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이현석 (지은이) | 한티재 | 2013-12-09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은 오스트리아 빈출신의 유대계 정신분석학자로 1938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있는 독일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줄곧 장애어린이의 심리치료 분야에 종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옛이야기의 즐거움』 같은 책을 썼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해 서구의 어린이 이야기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를 분석하면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어린이들의 두려움과 설렘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행기들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어(母語)의 나라, 모국(母國)을 떠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두려움과 설렘이 녹아있지 않은 여행기는 가이드북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 하는 '길가메시' 서사시도, '오딧세이'도, '서유기'도 결국 고향을 떠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들은 왜 길을 나선 것일까? 여행은 여행 그 자체로도 목적이 있지만 다른 한 가지는 추구(追求)다. 주인공은 어떤 계기로 집을 떠나 여러 낯선 장소를 이동하며 갖가지 사건과 인물들과 만난다.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만나 결투를 벌인 뒤 친구가 되고, 오딧세우스는 세이렌의 마녀들을 비롯해 갖가지 대상들을 만나 동료들을 잃지만 결국 이타카로 귀환한다. 손오공 역시 삼장법사를 만나고, 사오정을 만나고, 저팔계를 만난다.
이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에는 모두 12명의 주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장 에밀리아(김병화박물관, 시온고 마을, 우즈베키스탄), 이브라힘(시와, 이집트), 하루코(치앙마이, 태국), 테리(침사추이, 홍콩), 까말(포카라, 안나푸르나, 네팔), 미스터 빈(구찌터널, 호찌민 시, 베트남), 타리크(페스, 모로코), 줄리안(시저우, 윈난, 중국), 애드리안(전몰자의 계곡, 엘에스코리알, 스페인), 꾼니(벵메알레아, 시엠레아프, 캄보디아), 초투(우타르프라데시, 인도)가 그들인데, 저자 이현석은 이들을 여행 중에 만나 그들의 삶 속에서 사회와 문화, 역사를 만나고 이것을 다시 자신의 사유 속에서 재구조화한다.
그 기억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중략>… 여행지에서 타자와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행하는 것이니까요. 때문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서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주했던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재인식의 결과물입니다. <본문 8-9쪽>
이현석의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는 그런 의미에서 낯선 곳을 찾아 떠나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여행기이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여행기와 남다른 측면이 있다. 12명의 인물은 12개의 장소에서 12개의 에피소드가 있고, 최소한 12개 이상의 깨달음이 함께 있다. 그 깨달음의 곁에는 이 책의 말미에 소개되고 있는 책들이 있다. 12개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에가와 타츠야(江川達也)의 만화 『골든보이』를 떠올렸다. 이 만화의 주인공 ‘오에 긴타로(大江錦太郎)’는 내가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인생의 롤 모델이다. 그는 도쿄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천재인데 책상에서만 하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대학을 자퇴한 뒤 ‘진정한 공부’를 하기 위해 자전거로 일본 전국을 여행하며 여행지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는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을(주로 미인들을) 만나,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는 언제나 이들을 배신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 이들을 돕고, 그 자신도 배움을 얻어 새로운 공부를 위해 떠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공부노트'에 상세히 기록한다.
이현석의 그의 공부노트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은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에서 김병화박물관의 장 에밀리아 관장과의 만남 이후 과정을 보자.
모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태어난 땅을 뒤로 한 그들은 정착한 곳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이라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지·언어·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 안에서 살고 있는 다수자인 우리 한국인들이 그녀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거나, 그녀의 말투가 이북 사투리와 닮았다고 하여 ‘북한말’로 생각하는 것 모두 소수자로 살아온 그들에게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자 다나카 가쓰히코(田中克彦)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어’와 ‘모국어’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모어’란 ‘태어나서 처음 익혀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말’이며 ‘한번 익히면 벗어날 수 없는 근원의 말’이다. 반면 ‘모국어’는 ‘자신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국가, 즉 모국의 국어를 뜻하며 근대 국민국가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다나카 가쓰히코의 정의를 대입시켜본다면 장 에밀리아의 모어는 우즈베키스탄이며, 모국어는 고려말인 셈이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 한국 영토에서 나고 자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모어와 모국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비로소 내 눈앞에 모국어의 풍경이 펼쳐진 것은 장 에밀리아 관장의 일성을 듣고 난 이후였다. <본문 57~58쪽>
저자의 걸음을 좇아 세상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펴보노라면 1984년 1월 인천 출생의 이현석이란 한 젊은이(?)가 그간 쌓아온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저자의 첫 책을 읽는 일만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즐거움은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취하게 되는 몇몇 포지션들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독자(讀者), 비평가(批評家), 편집자(編輯者), 저자(著者)의 자아를 갖는다. 앞서 두 가지 입장은 보통 일반적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입장이겠지만 후자의 두 가지 경우는 그리 일반적인 입장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이런 입장들 사이를 널뛰기하며 책을 읽는데 젊은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주로 편집자의 설렘을 안고 읽게 되어 가슴 설레는 두근거림을 품게 된다. ‘언젠간 써먹을 테다’라는 마음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저작을 저자의 입장에서 읽을 때는 증폭되는 열등감과 자만하는 안도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읽게 된다. 특히 이 책의 「테리(침사추이, 홍콩)」 부분을 읽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밤 11시 12분쯤 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훌륭합니다. 이 책…. 흡입력 있네요. 그런데 윌슨 선생 이야기를 앞에 배치한 건 본인의 의도인가요? 한티재 의도인가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6월 30일 저녁, 선전을 통해서 들어오는 인민해방군의 행렬이었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해방군은 마치 점령군처럼 홍콩으로 진주했다. 다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장면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이의 부모는 나라를 잃은 것마냥 흐느꼈고, 어떤 친구의 아버지는 이미 반환이 되기 훨씬 전부터 뉴질랜드에 가서 취직을 했으며, 어떤 이의 가족은 반환식 일정이 주말과 겹쳐 연휴였던 까닭에 오스트레일리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고도 했다.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반환 당시에 장쩌민(江澤民)이 이야기한 “백 년간의 치욕을 씻었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중략>… ”그때는 탱크로 점령했고, 지금은 본토의 대기업으로 점령하고 있어. 걔네들도 잘 알고 있는 거야. 오래전부터 무기는 바뀌었다는 걸.“ <보문 125~126쪽>
내가 갑자기 이걸 물어보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저렇게 현장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쉽게 알 수 없는 현장의 느낌과 감정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이야기 패턴이 조금씩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자 개인의 이야기는 언제쯤 등장할까 기다리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나는 어린이 문학과 여행기의 패턴 사이에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요소는 어떤 경우이든 처음의 사건은 주인공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사건들이 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이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이현석은 왜 길을 떠나게 되었을까? 나는 그의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의문을 떨쳐내지 못했다. 책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여행을 떠난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의 순서가 연대기적 배치가 아니라면 이 책의 이야기들은 어떤 기준으로 배치된 것일까? 나는 이 책의 중반쯤에서 그것이 궁금해졌다.
순전히 재미만 놓고 따지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제일 앞부분에 놓인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편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일흔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윌슨’이 머나먼 이국에서 온 젊은이와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1장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편을 이 책의 백미(白眉)로 꼽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음의 인용된 부분에도 있다.
일흔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이에게, 당시 이십대 중반에 불과했던 나의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흥미로웠을까? 그럼에도 그는 매일 밤마다 이렇게 옥상에 앉아 이국에서 온 젊은이가 어설픈 영어로 말하는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 하지만 문법과 미국식 단어에 대한 지적은 멈추질 않으며 - 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가 된 것처럼, 세비야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매일 밤마다 내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서 윌슨에게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일반계 고등학교 2학년 때 230명 중 200등에 가까울 만큼 열등생이었던 이야기 - 씨름부만 40명이었으니 사실상 '전업 학생' 중에서는 꼴찌였던 이야기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언제나 인상적인 시작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본문 29쪽>
그가 책 속에 살짝 풀어놓은 자기 인생의 ‘인상적인 시작’은 상당히 흥미롭다.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교 석차 바닥을 기던 인물이 대학에 갔고, 상경 이후 영화판과 시위 현장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귀향해서 공부를 시작해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의외로 무탈하게 졸업까지 했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한 계기는 분명 ‘실연(失戀)’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책을 아무리 읽어도 나머지 부분에는 더 이상 이렇게 재미난 저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여행은, 특히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나서는 여행은, 스스로를 자발적인 국외자로, 자발적인 이산자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행은 내가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투입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고 충돌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과 완벽하게 다른 습성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과 나 사이에 충돌과 화해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꿈꾸었던 우리는 스스로 쌓아올린 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12쪽>
갑자기 벽(壁)과 마주선 기분이 들어 난감했다. 물론 이것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疏隔效果) 같이 작가가 독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책을 중립적(?)으로 읽어주길 바란 결과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난 그것이 그다지 성공적인 장치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행기도 일종의 에세이라고 했을 때, 저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독서를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동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여행(물론 아닌 것도 있지만)은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떠났는지, 왜 그곳이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매우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고백한다. 한 편으로는 저자의 다채로운 여행지와 만남이 탐나고 부러웠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에선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저자의 이야기 엮어가는 솜씨와 글 솜씨가 시샘을 느낄 만큼 훌륭했기 때문이다. 다소 꼰대(?)스럽게 말하면 과거 어떤 시절의 젊은이들이 농활이니, 공활이니 하는 것으로 청춘의 한 시절 타인을 만나서 성장했다면(나는 지금도 이것이 ‘진정한 공부’ 중 일부였으리라 여기지만, 정작 나 자신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해본 기억밖에 없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엄기호의 말을 빌리면 군대 또는 해외를 나가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 진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 된 듯싶다.
겉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여유 있어 보이지만, 양계장에서 키워진 닭처럼 부모가 대신 선택하고, 대신 살아주는 이 시대의 풍속이 청춘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대의 장애가 되어버린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현석은 이 시기들을 매우 치열하게 보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이현석은 ‘꼴통’이다. 내가 이현석을 감히 ‘꼴통’이라고 부르는 건 아마도 권혁태 선생이 나보고 ‘또라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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