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인문학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 책: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들녘(2003)

windshoes 2010. 11. 9. 09:24

책  -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ㅣ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3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지음, 조우호 옮김 / 들녘(코기토) / 2003년 10월

 

"책이 책을 말하다" 책에 관한 책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책에 관한 책들을 분류해보자면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책에 대한 책들이란 대개 책을 만드는 것에 대한 책, 책을 둘러싸고 있는 저자들에 대한 책, 아니면 책 그 자체에 대한 책을 말할 것이다. 책이란 게 대관절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대하는가? 아마 책은 세상 그 자체일 것이다. 누구나 인생은 한 번 만 산다. 천 번을 다시 태어나는 고양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전의 기억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만큼 그 고양이도 단 한 번의 일생을 사는 것과 진배없다. 만년을 사는 흡혈귀라도 그 기억이 이어지는 동안만 살아있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세계 안에 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세계-내-존재(In der welt sein)"라고 말한다.

 

어떤 인간도 그가 경험하고 익히고 배운 세상 속에 존재한다. 종종 나는 왜 누구의 자식으로, 나는 왜 이 나라에, 나는 왜 이 시간에 태어났는가를 후회한다. 그러나 위의 반문들은 의미가 없다. 지금 이대로의 나는 지금 이대로의 시공간 속에서만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시공간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그 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란 천재 역시 르네상스의 그 시기에서만 의미를 얻으며, 단테도 그 시공간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한 생명 개체로서 단테의 시간, 다빈치의 시간은 오래전에 끝났으나 그들이 남겨 논 유산은 책이라는 물건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불멸을 얻는다는 의미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곧 누군가가 속해있는 세상의 끝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상으로 초월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출판사에서 기획한 것인지, 아니면 이 책의 편집부에서 내보낸 보도자료를 따른 것인지 이 책의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은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인문학 서적으론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책 "교양"의 두 번째 권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데, "교양"의 저자인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이 책의 '추천의 말'을 썼고,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티아네 취른트"가 저자의 글에서 다시 "디트리히 슈바니츠"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 것으로 보아서 진위 여부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책이 "교양"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을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는데, 그 때 무슨 까닭에서인지 - 아마도 그가 말하는 교양이란 것이 철저히 서양적인 의미에서의 교양이었던 탓에 - 점수를 매우 박하게 주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다시 읽고 평점을 매긴다고 생각하면 너무 박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교양"에 점수를 박하게 준 것에 대해서는 별로 후회가 없고, 이 책 "책 -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에 대해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두 책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길래 나는 앞서의 책에는 박한 점수를 주고, 이 책에는 후한 점수를 주려는 걸까?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티아네 취른트는 1965년생으로 독일에서 영문학, 예술사, 독문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일단 영문학과 독문학을 공부하고, 거기에 예술사를 전공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만약 이 책이 서양의 독서(교양)에 대한 체계를 잡기 위한 것이라면 일단 저자의 예술사 전공은 점수를 얻을 법한 대목이다. 게다가 이 책의 부제가 일견 교만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이란 표현 역시 나로서는 점수를 깍고 싶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점수를 깍기는 커녕 수긍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부제가 지닌 역설을 긍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란 곧 "책"을 수식하는 말이 된다. 이 책은 세상을 양적으로 알려주려고 덤비는 책이 아니며, 이 책의 저자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지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 겸손하게 써내려간다. 책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디딤돌이고, 그런 디딤돌 중에서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법한 책들이 있는 법이다.

 

취른트는 "세계, 사랑, 정치, 성, 경제, 여성, 문명, 정신, 셰익스피어, 현대, 통속소설, 컬트문학, 유토피아 : 사이버 세계, 학교 고전, 아동도서" 등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책들을 소개한다. 이 14개의 항목은 백과사전식의 구분법도 아니고, 도서관식 구분법도 아닌, 취른트만의 구분법이다. 이 14개의 항목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게다가 저자 소개에 따르면 취른트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이미 한 권의 책을 쓴 적이 있다. 즉,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책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개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저자라면 하나로 묶었을 법한 성과 여성이 각기 다른 별도의 장에서 다뤄지고, 학교 고전과 아동도서가 우리가(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모든 것 안에 포함된다. 이 책은 지극히 사적인 책 읽기에 대한 책이며, 동시에 매우 문학적으로 쓰인 책이다.

 

취른트의 이 책은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 "교양"과 달리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여러 권의 책을 다루면서 쉽게 빠지게 되는 유혹 -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해보고자 하는 - 으로부터 자유롭게 쓰였다. 이 책을 읽으며 하나의 체계를 상상하기 쉽지만 이 책은 그런 류의 것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사적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이 책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읽어나갔는지 함께 따라가볼 수 있는 경험을 준다. 이 책은 보편적인 고전을 다루고 있으나 그것을 분석하여 우리 앞에 제시하는 방식은 취른트만의 것이 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에 내가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다.

 

취른트가 "사랑"편에 다루고 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자. 저자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실제로 사랑했을까?"라는 첫 문장 이후 취른트는 수백년 동안 서양의 시인과 예술가, 작곡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이 이야기가 어째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쉽사리 이해되기 어려운지 설명해준다. "사람들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여기서 묘사된 격정과 사랑에 대한 관념이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사랑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고통이고 포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이 두 사람은 구태여 정절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동안에도 정절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이다. 왜 이 두 사람은 숲에서 사는 동안 구태여 남편의 검을 그들의 침대 사이에 두고 고통 속에 번민하면서도 정절을 유지한 것일까?

 

취른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들의 사랑은 고통이며, 그 사랑은 수동적으로 참는 행위로 죽음과 흡사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죽음도 고통이고,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행위란 점에서 그렇다. 우리는 죽음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이 찾아오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사랑의 미약은 그것이 운명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미약을 먹듯, 불시에 찾아드는 사랑을 거부할 수 없다. 사랑이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경험하는 어떤 것이다. 스스로는 책임질 수 없는.... 취른트의 책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 그렇다. 이렇게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취른트는 이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타이타닉"을 통해 다시 읽어낸다. 그것은 고전이 어떻게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이면서 책에 관한 책이 아니다. 책이 곧 세상이란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책보다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종종 책에 관한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주눅들게 된다. 어떤 책들은 - 서구의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 우리나라에 미처 번역되지 않은 책이거나 번역된 책이라 할지라도 막상 읽으려고 하다보면 책 자체의 묵직함에 질려버리거나 이것도 오늘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취른트가 소개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일부도 예외없이 그런 한계 속에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책들을 미처 읽지 못했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데 어렵거나 조바심 칠만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 책은 그런 책들을 설사 읽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읽어내는데 거의 전혀라고 할 만큼 지장을 주지 않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읽어보았으나 이 책만큼 훌륭하게 그 임무를 다한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풍부한 사례들과 전문적이기 때문에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식견, 그리고 그것을 잘 엮어낼 수 있는 문장, 다방면으로 넓은 이야기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깊이를 잃지 않는 전문성 등을 이 책은 고르게 갖추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대해서 만큼은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고전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으나 아낌없이 별 다섯을 줄 수 있다. 어느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읽어낸 세상에 대해 자신만의 시각을 곁들여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나는 아낌없는 경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이 언급하고 있는 책 제목에 미리 주눅만 들지 않는다면 서양 문화와 교양에 대한 대단히 훌륭한 에세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