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 박용숙, 예경(2003)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 박용숙, 예경(2003)
가끔 독자를 압도하는 느낌의 책이 있다. 이 책의 전체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현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대가 위치한 지점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더 이야기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현재로 다가올수록 비평은 비평이기 이전에 일종의 예언서가 되어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미술사 이야기>의 속편격이다. <한국미술사 이야기>가 선사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는 한국미술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이후부터 당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 이야기를 다룬다.
이 책의 저자 박용숙 교수의 글을 예전에 읽어 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에겐 낯선 인물이란 것이다. 나는 웬만하면 독후감에 그것도 국내 저자의 학력을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경우엔 저자에 대해 무척 궁금해졌다. 그는 중앙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동덕여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활동하는 미술평론가이다. 1935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70세이다. 거기까지 알아보고 난 뒤 난 입이 쩌억 벌어졌다. 세상에나.... 나는 저자가 무척이나 젊은 사람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뒤에야 나는 이 책이 어째서 날 그토록 압도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책(문학작품을 제외한)은 저자의 말이 매우 중요하고, 그 책의 모든 것이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것은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의도, 그리고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는지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의 말이 목차나, 추천의 글 따위가 주는 것보다 그 책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책 머리에>란 글을 통해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이 책의 중요한 입장들을 설명해주고 있고, 책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양화 소묘>란 글을 통해 미술비평가로 등단한다. 이후 30여년간 미술평론가로 활동했으나 비평집 한 권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살펴보더라도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 박 선생의 그간의 비평 글들을 읽어보니 본인이 말한 것처럼 "무능과 치부"를 드러내 그것을 부끄러워 해야 할 성질의 비평,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겸양일까? 박 선생의 말씀은 이렇다. "우리 미술의 궁핍한 자화상을 드러낸다는 생각에 더욱 곤궁스러울 뿐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우리 현대미술 100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한 세기 동안 고민하면서 쌓아올린 현대 미술의 열매를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함께 담아내려고 했으니 고민스럽지 않겠는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문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문화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조직이며, 한 인간의 내적 자기에 대한 훈련이고, 한 인간의 인격에 대한 통제이며, 보다 높은 수준의 자각의 획득이다." 한국 사회의 근대성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우리들 자신의 불구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동양의 얼굴을 하고 서양의 옷을 걸쳐 입은 광대의 어설픈 모사라는 '동양적인 것에 대한 슬픔'에 대해서 말이다. 한국은 중국과는 또다르다. 우리는 한 줄의 비평을 쓰기 위해 한국의 고전은 물론 중국의 고전까지 거슬러가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히도 제대로 공부하자면 그 방법밖에 없다. 저자는 "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서구 인문학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뼈저린 고백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미술사가가아니라 미술평론가이다. 미술평론은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고, 미술사는 이 개별적인 작가와 작품을 통해 한 시대를 엮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작업을 "십자가의 고난"에 비견한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어려운 작업에 대해 이 책의 옷고름을 처음 벗겨내는 순간, 이 책의 저자가 매우 훌륭하게 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모두 열여덟가지의 이야기로 꾸려져 있다. 그중 첫번째 이야기인 '출발을 위한 화두'는 이 책 전체의 구성을 압도할 정도로 잘 쓰인 글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서두 부분인 이 글에서 저자는 우리의 미술과 서양 미술의 본질적인 차이를 밝혀내고 있다. 단원의 그림일지 모르는 맹견도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를 분석하는 이 글에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과 같이 기하학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이도 눈앞에 있는 이 사물을 실감나게 그릴 수가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중략...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단지 개 한 마리를 사진 찍듯이 묘사한 것에 불과한 이 그림은, 그러나 18세기 동양문명권에서는 자연과학과 부국강병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어머니의 욕망과 자본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였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작자미상의 작품 <맹견도(猛犬圖)>, 국립중앙박물관
- 종이 바탕에 먹과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엎드려 있는 개의 자세는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다. 짧은 필치와 채색으로 처리된 털은 개의 근육과 관절의 구조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대상의 입체감을 살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과 마루 바닥 묘사에서 사용된 명암법과 투시법은 서양화의 표현 기법으로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이 성취한 것은 단순히 한국 현대 미술 100년사를 정리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 그 중에서 한국이란 한 사회가 서양의 그림, 미술, 사회를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함께 분석해준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그간 한국미술사를 서술하고, 정리해주는 책은 많이 있었으나 그것을 하나의 관점에 따라 서술하고 정리하여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출판된 가장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람시의 말대로 "한 인간의 내적 자기에 대한 훈련이고, 한 인간의 인격에 대한 통제이며, 보다 높은 수준의 자각의 획득"으로서의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시선을 얻었다. 게다가 저자는 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에 대한 새로운 저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책 머리에'에 밝히고 있기까지 하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박 선생의 이런 노력에 존경의 마음을 보내며 박용숙 선생이 새로운 저술을 집필할 수 있을 만한 여유와 건강이 허락되길 바란다. 이 글을 얼핏 읽는 사람은 박용숙 선생의 이 책에 대해 지나친 용비어천가를 보낸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책을 들고 읽어보면 이것이 괜한 허언이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