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windshoes 2010. 12. 3. 13:53


오늘(2008. 1.17.) 망명지를 살펴보니 1,634,035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카운터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처음 홈페이지를 만든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제 이야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인터넷 공간에 작으나마 사람들과 소통할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던 건 지난 2000년 8월 1일의 일이었으니까, 햇수로는 올해가 9년, 다가오는 8월이면 만 8주년이 됩니다. 홈페이지 이름이 왜 하필이면 ‘망명지’일까? 때로는 스스로에게 반문합니다.


뭔가 대단한 고민이 있었다기 보다 점점 새로운 해몽을 저의 꿈에 덧대어갔던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꿈보다 해몽이었던 거죠. 아니면 최인훈 선생이 어디선가 들려주었던 말이 오래도록 제 뇌리에 남았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오래전 일이라 어쩌면 저 혼자만의 기억이 최인훈 선생을 들먹이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는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달리 망명을 할 수가 없어서 불행하다’는 말이 저는 이 땅의 숨막히는 현실, 분단의 현실, 상상의 한계를 미리 규정지어 버리게 만든 답답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그만해둬.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아!

말은 삼천리 화려강산이라지만 반 토막 난 땅에 살다보니 어딜 가나 늘 고추장, 된장에 쌀밥, 김치를 먹고, 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탓에 몇몇 사투리의 단어 뜻을 몰라서 그렇지 서로 못 알아 듣는 말이 없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근대화 이후 일일생활권이 된 덕분으로 전국 어디든 하루면 왕복할 수 있는 땅에 살고 있습니다. 망명은커녕 숨어서 못된 짓 한 번 하기도 어려운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조국입니다. 그런 탓인지 가끔 민족애(民族愛)의 발로와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휴전선이 답답하고, 갑갑해지곤 합니다.

기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밑도 끝도 없이 먼 이역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 살다보면 실제로 하기는 어려워도 계획조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실, 휴전선은 땅만 분단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상상 속에도 이미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오곤 합니다. 조국을 떠나기 위해 우리는 섬나라 사람들처럼 배 아니면 비행기를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이죠. 가도 가도 첩첩산중인 개마고원의 깊은 품에서 쌓인 눈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잔가지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하얗게 지새워 보고 싶지만 이미 마음으로부터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단일민족의 신화는 구성원들의 실제 혈연적 구성이나 유전적인 측면에선 사실이 아니라도 문화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족은 때때로 남이 보지만 않는다면 가져다 버리고 싶은 족쇄가 되기도 하고, 한 번의 입시로 결정되는 학교라는 이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평생 동안 발목을 잡는 굴레가 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사회라는 거대한 매트릭스(네트워크)의 하부 구조 중 하나로 ‘나’라는 존재의 위치를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규정짓는 틀이 되곤 합니다. ‘나’는 문화라는 거대한 매트릭스 속에서 한 번도 나 아닌 다른 존재, 아니 진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고민해볼 틈도 없이 족보에 기록되고, 학적부에 기록되고, 주민등록부에 기록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문화망명지라는 거창한 이름, 문화와 망명의 개념을 결합시키면서 나는 타락하지 않겠노라. 이곳에서 나의 깃발을 올리고 타협하지 않는 마음으로 홀로 비장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결심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바람구두'라는 익명의 페르소나 뒤에 숨지 않으면 안될 만큼 나약한 한 인간이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쓸쓸함과 변해버린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씁쓸함을 담아 누군가 나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들에게 보내던 유리병편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에 띄어 보냈던 무수한 유리병편지들은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응답을 받았고, 때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한 인연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제 멋대로 무수한 인연의 가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의 근원을 더듬어가며 우주의 끝으로 갔던 우주비행사가 마지막에 만난 것은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우주를 만들어냈던 컴퓨터와 대면하게 되는 SF만화의 허무한 엔딩 장면처럼 어쩌면 “문화망명지”의 끝은 허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나 스스로가 허무한 걸지도...

20년 전 그날, 20년 후 오늘

당신이 먼 이역으로 떠난다 하니 무심결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망명지를 만들게 된 것은 물론 제 자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망명지는 네덜란드의 작은 이층집 다락에 아지트를 만들었던 안네 프랑크의 사랑스런 일기장 ‘키티’처럼 제게도 그런 공간 하나가 필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 저는 마치 살아있는 좀비처럼 온몸이 썩어가는 듯 불쾌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87년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어떤 인연으로 당시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너무 구구한 사연이 될 듯합니다. 다만, 1987년 12월 명동성당이란 시대의 막간극 무대에 저도 잠시 편승했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를 밝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50여개 학교, 2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 중 일부만이 기억하는 ‘서고련’의 명동성당 시위였습니다.

일제 치하부터 해방 이후 면면히 이어지던 고등학생 운동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역사의 물꼬를 트는 주요한 흐름 중 하나였으나 유신과 전두환 독재 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그 맥이 완전히 끊겨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치열한 입시교육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 진학과 입신양명을 위한 입시기계로 전락해버렸던 시대였지요. 올해는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만 20년이 되는 시점이라 여러 매체들이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사화했습니다. 저도 몇몇 언론을 통해 그 당사자가 되기도 했지요.

조세희 선생은 1987년 12월 대선의 그 날을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고, 선이 악에게 패배한 날’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 시작되었습니다. 만 17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당시의 저는 그 날의 충격과 비참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국민의 다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치인들, 운동세력은 독재의 문민화를 전복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독재의 문민화 전략이 먹혀들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명망 높았던 운동가들은 속속 전향 선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력은 제도권에서 자신의 입지를 쌓는 업적으로 변신되었습니다. 지역주의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과거 독재 권력에 뿌리를 둔 정당에 투신해 새로운 지배 권력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동시에 전향의 역사이고,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제게 그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저 자신의 삶마저도 굴절시킬 만큼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거의 10여 년 간 냉소와 자기비하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았습니다.

20년 전, 그 날의 나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 혹은 대학생 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출세와 성공이라는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5.18광주’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테러를 가했던 ‘5.18광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본질과 우리 앞에 민주주의의 얼굴로 미소 짓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고, ‘5.18광주’의 진실을 접했던 우리들은 시대와 양심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 청년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명동성당 시위를 마무리 짓는 비참한 현장에서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과 안위를 떨치고 일어나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거나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싸움은 내가 평생을 전력투구한다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란 깨우침이었습니다. 저는 진보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당대의 현실을 고민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보는 언제나 현실을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녔던 가장 강한 매력은 계급착취가 없고,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대접받고, 존재하는 인간해방의 평등세상이란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했습니다. 그것도 마치 역사의 법칙처럼 부르주아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한 뒤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엄밀한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진실이 지닌 거의 유일한 딜레마는 진실이 진실로 존재할 때, 나머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진실 앞에서 종종 저는 그 같은 딜레마를 경험합니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그 원인은 진실이지만 그 진실이 진실로 존재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것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20세기는 러시아혁명이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체제를 실험하고, 결과적으로 그 실험이 실패함으로써 끝났습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인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면서 이를 극복할 만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떠밀려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가능하지만, 그 대안이 사회주의 혹은 좌파적 사유 밖에 없느냔 질문에 우리들은 아직까지 적절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담론의 위기’입니다.

그 대안을 마련하기까지 우리는 매우 오랜 세월, 어쩌면 20세기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었던 석유가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지옥 같은 고통을 맛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건국 당시부터 미국이 심어놓은 DNA에 따라 미국이 만들어낸 세계체제에 편승해 지금까지 먹고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미국을 애지중지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히 과거의 혈맹이기 때문이라는 ‘의리론’에 입각해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에 협조하면서 이득을 얻는 작은 제후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은 때때로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작게는 대한민국의 보수우경화를 걱정해야 하지만 크게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미래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가 오늘날 진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품어야 할 고민은 근본적입니다. 너무 거창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좌절이라면 좌절이었을 법한 그 경험 이후 97년까지 10년여를 방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었고, 다시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3년여를 보내다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 무렵의 제가 스스로 대단히 불행하다거나 불운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연애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대해 받았던 느낌은 오래도록 민감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 배신감에 저는 세상을 향해 실천 없는 냉소만을 보냈습니다.

작업장 마당에서 바라 본 작은 하늘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저는 그날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습니다. 20년 전의 고등학생 무렵 여드름이 송송 맺혔던 시절 만났던 친구들을 20년 만에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20년 전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란 결사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고, 거리를 뛰어다니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함께 했던 마지막 날, 농성해산을 결정하면서 들었던 비참함이 워낙 컸던 탓인지 우리들은 2007년의 대통령 선거를 자못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의 제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할 만큼 ‘그날의 기억'들은 현재까지도 제 삶의 중요한 자양분이자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고 있는 탓이었겠지요.

80년대 초반 어느 운동권 학생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이 말이 지극히 오만한 표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강제 해직당한 뒤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삼성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썼다는 편지글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학교 운동장에 대기하고 있던 삼성 버스를 타고 공장기숙사로 직행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내딛은 첫 걸음은 그대로 학교의 연장이었습니다.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통과되고 법률이 실제로 적용되면서  강제 해직당한 이 분은 고교를 졸업한 18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면서 회사와 집, 집과 회사를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고 말합니다. 김진숙 선생의 『소금꽃나무』란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당신이 일했던 시절엔 숙련공이 아니어도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완장 하나 채워주고 관리자 보조로 다른 노동자를 감독하는 일을 시키면서 노동자 사이에도 벽이 만들어지도록 했다고 합니다.

막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선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진학한 셈입니다. 관리자들은 종종 부모인 양, 교사인 양 마치 학생들 다루듯 이들을 훈육했다고 합니다. 볼 일이 있어도 잔업 때문에, 할당량 때문에 쉴 수가 없었고, 자기 맘대로 하루 쉬었다고 해서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닦도록 하거나 일을 시키지 않고 남들 일하는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세워두는 것처럼 부당한 처우와 인격모독을 당할 때도 이들은 스스로 항의해볼 생각을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체념 속에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실제 직장 속에서 경험하듯 말입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요.

이 분을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분의 편지를 읽고 난 뒤 저는 돌아가신 제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나중에 간신히 한글을 떼셨지만 평생 동안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외증조부, 당신의 부모님을 원망하셨습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끔 저는 할머니의 하늘이 꼭 저만 하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우물 속 하늘을 보고 있을 테지요. 아마도 18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내 공장에서 살아야 했던 그 분에겐 공장 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 당신이 알 수 있는 하늘의 전부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 할머니에게 조국이란 과연 슬퍼할 만한 대상이었을까, 조국을 위해 노여워해야 할 무엇이었을까?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되돌릴 수 없는 민주주의, 그러나 소외된 민주주의

저는 노동자의 노동자 정체성 문제는 나중으로 하고, 민주화 20년 동안 진행된 민주주의로부터도 그들이 얼마나 멀리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언제나 과로 체제에 시달리며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고 쫓기는 이들이라서 이들이 바보 멍청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누린 민주화, 민주주의의 진실한 결과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슬프게도 지난 80년대로부터 시작된 민주화는 아직까지 일상의 차원, 문화의 차원까지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좀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의 과실을 얻어냈고, 우리들 역시 그 수혜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해외펀드에 투자하고, 융자를 끼고 아파트를 구입했고, CMA통장에 월급을 넣어놓고 어떻게 하면 주식 재테크에 성공하여 보다 나은 중산층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 고민합니다. 모든 투쟁은 그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누구도 대신 싸워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아니지만, 청년 세대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잔을 받고 있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패러다임은 결국 우리 앞에도 쓴 잔을 내려놓을 겁니다.

선거가 있던 날,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이 투표를 했느냐고 묻더군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의 개별적인 사안은 구구절절이 진보적인 대안을 찾고, 진보적인 성향의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결론은 이명박에게 투표했단 것이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우리 국민의 절반 이상이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투표결과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지요. 지금 대한민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이 결과,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은 듯 미소 짓고 있는 이 결과는 결국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사람들,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예전에 했던 소리를 내가 이 나이 먹고도 또 해야 하나?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아니고, 앵벌이도 아닌데 사람들에게 이 체제가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말하기도 귀찮고, 현재의 내 삶이 그럭저럭 살만하고,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가 아닌데 뭐? 다시 말해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걸 하며 안주해온 결과란 말입니다. 더 많은 걸 누릴 기회를 얻었던, 이 말은 위만 올려다보지 말고, 밑도 한 번 내려다보란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일상의 차원,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만들어서 모두가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 수 있도록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되는 단계까지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말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아마 그 해 여름도 올해만큼 더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인터넷이란 망망대해에 띄울 때, 아마도 제가 만든 홈페이지는 익명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모래톱 정도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이제 나름의 시간이 흘러 태풍과 홍수, 범람과 가뭄의 7년 세월을 보내며 “문화망명지”는 익명의 바다에서 모여든 작은 산호와 모래알과 물고기와 이름 모를 2,500여 씨앗들이 날아와 섬이 되었습니다.

처음 홈페이지를 시작할 무렵의 저는 이제 막 결혼을 했고, 갓 서른이 된 이십대의 젊음과 십대 시절을 통과하며 온몸에 맺혔던 고통의 기억들이 생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곳에서조차 저는 종종 사막 한 복판에서 홀로 모래바람에 맞서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했다는 걸 고백하렵니다. 사람으로 나서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믿음을 배신하도록 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니까,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의 부류에서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거 너무 잘 아니까. 힘이 드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런 저의 쓸쓸함은 인간은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 신념이 소년의 신기루처럼 허망한 유토피아였다는 깨달음, 80년대의 해방적 기획들 속에서 잠시 형성되었던 공동체의 따뜻함조차 알고 보면 거품처럼 얄팍한 것이었다는 서글픈 기억들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고, 행복했으며 무엇보다 따뜻했었다는 일종의 향수병 같은 것에서 연유한 것일지도…. 하지만 그 시절이 아무리 좋았다한들 삶은 좋았던 한 시절의 기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시절의 기억이 과연 깊어가는 겨울밤 어린 아이들에게 군밤을 구워주며 그때는 모두의 인심이 넉넉하고 자유로웠던 태평성대였다고 회고할 수도 없었겠지요.

새로운 절망 없이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없다고 짐짓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누군가와 술 한 잔을 나눌 때, 나는 내 말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쁜 현재 없이는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가 정말 나은 미래일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든 홈페이지의 이름이 “문화망명지”인 까닭은 근대 이후, 신(神)이 없어진 시대 이후,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성의 신, 과학의 신, 역사의 신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오늘날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현실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현재의 체제를 극복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거기에 도달할 방도가 저라고 해서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다른 세상을 상상해보는 일 이외에 무엇을 또 할 수 있을까?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사랑하는 일이 분명 허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와 같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었던 시대가 지금이 처음은 아니란 겁니다. 같은 의미에서 서구의 중세 기독교 사회야말로 내부와 외부, 인간의 삶과 죽음까지 모두를 기독교라는 거대한 문명체계가 장악했던 시대입니다. 중세의 인간들은 탄생부터 삶과 죽음 그리고 이후의 세계까지 모두를 기독교라는 거대한 문화체계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 속에서도 인간은 다른 세상을 상상했고, 중세시대의 이단자들은 그와 같은 문화망명을 단행했던 이들이겠죠.

만약 제게 어떤 창조성이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서로 소통을 희망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을 7년 동안 한결같이 지속해온 성실성일 겁니다. 하지만 제게 숨겨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누군가와 더불어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기뻐하고 싶다는 결핍의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절망하면서도 다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결국 희망을 건다는 의미이겠지요. 그것이 아마도 모든 창조자의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저에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짓을 왜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사랑하는 일마저 멈춘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고 시시한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것, 어차피 사람은 그 정도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