연 잘하는 결정인지 알 수 없었다. 앙드레 고르처럼 ‘결혼을 부르주아 계급의 제도’라는 이념적 반대도 컸지만, 동시에 카프카적인 고민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고민이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라고 고백하는 앙드레 고르의 모습은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회의하고, 버릇처럼 매일매일 허무에 빠져드는 한 남자, 자신조차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길 더 즐기는 사람이 사랑이라니. 나는 나조차도 책임질 수 없는데….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세 명의 여인이었다. 한 사람은 어머니를 대신해 오랫동안 날 길러준 작은 어머니였다. ‘결혼이란 너만의 선택이 아니라 상대의 선택이기도 하므로 네가 모든 걸 책임지려 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흡사한 조건에서 자란 내 누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로부터 빠져나가겠다는 건 비겁한 짓이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 붙잡은 사람은 아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의 결정은 이미 그 전에 나와 있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일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거예요.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인 만큼,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끝없이 확인하고, 적용하고, 또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방향을 재수정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함께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갈 거라고요.”<본문 24-25쪽>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린의 말이 그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신이 도린 없이 살 수 없는 상태였기에 저 말에 붙잡힌 것이란 뜻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확신과 불안 사이를 오간다.

“떠나면서 당신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난 온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사는 것보다 나 없이 살 때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권위가 있었고, 대인관계와 조직에 대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편안했고, 또 남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신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속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지요. 당신은 남들 문제를 직관적으로 놀라울 만큼 빠르게 파악하고, 남들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본문 30-31쪽>

결혼 전 잠시 헤어져 있는 동안 연인은,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은 상대방이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모양이다. 나는 견딜 수 없는데, 당신은 이 상황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길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건 아마도 탯줄을 끊고 나온 아기가 어미를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아니 절대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상황과 흡사하다. 말 그대로 앙드레 고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도린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당신이 나를 알게 된 이후로, 내가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했던 일에서 실패한 것을 어떻게 당신이 감당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나는 얼마동안이 될지 몰라도 당분간 몰두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일에 눈 질끈 감고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흔들리지 않았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더군요. 당신은 누누이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삶은 글을 쓰는 거예요. 그러니 글을 써요.” 내 소명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당신의 소명인 것처럼요. <본문48쪽>

문득 이 장면에서 나는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베티블루 (Betty Blue 37.2 Le Matin)>이 떠올랐다. 소설가를 꿈꾸었으나 계속해서 거절당하던 ‘조르그’에게 ‘베티’는 영감의 원천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도린’과 ‘베티’. 두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한 사람은 영화 속 인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실존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 하자고. <본문 89-90쪽>

앙드레 고르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오만을 사죄하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의 회고 속에서 ‘도린’은 여러 모습으로 생생하게 기억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There is no wealth but life.)” 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또한 의미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순간만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문득 그 시절의 나를 결심하게 만든 것은 ‘나를 포함한 온 세상을 저주하는 동안에도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이율배반의 모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다.

"내 생각에는 어릴 때 좋은 아버지를 두었던 사람이 나중에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 (...)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도린이 아이에게 쏟는 사랑을 질투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앙드레 고르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그가 정직한 사내였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생겨나는 아이는 축복이라고 세상 모든 인간이 그리 생각하지만 오랫동안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한 사내는 간신히 한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기에 그 여인을, 그 사랑을 비록 자신의 아이라 할지라도 나눌 수 없었다.

"도린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과 화해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성공적이었는데, 그건 내가 도린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가능했지요."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앙드레 고르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여인 도린 앞에서 정직해지고자 했다. 나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결혼한지 10년만에, 이제는 더이상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시도를 포기했을 때 자연스럽게 들어선 아이다.

모든 예술가는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이상을 품었을 때만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예술가는 아니지만 글쟁이로서 그런 이상을 품었었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등장하는 주인공 '오스카'처럼 오랫동안 나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 더이상 늙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나이 먹기로 결정한 순간 갑자기 밀어두었던 세월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 17살 어린아이였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마흔 살의 중늙은이가 되어버렸다. 급격한 파도처럼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난 4월 산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가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다고 전화를 한 순간 나는 희열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나 하나도 책임질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진정으로 책임져야만 하는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외로운데, 외롭다고 누군가의 품에 징징대고 파고 들 사람이 필요한데, 내 문제만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가 여전히 내 가슴을 돌덩이처럼 짓누르는데, 어느날 갑자기 미련없이 이 세상을 하직해도 후회가 없는데, 지금도 비바람불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흙강아지 마냥 뛰어놀다 낯선 여자랑 눈맞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떤 이는 나에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하며 축하를 건넨다. 나 역시 집사람과 함께 병원에서 처음 본 아이의 모습을 보며 감동했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겨우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아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선 가느다란 탄성이 터져나왔다. 도저히 이 세상 일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이제 나에겐 더이상 나만의 여자가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웃었다. '참, 한심한 사내로구나. 너란 남자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앙드레 고르도 그랬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 앙드레 고르의 대표작인 "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 생각의나무(2008년)"와 함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 생각의나무(2011년)"도 최근에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니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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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 후지메 유키 지음 | 김경자 | 윤경원 옮김 | 삼인(2004)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싼 논쟁과 성의 역사학

- 새로운 혹은 해묵은 논쟁의 관점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 -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부제가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의 신체를 국가가 어떻게 관리(통제)하여 왔는가? 그것은 근대의 틀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제되고, 억압되어 왔는가를 마르크스적인 관점과 페미니즘의 관점을 이용해 연구고찰한 결과물이다.


후지메 유키는 근대공창제는 군대, 군사주의, 근대국민국가 체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도는 군대 위안과 성병 관리를 기축으로 한 국가관리 체계이며, 근대국가 건설, 특히 강력한 군대 건설의 이익과 결합해 탄생한다. 성병 검진을 통해 질병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여성을 창부로 등록시킨 이 제도의 목적은 성병에서 남성, 특히 장병을 보호하는 것이다. 캐서린H.S.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드러난 사례(1965년)를 요약해보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병사들의 약 84%는 성매매를 경험했으며, 성매매의 주요원인은 동료의 압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은 성매매와 성병을 관리하는 것은 전쟁과 전쟁 준비에 저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관리할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입장에서 살폈을 때 이런 제도는 거리의 여성들에 대한 시민권의 전적인 폐지를 국가가 공인하는 최초의 정책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 병사들이 걸리는 가장 많은 질병 1위는 성병이고, 2위가 감기였다고 한다." 근대국민국가의 거의 모든 성매매 관련 법안은 남성고객과 성매매 여성의 처벌에 차등을 두었고, 알선업자와 포주는 체포되지도 않는 법률이었다.


또한 저자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본국과 식민지에 공창제를 도입하는 과정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산업혁명의 유럽 대륙 및 미국으로의 파급, 선진자본주의 각국에 의한 식민지 분할, 상품경제의 침투에 따른 사회변동 등을 배경으로 전통 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와 해외로 미증유의 인구이동이 발생하고 무산계급 여성들에게 부단히 성매매 여성화의 압력이 가해지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결국 부르주아 사회가 사회제도로서 성매매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버나드 쇼는 성매매를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도록 요구하면서 "실제로 도덕성의 근저에는 경제문제가 있다. 성매매는 여성의 타락이나 남성의 방종이 아니라 여성들의 저임금, 과소평가, 과중 노동으로 야기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이 아주 가난한 여성들에게 이슬처럼 덧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성매매에 매달리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성매매 여성이 인신매매 등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으로서의 성매매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후지메 유키는 성매매금지운동에 대해 여성주의 진영이 "여성 전체가 억압당하면서도 특히 노동자계급 여성들이 성매매 여성화되는 강한 압력 속에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성매매 여성의 오명을 쓴 동성(同性)이며 함께 연대해서 싸워야 할 동등한 자매"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폐창운동의 헤게모니를 종교적 도덕주의자들이 잡고, 공창제(성매매) 폐지로 나아가는 것은 "해방을 지향한 것이 억압을 입법화"하는 것이며, "당연히 성매매 여성들과 연대해야 할 이들이 성매매 여성을 폭력에 강제된 희생자, 저능이기 때문에 타락한 자로 보고 구제, 교화, 배척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요구한다. 성매매 여성을 피해여성으로만 규정하는 것을 "계급을 뛰어넘어 자매로 이어줄 끈"을 끊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를 쓴 원미혜 선생의 "나는 성을 팔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서 제기되는 '왜 굳이 성을 파는가?'라는 질문과 성을 팔고 있는 세계에서의 '왜 팔면 안되는가?'의 반문 사이에서 만들어진 좁고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어느 세계에서도 시원스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며 반복되고 있다.


근대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미국가들의 사례들과 비교하며 성과 생식의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여러가지 점에서 논쟁적일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일본의 사례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논쟁적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는 2005년 1월 5일. 올해 들어 첫 수요집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한일 양국의 문제가 어째서 현재진행형의 논쟁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저자인 후지메 유키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1990년대에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전개한 저의를 요구하는 운동은, 일본의 연구자들에게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관점을 결여한 '일본 여성사'가 얼마나 일면적이며 오만한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있는가 하는 점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군 '노예'제가, 1930년대에 시작된 전쟁에서 돌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근대의 군국주의.식민지주의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 국가폭력 제도, 즉 공창제가 가장 흉폭한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로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계급적인 관점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몸과 근대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공창제, 낙태죄 체제, 산아조절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계급적 관점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두루 이용하고 있는데,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은 주로 계급적 관점을 동원해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 고백하건대 나자신은 비록 여성주의적 자세 일부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후지메 유키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 - 공창제, 낙태를 포함한 산아조절 문제 등 - 은 계급적 관점만으로는 해석하기 힘든, 대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란 지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지메 유키의 비판에 대해 대체로 동감하면서도 방법론적으로만 여성주의적 관점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그 지향점을 지나치게 계급적 관점에만 치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여성주의적 관점은 방법론적인 부분에서만 차용하고, 그 지향점에선 소외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부분은 논쟁으로 남을 만하다고 느꼈다.


이와 같은 부분은 제1차 페미니즘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구미 사회에서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교육의 확대, 취업기회의 확대, 민법 개정, 여성의 참정권 획득과 같은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추구하며 국제적으로 폭넓게 전개"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제1차 페미니즘에서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도전한 것은 소수파"였으며, "여성을 존경할 만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으로 이원화한 점, 근본적으로 이성애 중심이었음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이런 부분은 긍정할 수 있었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성과 생식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제안했는데, 페미니즘이 드디어 권력의 문제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 제2차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성과 생식의 문제를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정치학의 문제로 삼아 "개인적인 것은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간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던 남녀관계, 성애, 출산, 육아, 산아조절 등의 문제에 정치성을 부여한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였다. 제2차 페미니즘은 선진자본주의의 국가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중산층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비백인 여성과 제3세계 여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2차 페미니즘은 백인중산층의 시야와 동기에 규정되기 쉬운 점을 들어  "제국의 페미니즘"으로 비판한다.


흑인해방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싸운 여성들은 여성 억압이 민족(인종) 억압과 계급 지배와 일체를 이루며 여성 사이에는 계급과 인종(민족)에 근거한 차이와 권력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지배집단의 여성(비록,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라 할지라도)이 획득한 것은 피지배집단 여성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비판이다. 후지메 유키의 "성의 역사학"이 어려운 까닭은 이해가 쉽다, 어렵다는 차원의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최근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우리 사회의 여러 층위들이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여성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들, 논쟁들, 시위를 어느 한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언어가 사람을 규정한다는 명제가 일상사에서 이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드물다고 생각될만큼 성을 사고 파는 행위를 규정하는 단어들은 "윤락, 매춘, 매매춘, 성매매, 성 노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접근해 들어가면 과연 성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인가?란 질문으로부터, 성을 사고 파는 일은 올바른가? 이것을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들, 성매매에서의 자발성이란 인정할 수 있는가? 와 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심각한 선택과 판단을 내리도록 강요한다. 마치 실제 성매매가 일어나는 집창촌의 좁디 좁은 골목길과 미로처럼 얽힌 방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현재까지 성매매특별법과 성매매 혹은 성노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

는데, 아직까지도 그 미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이 책은 나에게 해답을 선사하는 책이 아니라 보다 많은 고민 속에 처박아 버린 꼴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느낀 한 가지는 저자 "후지메 유키"라면 현재 우리 사회의 성매매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 어떤 선입견도 갖지 말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 그들 스스로가 그들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소외시키고, 타자화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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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최종병기 그녀



다카하시 신을 아는 만화 매니아들이 많을 텐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은 약간 우스운 일이 될까? 가끔 남성성, 여성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남성성은 이렇다, 여성성은 이렇다고 거칠게 규정하거나 규정당할 때 약간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다. 가령,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내가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왕따 당하는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 점에서 페미니즘 역시 선택적 사고라는 것은 일견 불행하면서 다행한 일이다. 가령, 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지만 그 대의에 너무나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넘겨두고라도 남성성, 여성성이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글쎄, 최소한 만화책을 고르는 취향에서만큼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의 취향 분화가 확실히 되는 분야가 있을까? 물론 그 장벽이 남성과 여성의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변화해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만화계의 장벽은 브리티쉬 오픈에서 여성 골프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큼이나 높다. 어제와 그제 머리맡에 놓고 읽은 두 권의 만화책은 나에게 남성을 위한 순정만화도 존재하는구나 하는 편견 아닌 편견, 스테레오 타입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최종병기 그녀』의 작가 ‘다카하시 신’의 초기 단편집 『좋아하게 될 사람』과 『안녕, 파파』 두 권이었다. 『최종병기 그녀』의 첫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다카하시 신이란 작가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수정했다(실제로도 '남자'였다). 그런 착각을 했던 까닭은 다카하시 신의 독특한 그림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남성적 문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분명 만화에 존재하는 남성적 그림체보다 명확하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 있어서 남성적 그림체와 여성적 그림체는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 차이는 고우영 『삼국지』의 그림체와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캔디』의 그림체가 다른 것처럼 확연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일부 여성 작가들(『테르미도르』의 김혜린 같이)이 프랑스 혁명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그리거나,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이 그간 남성적 주제로 알려져 왔던 역사 속의 권력 투쟁, 혁명을 다룬다 하더라도 그림체에 있어서만큼 전형적인 그림체를 유지하는 편이다. 가령 얼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눈동자, 치렁치렁하는 머리카락,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등등 말이다. 물론 다카하시 신의 그림체는 기존의 여성 순정만화체 그림과는 또 다르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 남아있는 여백, 아마추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흑백 모노톤과 끝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선, 스크린 톤은 거의 생략하는 등 적게 표현하여 오히려 상큼하고 신선한 느낌이 인상적인, 어딘가에서 본 듯한 정겨움이 묻어난다. 마치 수업 시간에 담임선생의 눈길을 피해 공책에 몰래 그린 만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의 그림체가 남성적인 느낌은 아니다. 물론 등장하는 여성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나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성의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적인 선은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작가가 금방 남성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남성적 시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신의 대표작 『최종병기 그녀』를 보자. 제목부터 참 과감하다. "최종병기 + 그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자 아이들은 엄마에게서 받은 혹은 엄마 몰래 숨겨둔 용돈을 챙겨 가장 먼저 군것질을 하고 조금 지나서는 건프라를 사거나 마크로스, 밀리터리 플라모델들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그 아이는 중학생이 되고, 형, 누나, 혹은 친구네 집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과월호를 읽거나 거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설정자료집을 사거나,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때의 최종병기란 무릇 거대로봇군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뉴타입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말이나 지껄여대는 소녀다.

"왜 나는 당신에게 상처만 입히는 걸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여자라서 미안해"

주인공 소녀는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유방을 달고 다니며 유사시엔 앞가슴을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아프로다인이나 비너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화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여성주의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게 그려지는 만화체에 비해 여성의 신체를 절단하고, 개조하여 병기화해가는 과정 자체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소유하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금방이라도 교실 뒤에 웅크리고 있다가 다가와서 쪽지 한 장을 놓고 수줍게 교실 뒤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소녀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쟤랑 나랑 같은 반이었어? 하고 되묻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다. 요새 경제 이야기하면서 다들 성장 동력, 성장 동력하는데, 우리 삶에 있어서의 성장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도 한 때는 뭐뭐 했다"는 식의 대사나 후일담을 늘어놓는 나이가 되어간다. 어떤 사람은 군대 시절 이야기를, 어떤 이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선배 뻘 되는 386 세대들(엄밀히 말하면 나도 그 끄트머리쯤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생, 89학번, 30대)이 이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다니는 지금, 나의 유년 시절은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나는 요새도 밤마다 누군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대개 이런 꿈의 할머니 식 해몽은 '키 크느라 그런다'는 것이다. 자, 그대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라. 정말 즐거웠는가? 아니면 고통스러웠는가? 누구나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내 과거는 이랬었지, 이렇게 화려했거나 이렇게 고통스러웠거나 상관없이 과장하게 된다. 말할 때는 금방 과거의 자신을 잊어버리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구보다 자신의 과거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아름다운 유년만이 존재했을까? 『최종병기 그녀』의 두 남녀 주인공(슈이치와 치세)이 만난 세계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려 있고, 결국 치세는 최종병기로 개조된다. 과연 그녀는 나는 아직도 치세 그대로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다카하시 신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SF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는 듯 보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 할 만큼 설명하지 않는다. 치세가 어떻게 최종병기가 되었는지 실제로 그녀가 최종병기의 위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부분은 죄다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병기 그녀』에서 <에반게리온>이나 기타 SF물들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종종 이런 부류의 SF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가 만들어 논 가상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이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그 설정들을 달달 외우는 것을 취미로 한다. 하지만 『최종병기 그녀』는 그런 류의 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남성들을 위한 순정만화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만화의 여주인공 치세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다카하시 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개의 여성 캐릭터들은 종종 남성들보다 강인하지만(특히, 성적 접촉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에게는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자극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외의 경우엔 무척이나 순종적이고, 다소곳하다. 물론 이 부분에 남성 성 판타지를 자극한다고 한 마디 해놓으면 아주 편하지만, 그건 또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분명 성(sex)의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와 "어른"을 가르는 구분 근거는 섹스다. 어른이란 말의 어원이 되는 '어르다'란 말 자체에 이미 '섹스하다, 남녀가 교합하다'는 뜻이 있다. 결혼, 즉 공인된 섹스는 성인식의 최종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성장 동력 혹은 넘어서야 할 고개들 중 하나는 분명 '섹스'다. 『최종병기 그녀』는 일종의 성장소설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에서 성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요소들은 군데군데 적절히 깔려 있다. 아무리 십대 청소년들이 까질 대로 까졌다 한들 벌건 대낮에 러브호텔을 당당하게 들락거리는 어른들의 성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입으로는 숱한 성경험을 자랑하는 녀석들의 태반이 실제로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본 경험들 역시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친구들과 '오줌멀리 누기' 경쟁에서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괜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우스운 결과다. 



난 정말 어렸을 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고,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을 땐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으며 그 뒤론 줄곧 어서 시간이 흘러 자연사하게 되길 바라고 있는 중이다. 어른들의 세계, 그곳에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부정해보였고, 부조리했다. 학교도 전쟁터였지만 사회는 그보다 더욱 악랄하고 끈질긴 전쟁터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전장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람들이 낙오하고 죽어갔다. 이런 남자 아이에게 최종병기는 누구였을까? 그네들이 매달릴 수 있었던 최종적인 지지대는 누구였을까? 친구들과의 우정 아니면 사랑이다. 우리들에게 사랑은 언제나 지독하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혼란일 수밖에 없다. 치세와 슈이치가 왜 어른이 되어감에 따라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가? 왜 치세의 전투경험이 축적되어갈 수록 그녀의 자아는 붕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가? 왜 그녀가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느낄까? 불행하게도 그것이 성장이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비평가들이 지난 1980년대의 호러 무비 혹은 슬로터 무비들을 평할 때 십대의 성적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스크림>에 등장하는 호러 무비의 원칙처럼
"첫경험을 한 여자는 반드시 죽는다." 혹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사랑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한 갈망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결과이지만, 마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참호(우리의 성격갑옷) 밖으로 방심하여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저격당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자신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가도 바보취급 밖에 받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 전쟁이란 것을 무시해버린다 하더라도 실제 고교생의 생활이 절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중 누가 있는가? 그들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는가? 몸은 이미 성장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공공연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회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사랑하면 상처를 주게 된다. 그들에겐 이 세계 자체가 혼란이고, 혼돈이다. 관계를 맺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자아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불완전한 자아로서 결핍된 상태에서 만나 사랑한다.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으나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의 사랑이 혼돈스럽고, 때로 자기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나는 이 만화책을 도서대여점에서 읽었는데, 실제로 고등학생이 빌려가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개는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갔을 법한 나이의 사람들이 도리어 열광하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 그들에겐 이들의 관계를 제법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길 위의 인생(life on the road)'인 것을, 어차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터널도, 길의 일부이일 수밖에 없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류는 오로지 방황을 통해서만 치유된다." 좋은 성장 소설의 공통점은 어린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섣부르게 회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끝내 백조가 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들도 있기 때문에…. 슬프게도 어른이 된다는 건, 백조가 아니란 사실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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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원래 이 리뷰는 다카하시 신의 단편집 『안녕, 파파』와 『좋아하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것인데... 방향을 잘못 잡아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냥 『최종병기 그녀』를 중심으로 쓴 다카하시 신의 작품론처럼 되어 버렸다. 어쩜 좋냐? 흐흐, 여러모로 우습게 되었다. ^^ 그럭저럭 수준작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최종병기그녀>는 나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 만화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도 전권 다 가지게 되었고, OVA 애니메이션 DVD도 소장하고 있는데다가 작가인 다카하시 신의 초기단편집들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인연일지 모르겠다. 치세!(흐흐, 게다가 지금 트위터의 아이콘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종병기 그녀>의 상대역이자 나레이터인 '슈'다. 치세의 사랑을 한껏 받은 덕분에 결국 지구멸망의 날까지 살아남은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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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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