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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자살의 연구 -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1995년) 자살의 연구 -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1995년)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자살의 연구"가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우리 사회 전체에 죽음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바로 그런 시기에 이 책이 옮겨졌다는 것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원제는 "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이다. 말그대로 "잔혹한 신: 자살의 연구"인 셈이다. 얼마 전 나는 게르트 미슐레의 "자살의 문화사"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바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자살 보다는 죽음(Thanatos) 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고, 공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삶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논할 수 있으리요"만 에로스와 타나토스(Eros et Thanatos)는 사실상 한 몸.. 더보기
최승자 - 자화상 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출처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시인선16, 1989 * 최승자의 시에서 발견되는 - 이건 발견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 더보기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 잊혀진 여자 잊혀진 여자 - 마리 로랑생 권태로운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슬픈 여자 슬픈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불행한 여자 불행한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버려진 여자 버려진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떠도는 여자 떠도는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쫓겨난 여자 쫓겨난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죽은 여자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 잊혀진다는건 가장 슬픈 일 * 최승자의 을 읽고 생각난 김에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여성 화가, 프랑스)의 를 읽는다. 마리 로랑생은 잊혀진 여자가 가장 슬프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많이 남아있는 구절이지만 마리 로랑생, 스스로가 염려했던 것처럼 정작 이 말을 했던 것이 그녀였다는 사실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는 편이다. '권태-> .. 더보기
최승자 - 외로운 여자들은 외로운 여자들은 - 최승자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출처 :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말에 비해 표피적이다. 고독이란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下)〉 '호화호색장(好貨好色章)'에서 나오는 '환과고독(鰥寡孤獨)'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 더보기
최승자 - 삼십세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릎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언젠가 안도현 시인의 초청강연 자리에서 그가 말하길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를 가졌고, 김용택은 '섬진강'을 가졌는데, 자신은 기껏해야 '연탄재'뿐이라고 말.. 더보기
최승자 -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