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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임화 - 자고 새면: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고 있다. 자고 새면 - 벗이여 나는 이즈음 자꾸만 하나의 운명이란 것을 생각고 있다. 임화 자고 새면 이변을 꿈꾸면서 나는 어느 날이나 무사하기를 바랐다 행복되려는 마음이 나를 여러 차례 죽음에서 구해 준 은혜를 잊지 않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무사한 그날 그날 가운데 찾아지지 아니할 때 나의 생활은 꽃 진 장미넝클이었다 푸른 잎을 즐기기엔 나의 나리가 너무 어리고 마른 가리를 사랑키엔 더구나 마음이 애띠어 그만 인젠 살려고 무사하려던 생각이 믿기 어려워 한이 되어 몸과 마음이 상할 자리를 비워 주는 운명이 애인처럼 그립다.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 미래사, 1991. * - 한국에는 미남 시인의 계보가 있다하는데, 언어를 표현의 매개로 사용하는 시인에게 얼굴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더보기
최승자 - 자화상 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출처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시인선16, 1989 * 최승자의 시에서 발견되는 - 이건 발견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 더보기
공광규 - 걸림돌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되 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 더보기
허수경 - 밤 소나기 밤 소나기 - 허수경 재실댁은 아파트 파출부 그 집 아재 김또돌 씨는 하수구 치는 일을 했제 야반도주 고향을 베린 지 어언 십여 년 하루떼기 벌이에 이골은 났지만 날이 갈수록 왜 이리 쪼그라만 드는 살림 단칸 월세방에 내외간이 딴이불 거처를 하는데 김또돌 씨 술이라도 한잔 들이키는 날에는 이불 싸가지고 마루에 누웠제 옌장 마누라쟁이라고 암만 고달퍼도 할 일은 해야제 맨날 돌아누우니 살맛이 나 살맛이 쓴 담배만 뻑뻑 빨다 잠이 들었는데 이쿠 소나기야 마루까지 치받고 후둑거리는 소나기 피해 우당탕탕 챙겨 방으로 들어왔는데 소나기 핑계로 들어와 누웠는데 웬일로 재실댁이 먼저 안겨오지 않나 소나기 한번 장하데이 이녁도 장하게 한번 들어오소 김또돌 씨 소나기처럼 황소처럼 달려들었제 임자요 섭했지예 몸이 천근 같으.. 더보기
황지우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지금보다 어렸을 때... 이 시를 읽으며 나는 황순원의 단편 어느맨가에 나오는 겉늙어버린 동리 형처럼 끼룩끼룩대며 웃었다. 이상하게 세상을 다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생리적 연령이 어리거나 .. 더보기
함민복 - 서울역 그 식당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 가끔 어떤 시들을 읽노라면 사람의 마음이 울컥해진다. 중요한 건 쌩하니 차가운 바람 소리 들리며 "벌컥" 문이 열리고 마음이 들고 나는 것이 아니라 울컥해진다는 거다. 사람들이 생각.. 더보기
천양희 - 한계 한계 -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 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 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출처 :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 깊은 밤 세상 만물이 모두 잠든 것 같은 시간에 홀로 깨어난다. 곁사람의 고운 숨소리도, 태어난지 이제 막 7개월 된 딸 아이의 뒤척임도 저 멀리 있다. 갑자기 깨어나 부우우하며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는 냉장고, 초침의 재깍이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저 멀리 한길로 밤새워 북으로 달리는 차량 불빛이 서치라이트처럼 희번득하는 밤에 문득 이제 다 살아버린 듯 갈 곳도.. 더보기
황동규 - 몰운대행(沒雲臺行) 몰운대행(沒雲臺行) - 황동규 1 사람 피해 사람 속에서 혼자 서울에 남아 호프에 나가 젊은이들 속에 박혀 생맥주나 축내고 더위에 녹아내리는 추억들 위로 간신히 차양을 치다 말고 문득 생각한 것이 바로 무반주(無伴奏) 떠돌이. 폐광지대까지 설마 관광객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길들의 고요. 지도를 펴놓고 붉은 볼펜으로 동그라미 하나를 치고 방학에도 계속 나가던 연구실 문에 자물쇠 채우고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 길을 나선다. 2 영월 청령포를 조심히 피해 31번 국도를 탄다. 상동 칠랑에서 국도를 버리고 비포장 지방도로로 올라선다. 중석 걸러낸 크롬 옐로우 물이 길 옆 시내 가득 흘러오고 저단 기어를 넣은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로 떤다. 차 고장 없기만을 길의 신(神)에 빌며 망초꽃이 모여선 길섶을 지나 아다.. 더보기
신경림 - 다리 다리 -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 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 언젠가 글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 중 하나는 자존감, 즉 자기존재감이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나로 온전히 서지 못할 때, 사랑도 지겹고, 허무해집니다. 그런데 때로 사랑에 이 자기존재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도리어 장애가 될 때도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주고 싶다는 마음은 때로 나를 온전히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 더보기
김상미 - 연인들 연인들 - 김상미 내 몸에서 나가지 마 눈썹이 닿고 입술이 닿고 음부 가득 득실거리던 꿈들이 닿았는데 서릿발 같은 인생 겨우 겨우 달랬는데 나가지 마 시커멓게 열려 있는 비존재들. 그 허공 속으로 우린 연인들이야 날마다 새로워지는 마음 금빛 월계관처럼 육체에다 씌우며 몰아, 몰아, 그 뜨거운 파도 그 치열한 외침 인생이 보일 때까지 껴안고 또 껴안아야지 자지러지면 어때 신선한 육체의 광택 바다와 사막을 길어나르듯 땀 흘리며 몸부림치고 매달리면 어때 숨쉬는 육체의 수렁은 깊고도 깊어 나 네게서 떨어지지 않을래 쫙 쫙 쫙 입 벌리는 관능 몸이 몸을 먹는 경이, 경이 속으로 끝도 없이 흘러 흘러갈래 내 몸에서 나가지 마 우린 연인들이야 더러운 신의 놀라운 흔적들이야 땅이고 하늘이야 출처 : 김상미, 『모자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