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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정란 - 눈물의 방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세상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많은 것을 누려본 기억도 별로 없지만 세상은 한 가지를 주면.. 더보기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나는 도종환 시인의 이 시가 머리로 꾸민 시가 아니라 정말 일상에서 시인이 직접 대면한 그 순간의 일부를 시로 옮긴 것이라 생각한다. 신혼 살림을 13평 짜리 방 두개의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책창고였다.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생각한 혼수는 책꽂이였는데, 좋은 책장을 들일 수 없어 동네 가구점에 부탁해서 책장 여섯 개를 맞췄다. 책장 여섯 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작은 유리창 하나도 허락할 수 없으리만치 책으로.. 더보기
고정희 - 고백 고백 -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 짧은 시에는 감상 평도 짧아야 옳으리 나는 찌 리 릿 더보기
최승자 - 삼십세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릎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언젠가 안도현 시인의 초청강연 자리에서 그가 말하길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를 가졌고, 김용택은 '섬진강'을 가졌는데, 자신은 기껏해야 '연탄재'뿐이라고 말.. 더보기
이승희 - 사랑은 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 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히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 이.. 더보기
허영자 - 씨앗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 부드럽고 쓸모있는 것들이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고집세서 쓸데 없는 것들이 오래 남는다 쓸모없어 찾는 사람도 없는 외롭고 쓸쓸하게 방치되어버린 오직 꼭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남겨진 것 자신을 죽여야만 살릴 수 있는 것 죽기 전까지 고독하게, 쓸쓸하게 자신을 버림받도록 만든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고, 삭히지 못하고 저버러지 못하고, 내버리지 못하고 무엇 하나 썩도록 버려두지 못하고 온전하게 품어내야만 제 쓸모를 다하는 것 그것은 가장 나중까지 남아야만 알아 볼 수 있다 고독하게 오래도록 버림받은 당신의.. 더보기
권현형 -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 권현형 나환자 마을이었다가 전쟁으로 불타버려 다시 들어섰다는 마을, 당신이 사는 그곳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문득 당신이 붉은 꽃잎으로 보였지요 나병을 앓고 있는 젊은 사내로 슬픈 전설의 후예로 나무 잎새들 당신의 머리카락 햇결처럼 물이랑 일던 초여름이었지요 꽃잎, 작디 작은 채송화들이 마당 가득 재잘거리고 있던 그 집, 그 방, 당신 방에는 작은 악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무도 한 번도 켜본 적 없다는 흰 벽 위에 벙어리 만돌린이 내걸려 있던 방 당신이 좋아한다는 여자의 편지를 읽어주던 내가 없던 다른 여자가 있던, 햇살이 엉켜 어지럽던 그 골방처럼 모든 내력은 슬프지요 켤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푸른 만돌린에 대한 기억처럼 * 일본의 게이샤들이 누군가의 소실이나 반려로 간택되어 .. 더보기
정윤천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 정윤천 먼 곳에 두고 왔어도 사랑이다. 눈 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제 혼자서 부르며 왔던 그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를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외로운 열망같은 기원이 또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쪽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이 세상을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만 같은 한 순간이여.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휩쓸려, 손가락 빗질인양 쓸어 올려 보다가, 목을 꺽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 더보기
마종기 - 우화의 강 우화의 강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 더보기
황규관 - 우체국을 가며 우체국을 가며 -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