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 - 존 스토리 | 박만준 옮김 | 경문사(2002)




우리에게 현실문화연구에서 출간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존 스토리의 책 "문화연구의 이론과 방법들"은 문화연구가 실제로 어느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문화연구는 여러 분야의 학문들에 기대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에서 논의되는 인물들은 그 자체로 서구의 근현대 사상사를 옮겨온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가들, 알튀세르, 그람시, 벤야민 등등이 이야기된다. 그 못지 않게 문화연구가 건드리고 있는 분야도 폭넓은데(도대체 어느 것이 문화연구고, 어느 것이 문화연구가 아닌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존 스토리의 이 책은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그래도 문화연구가 주로 건드리고 있는 분야이고, 그 분야를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지금껏 우리가 "문화"라면 고정관념처럼 떠올리게 되는 고급예술(high art)을 말하진 않는다(물론 이 분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텍스트와 문화적 실천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는 문화이다. 대개의 문화연구 관련 서적들이 문화에 대한 그들의 이런 입장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까닭은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고 싶다는 의도와 달리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에게 문화는 뭔가 우리의 일상과 다른 고급한 것을 향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만큼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늘 의식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존 스토리는 이 책을 통해 문화연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문화는 일상적인 것, 문화엘리트들이나 지배계급층이 향유하는 것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향유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이때의 실천이란 컨텍스트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행위를 그 대상으로 한다. 이 때 문화연구의 방법은 레이몬드 윌리엄스, 스튜어트 홀, 알튀세르의 입장 중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적/역사적 상황에 입각해서 문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문화연구에서의 문화는 거의 반드시 역사와 결부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른 하나는 문화란 그람시가 말하고 있는 "헤게모니"의 개념처럼 끊임없이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수용자) 사이에서, 다른 말로 하자면 지배계급이 퍼뜨리고자 하는 지배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수용하고 거부하는 피지배계급이 벌이는 치열한 투쟁의 전장이란 것이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존 스토리는 문화연구가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들 - 텔레비전, 소설, 영화, 신문과 잡지, 대중음악, 일상생활의 소비 - 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으며, 지배계급이 제공하는 문화 이데올로기들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해낼 것인가. 문화연구자들이 어째서 문화실천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를 설명한다. 문화연구란 정치경제학적인 토대 위에서 새롭게 쓰여지는 문화정치학적 실천행위이다. 문화연구자들은 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의미(저항)를 만들기 위해 전개하는 독자들의 투쟁과 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문화의 전장에서 독자들과 함께 이 세계에서 자신을 위해 더 나은 터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대중문화와 문화실천 - 김창남 | 한울 | 1995


셰익스피어가 그랬다던가? 청춘은 뉘 반항할 이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라고….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순간이란 것이 과연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 기억들이 평생의 짐이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엔 알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10년이 흐르고, 다시 20년째를 향해 가고 있는 도중에 돌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공부를 시작했다. 87년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열패감들은 낭패한 마음을 넘어 절망에 이르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했던 진보란 인간의 승리였으나 인간에겐 선도 악도 늘 함께 있었으므로 진보가 늘 선의 승리를 의미하진 않았다.

 

서구에서의 진보는 오랫동안 일직선상에서 사유되었다. 진보는 전진 혹은 후퇴, 정체라는 세 가지 개념 속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보주의적 낙관론은 인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를 통해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이상론이었고, 이들의 학문적 틀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인 80년대 한국의 진보진영은 이들과 똑같은 함정에 빠져들었다. 자유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 이름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가? 시장경제론자, 보수주의자 등 - 혹은 타협, 야합의)은 동서냉전의 승부에서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했으며 이 결과로 동구에서도 자본주의는 놀라운 효율성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을 진보라 믿었기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전에 균열은 동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크 아탈리는 "역사의 미로를 걷는 인간"이란 글을 통해 "21세기를 앞둔 시기,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어떤 사람들에겐 인간이 전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그 두 이념의 패배가 진보의 확고한 전진을 보여주는 표시"였다고 말한다. 후쿠야마에게 이는 시장경제의 확고한 승리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역사의 중지를 의미했다.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은 낙관과 비관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처럼 보인다. 낙관과 비관의 틈새는 역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들인다. 과연 역사는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되어있는 걸까. “행복한 결말”이, “비극적 파탄”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이렇듯 진보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 녹아 있는 고민의 흔적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나의 이런 고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보의 새로운 기획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제 문화는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영역으로(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 <중략> … 진보진영의 문화적 관심의 증폭이란 좀더 정확해진 문화에 대한 관심의 중심이 민중문화운동에서 명백히 대중문화로 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중략> …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 속에서 ‘진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다기다양한 논쟁이 지금 진보진영의 초미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주목되는 것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이 강조되던 시절에는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일상성’과 ‘생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다. <본문 15-16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장(場) - 일상, 실패와 성공의 공간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혁명 시도가 실패하는 원인이며 결과’로 봤다. 일상이란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된다. 그렇기에 일상은 우울한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의 말처럼 모든 혁명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실패하는 원인도 일상에서 비롯된다.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 변화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일상에 매몰되는 변화 역시 아무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다. 일상의 무기력증은 일상을 변화시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반복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일상성의 의미 속에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개인과 그와 같은 소비적 일상을 거부하는 개인, 이 개인이 주체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을 르페브르는 "일상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이에 대해 김창남은 지난 80년대 진보진영의 인식은 “대중문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라기보다는 문화운동적 실천에 의해 상대적으로 얼개를 갖추어온 것”이라고 분석한다. 80년대 독재와 반독재가 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시대에 대중문화, 대중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아무리 진보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회복이 절실했고, 긴박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말대로 “그동안의 진보의 논리가 대립과 적대의 틀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0년대식 문화비평에서 대중문화의 의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중문화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이들에게 대중은 비록 군중(mob)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대중(mass)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과 문화를 일정하게 분리하여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산업, 즉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의 상업적 가치를 재생산하도록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교묘한 술책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8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세 가지 측면 가운데 주로 생산체계에 집중되었고, 이후 90년대의 문화비평은 문화의 텍스트를 해독하는데 주력했다.

 

김창남은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에서 “대중은 주어진 문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선택하고 선별하여 특유의 방식으로 해독하고 변형한다고 주장한다. 즉, 대중의 문화실천은 주어진 문화, 텍스트에 반영된 구조의 논리에 대한 그들 나름의 대응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 「이론적 논의」에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당시(90년대 초중반) 우리 사회의 소비문화 ․ 문화산업의 현실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부분들은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전의 명징함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화산업의 현황 부분에서 85년의 외화자율화와 87년의 직배사 허용 문제를 놓고 지적하고 있는 절망적 어조는 한국 영화 1,000만 명 시대에 도달한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도 있다. 제4장 「문화시장의 개방과 민족문화의 새로운 모색」에서 주장하고 있는 부분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측과 정반대로 진행되는 양상 또한 존재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미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보장하는 풍부한 자국시장과 잘 발달된 다매체 ․ 다채널을 이용한 창구효과, 가장 넓은 언어권, 풍부한 자본과 기술, 인력 등의 요인을 배경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들조차도 탈규제와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맞아 미국 프로그램의 시장 확대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산업의 기반이 취약한 우리나라가 성급히 다매체 ․ 다채널 시대를 맞게 됨으로써 미국 문화산업에 의한 시장장악은 한층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역시 머지않아 이루어질 전망이다. 만화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사실상의 개방이 이루어진 지 오래이긴 하지만 일본영화나 가요의 수입이 합법화될 경우,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일정 기간 안에 우리시장내 일본문화와 가요의 영역이 확보될 것이며 이는 그만큼 우리 문화산업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 때문이다. <본문 38-39쪽> 중에서

 

위의 전망이 예견한 바대로 현재에도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일본의 문화산업이 미치고 있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지만 우리 문화산업의 전반이 미 ․ 일의 문화산업 때문에 현재 위축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창남의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부분은 위와 같은 현황 분석과 전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핵심”을 논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첨예한 이분법에 근거한 기존 방식의 문화운동은 이제 현실적인 힘을 갖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와 민중문화를 그 출신성분에 따라 선험적으로 가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실천태 속에서 지배적인 층위와 저항적인 층위를 변별하는 일이다. 여기서 문화운동은 대중의 일상적인 문화실천에 존재하는 지배적인 층위를 약화시키고 대항적 층위를 강화시키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중을 단일한 계급적 실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하게 분화된 하위집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하게 분화된 대중집단의 삶의 조건과 현실, 욕구와 감각에 대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각 집단에 맞는 다양한 접근 방식이 찾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우리의 대중문화 읽기가 단지 텍스트 분석의 차원에서 나아가 ‘대중읽기’의 차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 75쪽> 중에서

 

“대중과 대중문화”는 그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화한다. 이러한 전망은 80년대 문화비평이 지니고 있던 한계 -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던 -를 극복하고, 문화적 진보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게 해준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대중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90년대 한국사회 하위문화의 다층적 구조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의 2부는 그간 외국의 사례만을 인용해왔던 하위문화 방법론을  국내에 적용해 본 사실상 최초의 연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난 1991년 동구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우연찮게 맞물리는 시기에 우리 사회는 신세대문화 담론으로 들끓었지만, 실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진 바가 없었다. 모두가 즉자적(卽自的)이고 감각적인 반응으로 신세대 문화담론을 유행처럼 소모했을 뿐이다. 김창남은 2부에서 우리 사회의 각 하위 집단이 동일한 물질과 역사적 조건 속에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들을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우선 부모계급문화와 일정하게 대립되면서 상호의존적 형태로 나타나는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과 특성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 청소년 집단이 보이고 있는 문화적 실천의 특징은 모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집단이 부모계급문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적극성에서 두드러진다. 이들은 학교라는 기성문화의 재교육이 주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을 저항적 의미로 수용한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더욱 적극적이고 예민한 자세를 보인다. 김창남은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여학생들이 겪는 억압이 남학생들에 비해 더 심하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창남이 청소년 집단의 문화적 실천에 대해 가하고 있는 분석에서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기존의 신세대론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최근 유행하는 이른바 신세대론이 가지는 큰 맹점 중의 하나가 청소년 세대가 부모세대와 비교하여 가지는 차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그들의 저항이 결국 ‘상징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청소년들은 아직 부모세대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러한 현실적 조건을 거부하기 보다는 그에 타협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런 타협의 형태가 상징적인 수준에서의 저항이라는 하위문화적 특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본문 126-127쪽> 중에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집단은 역시 사회 계급이다. 그리고 주요한 문화적 흐름은 계급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김창남은 이를 다시 세분하여 “사무직 노동자 집단, 생산직 노동자 집단, 중산층 주부 집단”으로 구분한다. 사무직 노동자 집단이 대중음악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 청소년 집단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들이 대중음악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현실을 돌아보는데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생산직 노동자 집단이 보이는 태도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대중음악 취향과 실천은 작업장의 환경, 경제적 여유의 부족 등으로 인해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하위문화적 특성 - 혼자 노래부르기, 집단적 공간에서의 소리지르기, 일하며 듣기 등 - 을 드러내고 있다. 중산층 주부 집단은 사무직 ․ 생산직 노동자 집단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인 대중음악 수용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부들은 일상에서의 종속적인 위치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하지만 궁극적인 탈출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종속적인 위치를 당연시하고 있다, 그들의 도피는 스스로 인식하고 있듯이 일시적이며, 종속적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주부들은 남성가수의 여성화 경향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면서 여성 가수에 대해서는 규범적인 여성성을 주문하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표하면서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여성가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략>… 기본적으로 기성의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세대이면서 신세대 자녀를 키우는 중년세대로서 경험하는 문화적 갈등이 상대적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중산층’의 ‘여성’으로서 가지는 종속적 위치와 접합하여 다소 착종된 정체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 220-221쪽> 중에서

 

문화실천의 공간에서 기획의 주체로 선다는 것

우리는 일상을 늘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노는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다람쥐 쳇바퀴란 표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그물보다도 더 촘촘하게 짜인 인간관계와 사회의 그물망에 포섭되어 있다.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의미한 경험의 연속으로 비춰지고, 삶은 조각난 파편처럼 아무 의미를 얻지 못한 무엇으로 개인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바흐친으로부터 비롯된 민중 혹은 대중의 일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앙리 르페브르, 미셀 드 세르토 등과 같은 문화연구자들은 일상이 단지 파편화된 개인이 권력 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이에 대항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우리들 스스로가 주체적인 존재로 실천해간다면, 문화의 일상은 더 이상 무기력한 삶의 반복이 아니다. 일상, 그것은 변혁에 대해 품고 있는 희망처럼, 혹은 삶의 진실한 측면이 그러하듯, 불꽃처럼 일순간 환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리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이 혁명의 미래라면, 일상은 바로 미래의 어제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습득하고 창조하고 소통하는 존재(a learning, creating, communicating being)라면, 인간의 이러한 본성에 걸 맞는 유일한 사회적 체제는 참여민주주의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 습득하고 소통하고 스스로를 지배한다. 이보다 열등하고 제한적인 체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원천을 소진시켜 버린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말은 김창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 또한 인간에 대한 낙관, 대중을 해방적 기획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혹은 근대에 대한 해방적 기획(정치적 ․ 문화적 실천)은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해방적 기획의 회복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구분 짓기가 아닌, 고상하고 위대한 선각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 사상, 행동, 욕망 등이 종합적으로 조립된 문화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문화는 그들만의 경험을 통해 기존 체제에 대해 대항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문화와 문화실천』은 대중의 자발적인 문화실천에 대한 진지한 첫걸음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 존 스토리 | 박이소 (옮긴이)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1999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문화이론을 개괄하는 입문서이다. 이 방면의 개론서로 이 책을 포함해 김정은의 "대중문화읽기와 비평적 글쓰기",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를 포함해 모두 4종을 읽었고 다른 책들에 대해선 차례차례 서평한 바 있으니 문화이론 입문서 가운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은 대체로 읽은 셈이다. 그러니 혹자는 그렇게 묻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어느 걸 읽는 것이 가장 좋으냔 의문을 품을 법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엇을 읽든 별상관없을 듯 싶다. 대체로 4종의 책이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의 "대중문화 읽기와 비평적 글쓰기"는 난이도면에선 가장 쉽지만 쉬운 만큼 간추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른 책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물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루카치, 벤야민, 하우저 등의 다른 저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도리어 그것이 굉장한 장점일 수 있다). 원용진의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은 앞서 김정은의 책에 비해 심도 있는 접근을 꾀하고, 국내 상황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문보다 문장이 난삽하고, 어떤 예시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단점을 지닌다. 그에 비해 김창남의 "대중문화의 이해"는 문장이나 기타 한국적 상황들을 다룬 점에서는 원용진의 책보다 뛰어나지만, 해외이론 소개 편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단점을 가진다. 이에 비해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은 비록 부분적으로 문장이 어색한 부분은 있지만, 원용진의 것보다 어떤 면에선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문장도 상대적으로 덜 난삽하다. 게다가 한국적 상황이나 예시를 고려할 까닭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서구의 문화이론을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목적으로 읽기엔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4종의 책을 모두 읽을 까닭은 없지만, 어느 한 종만 읽기 보다는 2종 정도를 서로 대비해가며 읽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다.

 

이 책의 원제가  "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인데 영어명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긍정적 내지는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문화와 문화연구에 대한 예비(입문)단계의 가이드'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에 대한 입문서'란 뜻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이 책의 목차는 그대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을 공부하는데 가장 적절한 커리큘럼이며, 다른 입문서들도 그 순서나 내용 배치면에서 존 스토리의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의 배치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장 대중문화란 무엇인가"에서는 대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대중문화는 "대중+문화"가 합쳐진 말이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선 먼저 문화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 윌리엄즌는 문화를 넓은 의미에서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1. 문화는 지적, 정신적, 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인 과정, 2.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 방식, 3.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 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존 스토리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지목하고,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정의와 쓰임새를 소개한다. 우리는 대중문화라는 단일한 용어로 표기하지만 영어 표기에서 대중문화는 mass와 popular로 구분된다(이에 대해선 전에 다른 서평에서 소개한 바가 있다).

 

이어 "2장 문화와 문명의 전통"에서는 우리에게도 뿌리깊이 고정되어 있는 문화 관념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동을 이야기한다. 19세기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 산업화와 도시화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출현은 그동안 고급문화의 생산자이자 주된 소비자였던 사회의 상층계급을 크게 긴장시킨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 출현한 여러 미디어들(당시엔 주로 신문, 잡지였으나 점차 대중교육의 확대, 라디오, TV의 출현 등)로 인해 소위 대중들이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이에 대해 매튜 아놀드 등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중문화가 문화 전반에 걸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보았고, 이를 분리하거나 대중들을 계몽하여 고급 문화의 향유자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런 논쟁은 매튜 아놀드 이후 리비스주의로 넘어가면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전세계로 널리 전파된다. 이를 통해 문화를 고급문화와 대중(저급)문화로 구분하는 이분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과연 문화의 고급과 저급을 구분하는데 대중이란 잣대가 적당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존 스토리는 영국 출신의 학자인 까닭일까? 우선적으로 문화연구의 여러 경향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영국의 버밍엄대학 현대문화연구센터의 학자들이 일군 "문화주의"를 3장으로 끌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먼저 끄집어낸 다른 책들과는 약간 다른 점인데, 헤게모니 이론을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킨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의 이런 구분은 나름대로 적당해 보인다. 문화주의는 영국 피지배계급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하면서 전개된다.1950년대 말엽부터 주로 영국의 이론가들(Richard Hoggart, Edward. P. Thompson, Raymond Williams, Stuart Hall)에서 부각되기 시작한(영국의 문화 연구는 전후 영국의 특수한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자본주의적 산업 생산 양식의 부활, 복지 정책의 수립, 그리고 동구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구 세력의 결집 등으로 인해 변모하는 영국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전쟁 전의 영국과는 단절된 듯한 변화들, 현대화 및 미국화된 대중문화, 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나 이데올로기가 중류계급과 차별성이 없어지면서) 연구 전통이다. 문화주의의 핵심적인 전통은 문화의 수동적 소비보다 능동적 생산, 즉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 대립되는 특징을 가진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노동계급이 즐기는 대중문화가 노동계급 형성 및 유지에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논의하려 했다. 문화주의에 속하는 이들은 대중문화의 주체인 대중을 새롭게 해석하여, 대중이 수동적이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했다. 문화주의자들이 말하는 피지배계급은 단순히 계급적인 축(항상 노동계급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문화라는 영역은 물질적 토대에서 상대적인 독립성을 누릴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물질적 토대에 개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문화주의는 구조보다는 인간에, 이데올로기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지배계급의 전략보다는 피지배계급의 전술에 관심을 갖는다. 문화주의는 대중이 문화적 실천을 통해 자신들의 계급적 영역을 구축해가는 능동적인 모습을 찾으려 시도한다.

 

4장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다루고 있다. 구조주의는 이론이면서 동시에 방법론이기도 한 학문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규칙과 개념을 기초로 다양한 문화분석에 적용되어 많은 성과를 낳았으며, 현재까지도 문화분석 툴로써 여러 비판들이 있으나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구조주의의 이론적 경향을 보여주는 특성은 한 마디로 ‘구조(structure)’라는 말 자체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란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그 표피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행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인 원리나 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구조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어떤 문화적 텍스트나 행위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나 행위의 내부적 혹은 외부적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즉 구조)에 의해 그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현상이 바로 언어다. 서로 다른 언어의 선택, 서로 다른 방식의 언어 배열은 서로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런 맥락에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가 현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구조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 분석 1) 문화적 표상이 특정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고 2) 문화적 표상이 의미를 내는 방식 - 의미 체계 -를 분석하고, 3)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즉 주체 형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와 롤랑 바르트를 소개하면서 구조주의 이론이 어떻게 미국 서부극 장르에 숨겨진 신화를 드러내는가 실례(윌 라이트)를 통해 보여준다.

 

5장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마르크스 자신은 문화론이라고 명확하게 내세운 하나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이론도 없다. 마르크스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진술을 남기고 있는데, “토대-상부구조의 문제(base and superstructure)”의 문제 - 사회를 이루는 두 요소, 즉 경제적 기초(토대)와 사회적 의식의 모든 형태들인 상부구조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로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에 있어 문화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determination)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있다.

 

경제결정론(기계론적 결정론, 속류 마르크스주의) - 상부구조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는 아무런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며 단지 토대가 되는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반영이론(reflection theory), 모든 문화는 그것을 생산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다. 대중문화의 의미는 단지 그것을 생산한 경제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예술성보다 구호성을 강조했던 프롤렛쿨트(proletkult)같은 교조적인 예술론도 이런 기계적 결정론의 맥락에 있다.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기능; 권력을 지닌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포장하는 이념이다. 지배계급에 의해서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대중들이 계급적 갈등과 불평을 느끼지 못하는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이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대중문화를 즐기게 된다. 계급문화론,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과 지배방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문화적 텍스트(종교, 법, 도덕, 관습, 책 등)는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반영물이다.

 

여기에 루카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알튀세르의 주요 개념들, 그리고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한 데 아우르고, 아우를 수 있는(개인적인 생각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두루 설명하고 있다. 사실 6장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은 구조주의 직후 내지는 7장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나왔어야 적당할 수 있을 듯 싶다.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몰라도 페미니즘 문화학은 확실히 이들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 페미니즘은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구조를 분석해낸다. 8장은 문화연구의 전체적인 부분을 다룬다. 여러 이론들엔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완벽한 분석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문화를 옹호하려는 측과 대중문화를 비난하려는 측 사이에 벌어지는 오랜 논쟁의 결과인 듯 싶다. 문화이론를 어떻게 바라보든 문제는 한 가지다. 대중문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의 장이며, 이 싸움은 계급 혹은 문화적 이질성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거란 사실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2006)


"에리히 프롬(Erich Fromm)""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성행위를 위한 69가지 체위를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간혹, 책 제목만으로 그런 오해 내지는 사랑에 대한 방법론적인 기술(skill)로 착각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한때 에리히 프롬은 국내에서 나름대로 주목받는 위치를 차지한 사회사상가였으나 최근의 조류는 그를 한물간 혹은 예전의 중요도에 비해 명성이 많이 하락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여전히 중요한 데도 불구하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 에리히 프롬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이론에 프로이트를 접목시키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2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사회과학연구소와 관련을 맺고 일했던 일련의 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 연구 활동의 배경이 된 1920-1940년대 유럽사회는 파시즘의 급격한 대두와 서구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당시 동구와 서구 양쪽에서 모두 비이성적인 전체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나 노동운동 모두 이런 비이성적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식인들은 노동자 계급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꼈고, 원자화된 대중사회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시장기능 침투에 의한 물화 혹은 사물화(reification) 현상이었다. 사물화란 인간들 사이의 질적인 관계가 상품사이의 양적인 관계로 바뀌는 현상을 지칭한다. 인간의 노동과 피와 땀의 가치가 일정한 화폐의 양으로 측정되는 교환가치로 표현된다. 사물화는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는 것을 같은 것(교환가치로 환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비등가적인 것을 등가화 한다. 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물화 현상은 단순히 상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ex. 비인격화(非人格化, impersonalization -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자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당한다고 할 때의 인간의 사물화, 막스 베버가 관료제에 있어서 특징적으로 인정한 대상적 관계, 또는 그와 같은 관계를 강요당하는 관료 등의 비인격화를 이르는 말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될만한 책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자면 사랑이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과의 융합'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일'이며,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자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받기만 하는 것도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 자신과 타인, 가족,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그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대가에 대한 기대 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것이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프롬은『사랑의 기술』에서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라고 말하는 것, 사랑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을 사랑하는 자, 그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만이 뭔가 주는 행위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이 말 뜻 그대로라고 했을 때 마음이 너무나 가난한 자는 뭔가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으며 물적인 조건이 생존에도 허덕일 만큼 척박한 이도 남을 사랑할 수 없다.

 

프롬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닌 '낭만적 사랑' 이란 사회의 특징과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한 '불완전한' 관념임을 폭로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결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환가치'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고, 이에 지친 사람들은 이런 억압에 대한 하나의 탈출구로서 별다른 기술과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 편안한-그래서 이기적인- 사랑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사랑은 결국 '불모의 사랑'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지속불가능하며, 사랑의 대상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기애에도 기여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낭만적 사랑은 ‘로맨스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romance)’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로맨스의 이데올로기란 사랑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사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이 책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계몽의 변증법 -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2001)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을 계몽되지 못한 신화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이성(理性)의 힘이 왜 오늘날 도리어 야만상태로 인류를 몰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M.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어렵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한 난해함과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읽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첫째는 T. W. 아도르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문장 하나를 읽은 뒤 요구되는 사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첨단 유행을 따지는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트렌드)와 싸우고, 두 번째는 한 차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띄엄띄엄 되새김질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인정받는 대개의 책들이 그러하듯 『계몽의 변증법』 역시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읽기에 따라 사전지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내 나름대로의 독서체험에 따르면 신화학에 대한 공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이 쓰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종종 잊기 쉬운 『계몽의 변증법』 읽기의 한 방법이다. 오늘날 아도르노의 생각 혹은 아도르노에 대한 생각이란 점에서 후학들의 평가는 상이한 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2년간 이 책을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읽어야 하는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신화학적인 입장에서, 다른 한 번은 문화연구(cultural study)적 입장에서, 다시 한 번은 문화경제(cultural economy)적 입장에서(이 책의 2장에 수록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견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아도르노에 대한 평가의 변화 역시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이는 이제 시대의 조류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 반대로 그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확실한 건 이렇든 저렇든 그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가이며 특히 문화를 학문적 틀 속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결절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947년에 쓰인 이 저작이 현재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 한 권의 책을 두고도 후대의 학자들 -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문학과지성사, 2002년), 권용선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년), 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학이론까지 아도르노 새롭게 읽기』(풀빛, 2005년) 등 - 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서들을 펴내고 있으리라. 흔히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치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펴낸 책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이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미국 망명 생활 중 경험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과 문화산업에 의한 대중문화에 기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나치즘 못지않게 위험한 대중선동, 세뇌 장치로 인식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1940년대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한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 비이성적인 전체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한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나 좌파적 노동운동은 비이성적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노동자계급(대중)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였고, 원자화된 대중사회는 결국 전체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라는 용어는 마치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문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위험 때문에,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문화 연구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주로 이루어졌는데 오락산업의 융성, 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전,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문화조작, 미국에서의 영화산업과 음반 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이 당시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포만, 교만, 멸망을 의미하는 말로 코로스(kopos), 휘브리스(hybris), 아데(ate)란 말이 있다. 이 세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코로스는 ‘죄가 많다', 휘브리스는 ’난폭하다', 아데는 ‘파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저지르게 되는 죄가 휘브리스, 즉 ‘오만'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휘브리스를 범하는 자는 항상 가혹한 벌을 받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개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主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휘브리스(hybris)인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였지만 결국은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른 결과가 되어 버렸다.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른다고 지나치게 자신하고 있을 때, 신들이 애써 경고한 메시지를 거부할 때, 신들에 의한 운명은 역습을 가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만물의 근원은 신(神)에 의한 것이며, 신들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 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노아의 홍수라는 자연 혹은 신의 징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은 바벨탑을 세우려 했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의 신 타르타로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혜택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숲을 개간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랑(자원과 기술)을 망각하고 욕보였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신성이 깃든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혜를 얻고, 무리를 지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것은 자연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를 일구고, 자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몽의 합리성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부정하는 탈신화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신화는 모든 가르침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하늘 아래 더 이상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었던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이미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화한다.(신화의 세계, 자연, 사물을 생명을 지닌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계몽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여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대한다.) 나는 아도르노의 이런 문제의식이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entropy)』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지리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400여 년 전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구축된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세계관(패러다임)을 통해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끊임없는 성장과  한계 없는 진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리프킨은 문명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의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가한 이성에 대한 비판은, 신화에 대한 계몽이 그 자체로 신화가 되어버린 상황(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계몽에 대한 재계몽의 기획으로서의 비판(이론)이다. 비록 그가 제시한 사유 방식은 어둡기 그지없으나 우리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은 빛(enlightenment)을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앞서 말했듯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이전 세대의 연구자들은 문화를, 산업과는 별개의 혹은 산업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고도의 도구적 합리성과 관료제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물질적 기반을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화할 수 없는 것까지 시장 기능에 의해 사물화(reification)한다. 사용가치(소비자가 상품에서 얻는 효율성)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 기여한다.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라디오와 인쇄매체 등의 매스 미디어와 광고의 결합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태(lifestyle)을 만들어냈고, 결국 자본주의 초기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율성과 주체성은 상실되어 버렸거나 자본주의적(에 적합한) 주체성으로 변질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주장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문화의 상품화, 예술이 대량 상품화됨으로써 예술의 탈예술화, 즉 예술만의 고유한 자율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주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이나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서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하의 문화산업은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예술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따라 항상 동일한 것을 대량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계획, 통제되고, 예견 가능하며 계산 가능한 상품들만을 생산한다.

 

두 사람은 결국 예술이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에 구속당함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의 총체적인 물화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문화산업의 메커니즘 속에서 대량생산된 작품 아닌 열등한 상품들은 이전의 고유한 진정성을 지닌 예술 작품들을 모방함(이 과정에서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규격화)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을 조장하고, 이를 은폐한다(부자도, 빈민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다). 문화산업은 대중들을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기만하는 술책이며,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도록 길들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이 현대의 대중문화가 지닌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을 주입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게 만든다고 본 비판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판이론과 자율예술은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들을 결집시킬 수도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논리는 반대중적 엘리트주의란 비판을 받게 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중은 근본적으로 조작의 대상일 뿐이지 혁명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가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발터 벤야민에게서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가 주목했던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 생산된 복제품에 의해 상실된 진정성(authenticity), 아우라(aura)의 상실이 도리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부추기는 기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된 산출물에는 진정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술작품으로부터 느낀다고 하는 진정성 역시 과거로부터 주어진 것(교육받은 것)이 아닌가? 대중문화에는 자율적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가? 실제로 도시화와 대중문화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질서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는가(E.P.톰슨)?

 

대중은 단순히 문화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 나름의 문화적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의 해독능력 역시 증가하고 있다. 즉, 창과 방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아직까지는 아도르노의 비관과 벤야민의 낙관 사이를 오가며 의지의 낙관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