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예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장소현 | 열화당(2000)

windshoes 2011. 1. 4. 14:56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열화당미술문고 213』 - 장소현 | 열화당(200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잔느 에퓌테른느


굳이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고, 전세계적인 분위기이긴 하지만 미술 사조상 특정한 화풍에 대한 선호도로 따지자면 단연 '인상주의'풍의 그림들이 사랑받는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인상주의 화풍에 속하지 않음에도 인상주의 화가들 못지 않은 사랑을 받는다. 1884년 7월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의 리보르노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수없이 복제된다. 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자신의 벽 어딘가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사랑스럽고, 따스하다. 

작품이 그럴진대 작가의 따스함은 오죽할까.

모딜리아니는 동료와 친구를 비롯해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지만, 유독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것은 단 한 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화가들의 관례처럼 자화상을 그린 것과 비교했을 때 그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 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죽기 일년전에야 비로소 유일한 자화상(1919년)을 남겼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의 저자인 장소현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를 전공했으면서도 그의 직업은 극작가, 언론인, 방송진행자이다. 그는 몇 편의 희곡과 시집, 콩트집, 단편집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그런 덕분인지 책 속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그의 작품 속 누드 여인들이 그런 것처럼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장소현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열화당 문고본 중 하나이므로 판형은 핸드북 정도의 크기로 작지만, 알찬 책이다. 모딜리아니에 대해 연대기순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함께 조망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 아메데오(Modigliani, Amedeo) 1902년경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그의 재능에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중학 시절 앓았던 늑막염이었고, 늑막염은 폐렴으로, 폐렴은 다시 폐결핵이 되면서 그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 등을 여행하던 중 마주치게 된 카마이노의 조각들은 그로 하여금 평생동안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와 예술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의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 때 모딜리아니는 세계 문화예술의 수도 파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세잔느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단순하면서 우아한 곡선들은 세잔느의 영향력을 그나름대로 내면화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피렌체 미술학교 시절부터 회화보다는 조각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는 파리에서도 브랑쿠시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발전시킨 독자적인 조각작품을 만들었지만, 어렸을 때 앓았던 병의 후유증으로 약해진 체력과 폐는 조각이라는 육체적 노동을 감내할 수 없었다. 결국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긴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 키슬리와 수틴 등과 사귀게 된다.

◀ 파리 시절의 모딜리아니, 1909년경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많은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고, 잘 생긴 외모 덕에
(내가 아는 서양 화가들 가운데 최고의 미남) 여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천성이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고향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으나 그에게 명성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예술적 성취에 대한 집념과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이룰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삶과 건강을 소진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고, 그림도 멈추지 않았다. 평생 병약한 육체와 가난에 시달리며 예술혼을 불태운 모딜리아니에게 고흐의 동생 테오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그는 즈보로프스키였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딜리아니의 정신은 정처없이 떠도는 보헤미안이었으나 그의 심성은 연약한 식물성이었다. 그는 대상을 물리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기 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했다. 모딜리아니 시대의 초상화, 인물화는 더이상 회화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사진의 출현으로 회화에서 인물화는 사진과 경쟁할 수 없었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사진이 예술일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도 거기에 있다. 모딜리아니 역시 그런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았다.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모딜리아니의 마음이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따스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 덕이었다. 모딜리아니가 33세일 때, 잔느는 19세의 미술학도였다.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므로, 가난한 유대인인 모딜리아니와의 결혼에는 극심한 반대가 따랐다. 잔느와 모딜리아니의 사랑은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이듬해 딸을 낳는다. 모딜리아니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
.(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의 저자가 된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의 인생에서 짧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잔느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모딜리아니의 음주벽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1920년 1월 24일 창 밖으로 삭풍이 불어오지만 가난한 이들이나 머무는 자선병원. 여러 환자들이 누워있는 병실 하나 남은 난로마저 온기를 잃고 있을 무렵, 얼음장 같이 차가운 마루에 한 남자가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다. 쓰러진 남자 옆에 만삭의 몸을 한 여인이 남자의 손을 당겨 잡는다. 그녀는 남자를 조용히 내려다 본다. 이제 여인은 남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전 죽음의 사신을 피해 버둥대다 침대 밖으로 떨어진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다. 지저분한 침대 시트에는 남자가 토해낸 붉은 선혈로 흥건하다. 

여인은 떠나가는 남자에게 말한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
남자는 잔느를 바라보며 ... 단 한 마디를 남겼다.
"그리운 이탈리아!(카라 이탈리아)"
(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1920년 1월 24일 20세기 서구회화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26일 그의 아내 잔느 에뷔테른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