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시공사(2002)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 이석우 지음/ 시공사/ 2002년
이 책에는 "역사학자 이석우의 명화 속 역사 찾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에 걸맞게 책의 시작 역시 원시 시대 라스코 동굴 벽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 모더니티와 끝 부분에 부록처럼 이석우 자신의 개인사적인 미술편력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간 <국민일보>에 연재되던 '이석우의 역사가 있는 미술'에 수록되었던 글을 보충하고 끝에 자신의 에세이를 첨가하는 것으로 한 권의 책이 완결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장점부터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은 그간 우리 인문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주전공 분야와는 관련없다고도 할 수 있는 미술 분야의 여러 좋은 책들을 상재해두고 있는 분이다. 그는 특히 우리 미술에 대해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가나아트에서 지난 1990년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 미술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소나무에서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상,하권)"을 통해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가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곰브리치, 부르크하르트 등도 역시 역사학자인 동시에 화가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인 보들레르가 뛰어난 미술평론가였음을 기억해야 하고, 아도르노가 음악 이론가였음을, 발터 벤야민이 영화에 대해,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아놀드 하우저가 20세기의 예술사에 대한 통사를 기록했었음을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학문간, 학제간의 상호 교류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무식하다.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인간이란 생물에 대한 학문일진데 연계 학문간의 교류 없는 인문학이란 것이 결국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아닌가? 나는 역사학자 이석우 선생의 이런 시도들이 우리 사회의 인문학자들에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가르침이고, 더불어 우리 사회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품격높은 축복이 될 것임을 믿는다.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이 책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지은이 이석우 선생은 "그림은 곧 역사이고, 모든 그림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처음 출발점이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앞서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역사의 모든 부분을 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더라도 이 책은 역사의 몇몇 국면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첫째 이 책이 서양사 중심이라는 것, 둘째는 책 전체에서 분량면으로나, 내용면으로 러시아 혁명과 그 여파에 대한 부분은 사실상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석우 선생의 전공이 서양중세사라는 점을 고려하고, 이 책이 역사서라거나 미술사적인 연구서적이라기 보다는 미술작품을 통해 본 역사 에세이적인 입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형평성의 문제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런 아쉬움들을 뒤로 하고 이 책은 많은 난관을 뚫고 훌륭한 성취를 거두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미술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므로 거기에는 역사가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그림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를 담고 있으며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 그림에 얽힌 사연과 그것을 그린 작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시대 미술의 특징을, 역사와 미술이라는 두 입을 통해 동시에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의도는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나 성공적으로 이룩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역사와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전문 분야를 한데 아울러 어우러지도록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두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더불어 문학적인 감수성이 요구되는 것인데, 이석우 선생은 이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수월하게 봉합해낸다. 앞으로 이런 시도들이 우리 인문학계에서 잦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