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에르빈 롬멜 - "추신 : 리라는 외환 관리 규정에 따라서 환전하기 바라오."

windshoes 2010. 10. 28. 18:40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1.15~1944.10.14)
- 추신 : 리라는 외환 관리 규정에 따라서 환전하기 바라오.



사랑하는 루!


전투가 계속해서 격렬해지고 있소. 나는 그것이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소. 베른트가 총통에게 보고하기 위해 떠난다오. 그래서 내가 저축해 둔 2만 5천 리라를 그 편에 동봉하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신의 손에 달려 있소. 아들과 함께 잘 살기를 바라오. 당신과 아이에게 키스를 보내오.

당신의 에르빈


추신 : 리라는 외환 관리 규정에 따라서 환전하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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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戰史)를 통해 살펴볼 때 명장으로 이름을 남긴 장군이란 대체로 아군에겐 칭송의 대상이지만 적에겐 두려움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전쟁이 게임이나 스포츠가 아닌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쟁을 통해 피흘리는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는 병사들은 그만큼 지휘관의 능력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휘관의 능력에 따라 아군이 피흘리는 일이 그만큼 줄어들고, 적군은 많은 희생자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만큼 피아(彼我)가 명백한 상황에서 아군은 물론 적군에게조차 널리 존경받고 사랑받는 장군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도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받게 되는 평가가 아니라 전쟁 중에 혹은 전쟁의 총성이 멈추고 얼마 뒤부터 적과 아군 모두에게 높이 칭송받고, 기념되었던 장군은 아마도 '사막의 여우'란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을 제외하곤 거의 유례가 없을 것이다.

롬멜이 이처럼 널리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그가 전쟁 중에 보여준 놀라운 전술과 탁월한 리더십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1942년 초 영국 의회에 출석한 처칠 수상은 롬멜에 대해 “우리에게는 대담하고 솜씨 좋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전쟁의 재앙인 그는 그러나 장군으로서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말했다. 아군은 물론 적에게도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전술적인 측면에선 ‘사막의 여우’라 불릴 만큼 상대의 허를 찌르는 참신하고 기발한 전술기동을 선보였기 때문이지만 치열한 전투가 끝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고, 포로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하는 등 신사적 태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롬멜은 영국과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던 북아프리카 사막의 전투에서 대치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부상자가 마실 식수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자 곧바로 백기를 단 장갑차에 식수를 담아 영국군 병원으로 보냈고, 영국군 측에선 롬멜의 선의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백기를 단 지프에 와인을 실어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롬멜은 비록 나치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히틀러를 지지했고, 나치독일의 전쟁영웅이었으며 총통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던 장군이었다.

요하네스 에르빈 오이겐 롬멜은 1891년 교사였던 아버지 에르빈 롬멜과 루츠 가문 출신의 어머니 헬레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들은 엄격한 신교도였기 때문에 집안 분위기 역시 다소 엄숙한 편이었지만 롬멜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시절엔 정원이 갖춰진 집에서 나름대로 즐거운 유년기를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인으로서 그의 경력이 시작된 것은 18세가 되던 1910년 3월 바인가르텐에서 사관후보생으로 지원하면서부터였다. 롬멜은 항공산업 분야의 기술자가 되길 희망했지만 중산층 출신의 교사이자 지역사회에 제법 널리 알려진 명사였던 그의 부친은 자식이 엔지니어가 되기보다 군인이 되어 출세하길 희망했다. 그는 롬멜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되던지 군인이 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롬멜은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꿈을 접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911년 3월 단치히에 있는 군사학교를 다닐 무렵 롬멜은 한 무도회에서 당시 17세의 소녀였던 루시에 마리아 몰린(Lucie Maria Mollin)을 만난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지만 엄격한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던 루시에와 신교도였던 롬멜 사이의 로맨스는 그가 같은 해 11월, 소위로 임관하며 바인가르텐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없었다. 바인가르텐에서 장교로 임관된 롬멜은 당시 20세였던 발부르가 슈템머(Walburga Stemmer)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귀족 출신의 부잣집 딸이었다. 남편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는 경험을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가난뱅이 초급 장교와 결혼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롬멜의 부친 역시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롬멜과 발부르가는 맺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발부르가는 이미 임신 5개월의 몸이었고, 1913년 12월 롬멜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3일 만에 태어난 롬멜과 발부르가의 딸 게르트루드(Gertrude)는 혼전관계에 의해 태어난 사생아가 되었다. 군인의 길을 가야 했던 롬멜은 공식적으론 게르트루드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여러 서신과 실제 정황을 살펴보면 롬멜은 이들 모녀를 외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8월 3일,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던 날, 롬멜은 자신의 누이인 헬레네에게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만약 자신이 전사하게 되거든 '게르트루드'를 잘 부탁한다는 편지를 남겼다. 롬멜은 전쟁 중이던 1916년 11월 단치히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는 동안 첫사랑이었던 루시에 몰린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아마도 롬멜의 아내 루시에로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은 이미 혼전관계로 낳은 딸이 있었고, 그녀와 종교도 달랐기 때문에 개신교식으로 혼례를 올리자 가톨릭교회에선 그녀를 제명해버렸다. 

에르빈 롬멜이 루시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운위하는 동안 그의 딸을 낳은 발부르가 슈템머는 언젠가 롬멜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고 있었다. 롬멜과 루시에 부부 사이는 결혼한 지 12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1928년 12월 아들 만프레트(Manfred)가 태어나는 경사를 누렸다. 그러나 이 무렵 롬멜이 영영 떠나버린 것을 알고 실의에 빠진 발부르가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에게 롬멜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발부르가 슈템머가 죽자 롬멜은 어린 게르트루드를 외할머니 집에 맡겼고, 공식적으로는 롬멜의 조카딸로 남았다. 롬멜은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항상 “에르빈 삼촌으로부터”라는 서명을 사용했다.


- 만프레트, 롬멜, 루시에(1941)

롬멜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차례 회고록을 겸한 전투교본 『보병공격술』을 저술한 바 있는데 이 책은 1937년 출간되어 군 내부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롬멜은  책을 쓰는 동안 자료 부족으로 적지 않게 고생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 국경을 넘던 날부터 그날그날의 작전상황과 전장의 움직임 등을 소상하게 구술하여 부관으로 하여금 기록하도록 했다. 또 사랑하는 아내인 루시에에게도 거의 매일 편지를 쓰면서 당시의 전황과 자신이 느낀 감정 등을 소상하게 적어 보냈는데 그의 아내는 롬멜이 보낸 편지를 1,000여 통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할 때까지 자신이 비밀리에 기록한 여러 문건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아내 루시에가 대신하고 있었다.

비록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장군이었지만 롬멜의 말년이 그리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종횡무진으로 누볐던 아프리카 전선에서 자신을 믿고 신뢰하던 병사들을 버려두고 탈출해야 했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높이 평가했던 총통 히틀러를 암살하는 음모에 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롬멜이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게 된 계기에 대해 명확하지 않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 이후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추론이다. 이 무렵 히틀러는 전쟁 초반의 행운과 결합하며 보여주었던 놀라운 직관력을 상실(?) 혹은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과신하였고, 자기 주변의 장군들이 모두 자신의 명령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의심했다.

그는 전략적 후퇴는 물론 전술적 후퇴마저도 반역행위로 규정하는 등 전쟁의 광기와 망상에 사로잡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사령관이었던 파울루스 장군은 히틀러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독일 6군단 병사들을 소련군의 포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전멸에 가까운 궤멸 상태로 몰아갔지만 롬멜은 히틀러의 후퇴 불가 명령에 저항하여 자신의 병사들을 후퇴시켜 전멸을 모면하게 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롬멜에게 불같이 화를 냈으나 그를 처형하는 대신 노르망디와 칼레 지역에 있을지 모를 연합군의 유럽진공작전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긴다. 이 시점에서 롬멜은 히틀러의 존재가 독일의 미래에 커다란 장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때마침 접근해온 저항 세력에 동조하기로 한다. 만약 이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전쟁은 아마 더 일찍 종료되었을 것이고, 이후의 전투로 인해 희생된 수백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히틀러는 전쟁 영웅으로 자신이 구축한 거대한 전쟁시스템의 중요한 상징을 특별법정에 세우는 대신 명예로운 자결을 권했다. 1944년 10월 14일 롬멜은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해 자살을 선택한다.

전후 적군이었던 영국이나 미국으로부터도 위대한 ‘참 군인’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진정한 배경 중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본격화된 동서 냉전으로 인해 서독의 재무장이 추진되었고, 서독의 재무장을 염려하는 국가들과 서독 내부의 여론을 호의적으로 조성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멜, 그 자신이 군인으로서 비록 전쟁 초기에 히틀러를 추종했지만 나치당의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른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무모한 전투에서 죽도록 버려두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리라는 외환 관리 규정에 따라서 환전하기 바라오.”라는 롬멜이 전장에서 사랑하는 아내 루시에에게 보낸 편지를 읽노라면 그가 사적인 이익 앞에서도 얼마나 원칙에 충실한 군인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 공직자들이 진정으로 가슴에 새겨 둘 만한 구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