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눈: 비극의 중심에 있지 않은 자의 한계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의 영화 <호랑이와 눈(The Tiger and the Snow, 2005)>이 때늦게 개봉된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뒤를 잇는 두 번째 감동”이란 홍보 문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생은 아름다워>와 닮은 꼴 영화인 <호랑이와 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지난해 모 영화잡지의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의 100대 영화’ 중 18위에 당당히 랭크될 만큼 국내 영화팬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로베르토 베니니는 일부 영화 마니아들에게만 인정받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코미디 영화감독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에게 기대 이상의 명성과 성공을 가져다주었고, 그 결실이 너무 달콤했던 탓인지 이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영화 <피노키오>가 실패하면서 베니니는 또다시 가장 비참한 기억의 현장에서 휴머니티와 사랑의 달콤함을 환기시키는 영화 <호랑이와 눈>으로 돌아왔다.

<호랑이와 눈>은 요설(饒舌)과 환상, 교묘하게 배치된 우연들이 어우러지는 베니니의 영화  미학이 잘 드러나고 있는 영화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 많은’ 대사에도 불구하고, 베니니의 요설에 질리지 않는 것은 그의 영화가 극적 아이러니들로 포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위장’, ‘은폐’를 뜻하는 ‘에이로네이아 eironeia’란 어원을 가진 아이러니는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난 진술이 실제의 속뜻과 다른 의미를 지니며, 표면과 내면이 서로 괴리돼 긴장을 유발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극적 아이러니’, ‘비극적 아이러니’라는 것은 배우의 연기나 대사, 때로 극 자체가 표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극중 배우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함으로써 서로 모순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거나 확인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대개의 극작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상황 자체를 눈치 챌 수 있도록 한다. 베니니의 코미디와 영화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바로 이 같은 비극적 아이러니의 세계다. 때때로 그의 영화들은 텍스트를 넘어 영화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광주의 기억이 새롭게 환기됐다. 만약 '1980년 광주'를 코미디로 만들려 한다면 어떤 반응이 일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그렇다. 현재로서 그건 불가능하다. 학살의 기획자이자 총책임자가 29만 원에 불과한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후원자들을 대동한 채 골프장을 찾는 나라, 현역 정치인들이 철마다 인사를 여쭙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재현되는 '민주공화국'에서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니니는 어떻게 역사가 남긴 가장 뼈아픈 기억이자 비극인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를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하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었고, 사회적 의미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인 조건 외에도 <인생은 아름다워>의 비극적 아이러니가 지닌 힘은 인종학살의 비정한 현실 속에서도 다섯 살 난 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 상황을 즐거운 게임이라 말하는 베니니의 낙관성에서 나온다. 비록 주인공의 아들은 사실을 모르지만 관객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의 힘이 홀로코스트란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코미디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게 했다.

<호랑이와 눈>은 우리 시대 또 하나의 비극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영화의 도입부는 주인공 아틸리오(로베르토 베니니)가 밤마다 반복하는 꿈속의 결혼 장면으로 시작된다. 베니니의 영화는 때때로 데칼코마니처럼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놓여 이는 우연들이 교묘한 대칭을 이루고 반복되면서 희극과 비극의 가교 구실을 하도록 한다. 마르크스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결혼식 장면에 등장하는 아름답게 빛나는 로마의 달빛이 있다면, 영화 중반부에서 주인공은 친구 파드(장르노)와 함께 포화가 번뜩이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바그다드의 달빛을 바라본다. 또 두 딸 아이와 함께 서커스단에서 낙타를 타는 즐거운 장면은 사랑하는 여인 비토리아를 위해 약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아틸리오는 이라크 출신의 시인 친구와 함께 로마에서의 꿈처럼 낭만적인 바그다드의 밤하늘을 올려다 본다. 두 사람이 같은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생각과 감상도 같은 것이었을까? 아틸리오가 아내 비토리아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친구 파드가 집 정원에서 홀로 목 매달아 자살한 까닭은 무엇일까? 동포들이 숱하게 죽아가는 현장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이라크인)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도 감수하는 그(이탈리아인). 얼핏 한쪽은 무능력하고, 무력해 보이고, 다른 한 편은 낭만적인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도리어 이 부분이 베니니 감독이 그려내는 가장 현실적인 장면(아이러니)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다운 바이 로>(짐 자무시 감독, 1986)에서 함께 출연했던 탐 웨이츠(Tom Waits)가 등장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탁성으로 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입부의 결혼식 장면만으로도 <호랑이와 눈>은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다. 니콜라 비오바니와 탐 웨이츠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결혼식에 등장하는 하객들의 면면을 살피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만약 당신이 영화를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 대목에서 웃었다면 그건 하객들 중에서 아르헨티나 환상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이탈리아의 대표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Eugenio Montale), 주세페 웅가레티(Giuseppe Ungaretti),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의 얼굴이 삽입된 것을 알아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베니니의 영화엔 코미디 특유의 우연들이 단순한 우연으로 그치지 않고, 영화를 끌어가는 복선으로 작용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숨은 그림(기호)찾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베니니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해온 주제는 분명히 ‘사랑의 기적’이라고 명명할 만한데, 실제로도 그의 아내 사랑은 거의 팔불출 수준이다. 아틸리오가 밤마다 열망하는 신부 비토리아 역을 연기하는 니콜레타 브라스키(Nicoletta Braschi, 베니니와 1991년 결혼했다)는 베니니의 감독 데뷔작 (1983)에 첫 출연한 이래 그의 영화 거의 대부분에서 주요 상대역을 맡고 있다. 아틸리오는 언제나 비토리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면서 열렬한 사랑을 바친다.

두 딸의 자상한 아버지이며 기발한 교수법으로 제자들의 사랑을 받는 유능한 교수이자 낭만적인 시인이지만, 현실의 일상에서 그는 자기 차를 주차해둔 곳을 몰라 헤매는 사람이고, 남의 옷을 자기 옷인 줄 알고 바꿔 입고, 변호사에게 매일 독촉당하는 현실부적응자다. 비토리아도 전 남편 아틸리오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의 시(詩)에 나오는 것처럼 ‘로마에서 호랑이가 눈 속에 서 있는 것을 보기 전엔 절대 결혼할 수 없다’며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비토리아가 아틸리오를 사랑하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언제나 냉정한 현실 세계보다는 그의 시에서나 등장할 법한 낙관적인 환상의 세계에 머물기를 원하는 아틸리오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부가 지극히 평온한 일상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의 결합을 이루지 못하는 이탈리아에서의 에피소드라면, 후반부는 비록 치열한 전쟁터에서지만 사랑하는 이를 치유하고 간병하는 아틸리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라크에서의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베니니는 사랑과 낙관적인 믿음으로 무장한 아틸리오를 통해 사랑의 힘만이 폭력과 증오를 극복하고, 현실의 전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깨우는 사랑의 묘약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계보학적으로 살폈을 때 <호랑이와 눈>이 <인생은 아름다워>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영화인 것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잘 짜인 베니니 영화 특유의 장르 미학이 살아있긴 하지만 <호랑이와 눈>이 주는 감동의 힘은 전작에 비해 함량 미달이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침공이 현재 종료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 중인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로서 중요한 부분은 그가 비록 이 같은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에 반영된 고통 받는 주체의 심정적 거리가 <인생은 아름다워>에 비해 너무 많이 떨어져 있다는 한계 때문이다.




전장의 위험 때문에 적십자사의 구호물품이 바그다드로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아틸리오는 직접 적십자사를 찾아 의료물품을 시내로 반입하려다가 자살테러범으로 오해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아틸리오는 목을 놓아 소리친다. "I'm Italian!" 만약 그가 나는 이라크 사람이라고 소리쳤더라도 미군들은 사격하지 않았을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고통의 당사자(주체)는 홀로코스트의 직접 피해자였던 유대인 ‘귀도’였고,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와 눈>에서 ‘아틸리오’는 친절한 이라크 의사를 비롯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친구 파드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위기 상황에서도 “I'm Italian!”이라 외치면 구원받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 베니니가 제 아무리 사랑으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그는 피 흘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라는 점에서 베니니의 코미디가 지닌 비극적 아이러니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다시 말해 베니니가 말하는 사랑의 기적이 위대하긴 하지만 <호랑이와 눈>이 그려내고 있는 현실은 결국 비극의 현장에서 피 흘리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안도의 표현이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은 1990년 걸프전 직후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까지 10여년이 넘도록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에 엄청난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수준 높은 공공의료체계를 유지했던 이라크의 보건의료체계가 심각하게 붕괴되면서 매달 4,500에서 6,000명에 이르는 5세 미만 어린이가 죽어갔다. 현실이 이토록 찬란한 비극일 때 웃음의 빛깔은 바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FILM2.0 제 353, 354 합본호  (2007.09.18 ~ 200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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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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