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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소헌(風蕭軒)이란 이름에 새긴 뜻

풍소헌(風蕭軒)이란 이름에 새긴 뜻

다산 정약용 선생은 "아언각비"라는 책에서 전, 당, 각, 루, 정, 재, 헌 등 각 건물을 구분하는 법을 적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분적 위계질서가 뚜렷했던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에도 역시 그런 위계와 건축 양식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각기 달리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은 그런 위계와 의미, 건축 양식에 따라 다른데, "전"은 궁궐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 왕과 왕비, 전왕비, 왕 어머니나 할머니 등이 공적인 활동을 하는 건물로 세자나 영의정 등은 전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당"이란 "전"에 비해 외적 규모는 떨어지지 않을 수 있어도 "전"보다 한 단계 낮은 건물을 일컫는 말로 "전"이 공적인 영역이라면 "당"은 일상적인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합"과 "각"은 "전"이나 "당"에속하는 부속 건물이다. 그러므로 불교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대웅전"으로 "전"이 되고, 그 이외에 토속신앙의 산신령을 모시는 건물은 "산신당"이 되는 것도 이런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의 전당은 무슨 뜻일까?)

"재"와 "헌"은 왕과 왕비도 쓸 수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왕실 가족이나 궁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기거활동공간으로 재는 숙식 등 일상적인 주거용이거나 조용하게 독서나 사색을 하는 용도로 쓰이는 건물을 의미한다. 헌은 동헌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대청 마루가 발달되어 있는 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공무적 기능을 가진 경우가 많다. 루와 정의 경우엔 바닥이 지면에서 한 길 높이 정도의 마루로 되어 있는 집을 일컬어 루라 하고, 연못가나 개울가의 휴식 공간 또는 연회 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은 정이라 한다. 같은 루의 형태라 하더라도 일층만으로 된 경우엔 각, 이층일 경우엔 루라고 불렀다. 전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당" 아래의 말은 일반 사대부들도 당호나 옥호를 지을 때 각자 편의로 지어 붙일 수 있었다.

내가 구태여 헌(軒)이라 한 것은 대청마루의 느낌, 바람 소리 쓸쓸하게 듣기 가장 좋은 곳, 인터넷 공간이란 결국 남들에게 훤히 내보이는 위치이므로 앞 뒤로 막히지 않은 헌의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풍소헌(風蕭軒)"의 풍소(風蕭)는 사마천의 "사기" 열전편에 실린 자객 형가(荊軻)에 대한 내 애정이 담겼기 때문이다.
 
형가는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그의 선조가 본래 제나라 사람이었으나 위나라로 옮겨와 살다가 다시 연나라로 가서 살았다.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며 많은 이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긴 했으나 다른 지역 사람들이 옮겨와 사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중국의 객가를 생각해보라) 텃세가 있는 법인데, 연나라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형경(荊卿)이라 불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인품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형가는 생각이 깊으며, 책을 좋아하는 선비였고, 인품이 고결하여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그와 교제를 나눈 상대 역시 어질고 호방한 인물들이었다.

형가가 연나라로 와 정착하자 당시 연의 재야 인사였던 전광(田光) 역시 그가 벙상치 않은 인물이란 사실을 알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교제를 청했다. 그 무렵 진나라로 볼모로 잡혀갔던 연의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서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태자 단은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기 전에는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진왕 정정(政:훗날의 진시황)을 만나 어렸을 때부터 친구의 정을 쌓았다. 정이 진나라의 왕이 되자 태자 단은 다시 진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진왕은 어렸을 때 친구였던 태자 단을 잘 대접하지 않았다. 결국 단은 진왕 정이 전국 통일이라는 무서운 야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장차 연의 멸망을 막기 위해 진나라에서 도망쳐 연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진의 보복과 진왕 정의 야심을 사전에 막아내기 위해 태자 단은 자객을 물색하지만 연나라는 작은 소국이어서 그럴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때마침 진나라는 중원으로 진출하여 여러 제후국들을 공격해 영토를 넓혀나가다가 결국 연나라마저 압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를 근심한 태자 단은 그의 스승인 국무(國武)에게 그 방책을 자문했다. 국무가 말하길.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나오게 된다면 만리장성의 남쪽, 역수(易水) 이북에 있는 우리 나라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비록 모욕을 당했다는 유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해서 그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진왕의 미움을 받고 연나라로 망명해 왔고, 태자 단은 그를 받아들여 융숭한 대접을 하며 묵도록 했다. 이때 다시 국무가 충고하길.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저 포악한 진왕이 우리 나라에 대한 노여움을 더해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근심되는 일인데, 하물며 번장군의 은신처가 이곳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날이면, 마치 굶주린 호랑이가 지나가는 길목에 고기 토막을 던져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반드시 끔찍한 재난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빨리 번 장군을 흉노의 땅으로 보내어 진나라에 트집잡힐 일이 없게 하십시오."


태자 단이 말했다.

"나는 진왕에 대한 분노로 마음이 혼란하여 잠시도 참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번 장군으로 말하더라도 천하에 몸둘 곳이 없어 쫓기는 처지에서 내게 의지해 온 것입니다. 나는 강국 진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가엾은 친구를 버리고 그를 흉노에게 보내는 일은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이상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아무쪼록 고쳐 생각해 주십시오."


"그러시다면 재야의 인물로 전광 선생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며 용기가 있는 사람이니, 그와 한번 상의해 보십시오."


"선생의 주선으로 전광 선생과 사귀고 싶은데 애를 좀 써 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국무는 밖으로 나와 전광 선생을 만나 태자가 국사를 상의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전광은 쾌히 승낙하고 태자에게로 찾아갔다. 태자는 전광이 자리에 앉자 간절하게 말했다. "연나라와 진나라와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원컨대 선생께서는 좋은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윽고 전광이 입을 열었다.

"신은 이미 노쇠하여 국사를 의논함에는 응할 수 없고, 신의 친구인 형가라면 가히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선생의 주선으로 형가와 사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광은 즉시 일어나서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태자는 문까지 전송하며 당부했다.

"내가 지금 말한 것과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은 국가 대사이니, 부디 누설하시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전광은 고개를 숙인 채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굽은 허리를 이끌고 형가를 찾아가서 말했다.

"내가 그대와 친하다는 것은 연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소. 지금 태자는 내가 혈기 왕성한 시절만을 듣고 내 몸이 이미 노쇠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인지, 송구스럽게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소. '연나라와 진나라와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라고 말이오. 나는 그대를 내 몸처럼 여기고 있소. 그래서 태자에게 그대를 소개하기로 했소. 그러니 태자를 한 번 방문해 주시지 않겠소?"

형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광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덕있는 사람이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남의 의심을 품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오. 그런데 태자는 내게 또 이렇게 말했고. '지금 말한 것은 국가 대사이니 부디 누설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이오. 그러니 태자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오. 무릇 일을 함에 있어 남의 의심을 품게 해서는 절개와 의협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소." 

전광은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형가를 분기시키고자 했다.

"아무쪼록 그대는 곧 태자를 찾아가서 '전광은 이미 죽었습니다. 누설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여준 것입니다'하고 전하시오." 

전광은 말을 마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가가 태자를 만나 전광의 죽음을 전하자, 태자는 두 번 절하고 난 다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전광 선생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국가 대사에 관한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전광 선생은 죽음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지금 진나라는 탐욕이 끝이 없어 그 욕심은 만족을 모르고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점령하고 온 중국의 군주를 신하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나라는 약소국으로 종종 전쟁의 피해를 받았으며, 이제 나라의 총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진나라와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제후들은 진나라에 복종하여 합종 동맹에 의해서도 이를 당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천하의 용사를 찾아내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게하여 큰 이익을 내세워 설득해 본다면, 비록 탐욕스런 진왕이지만 혹시 무슨 희망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진왕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가장 바라고 있는 바입니다만, 누구에게 그 사명을 맡겨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형경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잠시 후 형가가 말했다.

"그것은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저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는 정녕 사명을 다하지 못할 일입니다."

태자는 가까이 다가가 절하고, 겸양하지 말기를 청하여 물러나지 않았다. 마침내 형가가 승낙하자 태자는 경의를 표하며 형가에게 상경의 지위를 주어 관사에 머물도록 했다.  태자는 매일 그 관사로 찾아가 태뢰(太牢:왕가의 음식으로, 소·돼지·양 등으로 만든 고급 요리)로써 대접하고 진귀한 물품과 거마와 미녀를 제공하며, 형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었다.  이러는 동안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형가는 아직도 움직여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에 진나라 장군 완전은 조나라를 격파하여 조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모조리 거두어 들이고는 군사를 북쪽으로 돌려 종횡무진으로 공략하면서 연나라의 남방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두려움을 느낀 태자 단은 다시 형가를 청하여 말했다.

"진군이 내일이라도 역수를 건너오면 오래도록 귀공을 모시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형가가 대답했다.

"태자께서 말씀이 없으셔도 제가 찾아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서둘러 떠난다 하더라도 믿을 만한 징표가 없으면 진왕을 만나게 해 주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번오기 장군은 진왕이 천근의 황금과 1만 호의 땅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찾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번 장군의 목과 비옥한 연나라의 땅인 독항(督亢)의 지도를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은 우리를 믿고 기꺼이 만나줄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는 은혜를 갚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실로 참혹한 고육계가 아닐 수 없었다. 태자 단은 몹시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번장군은 쫓기어 내게 의지하러 온 사람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훌륭한 분의 마음을 해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원컨대 형경께서는 생각을 고쳐 주십시오."

형가는 태자가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간파하고 남몰래 번오기 장군을 찾아가 말했다. 

"장군에 대한 진나라의 조치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양친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가 권속이 모두 극형에 처해졌으며,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장군의 목에는 황금 천 근과 땅 1만 호의 현상이 걸려 있다 하니, 장차 이 일을 어쩔 셈이십니까?"

번오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깊이 한숨을 몰아쉬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늘 뼈에 사무칩니다. 다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형가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연나라의 근심을 덜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번오기는 다가앉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장군의 목을 얻어 진왕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진왕은 반드시 기뻐하며 저를 만나 줄 것입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그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장군의 원수도 갚을 수 있고, 지금까지 연나라가 받은 굴욕도 씻을 수가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동의해 주시겠습니까?"

번오기는 숨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이야말로 제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속을 태우던 일입니다. 지금에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즉시 목을 찔러 죽었다. 그 무렵 연나라에 진무양이라는 한 용사가 있었다. 열세 살 적에 벌써 살인을 한 사람으로, 누구나 그를 두려워하여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태자는 진무양에게 명하여 형가를 수행하게 했다.

출발에 앞서 형가는 같이 동행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의 집이 멀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장을 갖춘 채 대기중이었다. 출발 시각이 지나자, 기다리다 지친 태자는 형가가 혹시 변심이라도 했는가 싶어 또 부탁했다.

"앞으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형경께서는 무슨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나는 진무양을 먼저 출발시킬까 합니다."

형가는 답답하다는 듯이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께서는 도대체 어찌 하자는 것입니까. 더벅머리 애송이는 떠난다 하더라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지금 한 자루의 비수를 품고 진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제가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제가 데리고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태자께서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만 작별하고 떠나겠습니다."


이리하여 형가는 마침내 출발하였다. 태자와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흰 상복을 입고 형가를 전송하여 역수 기슭에 이르러 도조신(道祖神:길 떠나는 사람을 보호하는 신)에게 제를 올리고, 드디어 여로(旅路)에 올랐다. 형가의 친한 친구인 고점리는 비파(筑)를 뜯고, 이에 화답하는 형가의 음성은 반음이 낮은 단조의 비창한 가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닦을 줄을 몰랐다. 형가는 천천히 걸으며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역수를 건너며(渡易水)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易水)는 차구나
장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호랑이 굴을 찾음이여, 이무기 궁으로 들어가네.
하늘을 우러러 외침이여, 흰 무지개를 이루는도다.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探虎穴兮入蛟宮
仰天噓氣成白虹


이 때 그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모두 하늘로 솟았다고도 한다.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진왕의 총신인 중서자(中庶子:궁내부 대신) 몽가(夢嘉)에게 천금의 예물을 바쳤다. 몽가는 그를 위해 진왕에게 상주했다.

"연왕은 충심으로 대왕의 위엄에 떨고 있으며, 군사를 내어 우리 나라에 거역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합니다. 연왕은 대왕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말씀올리기가 어려워 삼가 번오기의 목을 베고 연나라 독항의 지도와 함께 상자에 넣어 봉함 다음, 연왕이 보낸 사자가 그것을 가지고 지금 어전 뜰 앞에 엎드려 대왕을 뵙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잠시 인견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정장을 하고 국빈 알현의 의식으로 함양궁(咸陽宮)에서 연나라의 사자를 인견했다. 형가는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를 받들고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든 채 천천히 다가가 옥좌 아래에 이르렀다. 그때 진무양은 안색이 창백하여 떨고 있었다. 늘어선 뭇 신하들이 괴이하게 여기니, 형가는 진무양을 돌아보며 웃고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북방 오랑캐 땅에 살던 사람이라 일찍이 천자님을 배알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사오니 아무쪼록 대왕께서는 저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어 어전에서 사명을 다 마치도록 해 주십시오."

진왕이 형가에게 말했다.

"먼저 진무양이 가지고 온 지도를 가지고 오라."

형가는 지도를 들고 어전에 올렸다. 진왕이 지도를 펼치자 지도 맨 안쪽에서 비수가 나타났다. 그 순간 재빨리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비수를 쥐며 진왕을 찔렀다. 그러나 몸에 닿지는 않았다. 진왕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소매가 찢기었다. 진왕은 급히 검을 빼려고 했으나 검이 너무 길어서 빠지지 않았다. 칼집을 잡았으나 당황한 나머지 빠지지 않았다.

형가가 진왕을 쫓으니 진왕은 기둥을 돌아서 달아났다. 여러 신하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모두들 넋을 잃고 섰을 뿐이었다. 더구나 진나라의 규칙으로는 어전에서는 몸에 한 치의 쇠붙이도 간직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무기를 든 시종 무관은 모두 어전 아래에 늘어서 있었으나 어명이 없으니 감히 올라갈 수도 없었다. 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부하 군사를 부를 여유도 없었다.

형가는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진왕을 쫓았다. 사태는 급박했다. 진왕은 형가를 칠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달아나는 꼴이었다. 이때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들고 있던 약봉지를 형가에게 던졌다. 형가는 약봉지를 맞고 잠시 멈칫했다. 진왕은 계속 기둥 둘레를 돌고 있을 뿐, 허겁지겁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때 좌우에서 외쳤다.

"대왕께서는 얼른 검을 빼십시오!"

진왕이 검을 뽑아 형가를 쳤다. 형가의 왼편 다리가 잘려 나갔다. 형가는 설 수가 없었다. 그는 비수를 진왕에게 던졌다. 그러나 비수는 맞지 않고 구리기둥에 박히고 말았다. 진왕이 재차 형가를 내리치니 형가는 여러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형가는 웃으며 기둥에 기대어 다리를 괴고 편히 앉더니 진왕을 꾸짖으며 말했다.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은 천운이다. 다만 그대가 빼앗은 땅을 도로 찾지 못하는 것이 한이로다."

결국 형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  진시황의 호위병들에 의해 사지육신이 무참하게 도륙당하고 만다. 앞서 형가의 인품이나 성정에 대해 말했는데, 형가를 일컬는 말 가운데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란 표현이 있다. 오늘날 이 한자어는 사리분별을 못하여 무례하고, 교만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나 본래는 형가와 그의 절친한 벗이자 비파(琵琶)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와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파의 명인인 고점리가 비파를 켜고, 형가는 이에 맞춰 춤을 추며 고성방가를 하였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서로의 신세가 처량함을 느껴 감정이 북받치면 얼싸안고 울기도 웃기도 하였는데, 이때 그들의 모습이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서 "방약무인(傍若無人)"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傍 : 곁 방, 若 : 같을 약, 無 : 없을 무, 人 : 사람 인)

* 이곳의 이름에 <역수가>에서 따온 이름을 넣은 것은 어쩌면 제가 '형가(荊軻)'를 닮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