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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심재휘 -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 더보기
고정희 -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 - 고정희 오월의 융융한 햇빛을 차단하고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악귀를 쫓아내듯 신열과 싸우며 집 안에 가득한 정적을 밀어내며 당신이 오셨으면 하다 잠이 듭니다 기적이겠지... 기적이겠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이 대낮에, 이심전심이나 텔레파시도 없는 이 대낮에, 당신이 내 집 문지방을 들어선다면 나는 아마 생의 최후 같은 오 분을 만나고 말거야. 나도 최후의 오 분을 셋으로 나눌까 그 이 분은 당신을 위해서 쓰고 또 이 분간은 이 지상의 운명을 위해서 쓰고 나머지 일 분간은 내 생을 뒤돌아보는 일에 쓸까 그러다가 정말 당신이 들어선다면 나는 칠성판에서라도 벌떡 일어날거야 그게 나의 마음이니까 그게 나의 희망사항이니까... 하며 왼손가락으로 편지를 쓰다가 고요의 밀.. 더보기
최승자 - 외로운 여자들은 외로운 여자들은 - 최승자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출처 :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 '외롭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말에 비해 표피적이다. 고독이란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下)〉 '호화호색장(好貨好色章)'에서 나오는 '환과고독(鰥寡孤獨)'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에 .. 더보기
고정희 - 지울 수 없는 얼굴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에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고정희 시인의 시가 자꾸만 밟히고, 자꾸만 눈에 들어오고, 자꾸만 지리산에 가고 싶은 건 내 삶이 위독한 탓이다. 산에 오르면 세상이 좁쌀만 해 보여 간이 커지고 엄지와 검지를 들어 눈 앞의 빌딩을 들어 옮기고, 지나는 버스를 막아세우고, 거리를 오가는 죄 없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본다. 산에서 .. 더보기
정현종 - 말하지 않은 슬픔이 말하지 않은 슬픔이 - 정현종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모든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 정현종 시인의 이 시는 딱 요즘 내 맘 같다. "당신은 내게 평생 말해도 다 말할 수 없을 거야."라고 오래전 그 사람은 내게 말했었지. 그 말 앞에선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말들을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대는 들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겠지만 더이상 듣지 않겠노라는 그 완강한 선언 앞에 말은 시들어버렸다. 말하지 못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사이엔 도도한 강물이 흐른다. 넘어설 수 없는... 그 앞에도 여전히 나불대는 수많은 입들이 있을 것.. 더보기
정희성 -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 '사랑'의 본령은 짝사랑이다. 나홀로 사랑한다. 설령 서로 똑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만 알 수 있기에 결국 상대의 사랑보다 자신의 사랑에 더 목매단다. 그래서 사랑은 마주보는 것일 수 없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 말해도 사랑은 어긋남이다. 일치하는 시간은 짧고, 어긋나는 시간은 길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 더보기
김경미 -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 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겠지요 * 시를 읽는 일이 쉬울 때는 마음이 가을 안개처럼 야트막하게 가라앉아 아무런 잡생각 없이 눈 앞에 시만 보일.. 더보기
윤효 - 못 못 - 윤효 가슴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 먹먹하다. 내 생의 뜨거운 부분이 걸린 못들이 수두룩하여 먹먹하다. 그 못이 너무 많아 부끄럽다. 문득 '네 생에서 가장 뜨거운 부분이 무엇이었더냐?'고 되묻게 되어 먹먹하고, 암담하고, 부.끄.럽.다. 내 생에 수두룩하게 박혀있는 이 굵은 못들은 무엇이냐고... 더보기
김선태 - 조금새끼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더보기
안현미 - 음악처럼, 비처럼 음악처럼, 비처럼 -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