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3.31 권현형 -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1)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 권현형

  

나환자 마을이었다가 전쟁으로 불타버려 다시
들어섰다는 마을, 당신이 사는 그곳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문득 당신이 붉은 꽃잎으로 보였지요
나병을 앓고 있는 젊은 사내로 슬픈 전설의 후예로

나무 잎새들 당신의 머리카락 햇결처럼
물이랑 일던 초여름이었지요
꽃잎, 작디 작은 채송화들이 마당 가득 재잘거리고 있던
그 집, 그 방, 당신 방에는 작은 악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무도 한 번도 켜본 적 없다는

흰 벽 위에 벙어리 만돌린이 내걸려 있던 방
당신이 좋아한다는 여자의 편지를 읽어주던
내가 없던
다른 여자가 있던, 햇살이 엉켜 어지럽던

그 골방처럼 모든 내력은 슬프지요
켤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푸른 만돌린에 대한 기억처럼

*

일본의 게이샤들이 누군가의 소실이나 반려로 간택되어 본래 머물던 기방을 떠날 때 의례로 돌리는 선물이 손수 지은 '밥'이라고 한다. '콩'을 넣어 지은 밥은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따라가지만 언젠가 이 남자를 버리고 돌아올 것이란 뜻을 지어 밥을 짓고, 아무 것도 넣지 않은 '백미'로 지은 밥은 이곳에서의 생활이나 기억은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이 한 남자를 위해 살겠노라는 다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매일매일 밥을 먹지만 밥 한 그릇에 그런 의미를 넣어 밥을 지어 본 적이 없으며 밥의 의미를 되새기며 밥을 먹어본 기억도 아련하다. 이 밥 한 그릇이 내가 세상에서 먹는 마지막 밥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어 본 적도 있고, 밥상을 받고 그 앞에서 눈물을 철철 흘려본 기억도 있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가물가물하다.

'내력'은 숨겨진 역사다. 누군가의 이력을 살펴보며 그 사람의 속내를,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함께 되밟아보는 일을 종종 한다. 이 사람은 이 시절을 어떻게 살았을까? 겉으로 드러난 이력으로는 미처 알 수 없는 것이 '내력'이다. 누군가의 내력을 듣는 일이 두려워진다. 문득 당신이 붉은 꽃잎으로 보일까 두려운 것이다. '내가 없던' 시절의 당신, '내가 없는' 시절의 당신에게 벙어리 만돌린으로 걸려 있을지 모를 세상의 모든 내력은 슬프다. 미련도, 후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겐 나도 미련도, 후회도 없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0) 2011.04.08
고정희 - 고백  (3) 2011.04.07
최승자 - 삼십세  (1) 2011.04.05
이승희 - 사랑은  (2) 2011.04.04
허영자 - 씨앗  (0) 2011.04.01
권현형 -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1) 2011.03.31
정윤천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2) 2011.03.30
마종기 - 우화의 강  (2) 2011.03.29
황규관 - 우체국을 가며  (0) 2011.03.28
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1  (2) 2011.03.25
이정록 - 도깨비 기둥  (1) 2011.03.24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