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 - 이광주 | 한길아트(2001)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 - 이광주 | 한길아트(2001)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을 읽었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책에 대한 없던 애정이 샘솟거나 서재를 좀더 잘 꾸리게 되진 않을 게다. 지난 2004년 국민 1인당 독서량 6권 내외였다고 한다. 최악의 경기침체니, 불황이니 떠들 때마다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게 되는 곳이 출판사들인 걸 생각해보면, 지난 해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실제로 몇몇 메이저 출판사들은 나름대로 매출 증대에 성공했다고 들었다). 이광주 선생의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은 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교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광주 선생 자신이 "대학사"라는 뛰어난 저작을 남긴 학자이면서 또한 책에 관한 문필가로서 명성을 남긴 인물인 만큼 이 책에 대한 기대는 남달랐다. 하지만 나는 지난 2001년에 나온 책을 최근에야 읽었다.
그 이유는 일단 게으름 때문이고, 두 번째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책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를 읽고 다소 실망한 기억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 전체가 날 실망시켰다기 보다는 이 책의 헤드 카피인 양 쓰인 문장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성 마르코 광장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그리고 플로리안은 그 광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이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모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셈이다."가 나의 변방 의식을 부추기며 독서를 방해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문장을 약간 비꼬아보면 "네가 우리 반에서 수학 성적이 꼴찌야. 그런데 우리 반이 전교에서 꼴찌거든. 그런데 우리 학교가 우리 도에서 꼴찌야. 그런데 우리 도가 우리나라에서 꼴찌 했거든. 우리나라가 세계 수학 경시대회에서 꼴찌 했어. 그래서 너는 세계 꼴찌야."가 된다. 나로서는 카페 플로리안의 저 문장이 책을 읽는 내내 목에 가시처럼 걸려서 불편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광주 선생의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을 읽는데 다소 시일이 걸리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이광주 선생의 서구 편향은 계속된다. 그렇다고 이광주 선생의 서구 지향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는 서구 지성사를 중심으로 유럽 문화 전반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해온 노(老) 역사학자이다. 당신의 교양과 학식에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겠나. 이 책에서 서양이 그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당연한 귀결이다. 당신의 전공이 서양인 것이고, 어떤 책이든 책이란 그 사람 자신과 그의 관심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약간의 불만을 끝으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은 제목 만큼이나 잘 된 책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매우 흡족하게 읽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책 자체의 만듦새를 놓고 따져도 그렇고, 내용은 두말할 것 없이 잘 된 책이다. 책의 만듦새면에서 구조를 이야기할 때, 이 책은 하드커버(총양장본)에 해당하는 FM격으로 제작되었다. 머리띠(꽃천), 배, 면지놀이, 헛장, 덮개, 책테, 가름끈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으며, 올컬러 4도인쇄에, 용지는 아마도 하이크림계열의 용지를 사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대개 이런 용지는 미술서적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데 그 까닭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볼만한 도판들을 돋보이게 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의 주제 자체가 책에 대한 헌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한다. 4X6판형 하드커버 책들을 보는 일이 요새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17,000원이나 하는 책이 문고본 판형이랄 수 있는 4X6판인 건 요근래에 와서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어찌되었든 이만하면 이 책 값이 어째서 17,000원이나 하는지 약간의 설명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만한 대접을 받을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이 책이 책에 대한 헌사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은 여러 군데에서 등장하지만 그 중 가장 압축적인 대목 한 곳을 고르라면 말라르메의 시 구절 "결국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대목일 텐데 그 상징적인 의미는 둘째로 하고라도 과연 책을 사랑하는 이라면 한 번쯤 젖어봄직한 시구가 아닌가? 이광주 선생은 주로 서구 유럽의 책 이야기로 꾸려나가고 있는데, 당신의 전공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긴 하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의 독서는 모두 묵독이었다는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중세의 책읽기는 모두 소리내 읽는 음독이었고, 묵독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비쳐졌다. 묵독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2, 13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은 서구 중세와 근세, 근대와 현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책의 롤러코스터, 책의 향연을 만끽하도록 해준다.
그야말로 독서인들의 독서 취미로부터, 책 자체에 정성을 들인 애서가들, 장서가들의 이야기에 이르기 까지 말이다. 그들 가운데는 고상한 책벌레로부터 그야말로 엽기적인 책벌레까지 다양한 독서편력과 장서수집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15세기의 어느 독일 귀족은 그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상당수는 훔치고, 강제로 빼앗은 것임을 고백하고 있으며, 어떤 신부는 성직자의 신분으로 책에 미친 나머지 고서점을 열어 진귀한 희귀본들을 탐내어 여러 소장가들을 살해하여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 역시 책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느낌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독서의 핵심은 몽테뉴의 독서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매일 많은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산다. 그런데 그들의 학식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의 사람됨을 알고 싶을 뿐이다." 몽테뉴는 삶과 동떨어진 사유나 학식을 모두 '거짓 학문'으로 비웃었다고 하는데,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전설적인 명성을 지녔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영혼의 치유소"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니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영혼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모양이다.
평생을 두고 벗 삼을 수 있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이 있다면 당신의 영혼은 이제 절반쯤은 구원받은 것이라고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