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SY/한국시

박경리 - 옛날의 그 집

windshoes 2011. 1. 14. 09:27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출처: 박경리, 『현대문학』, 2008년 4월호



*


아무도 없는 빈 집을 얻어 한 달여를 살아본 적이 있었다.

구례구역에 내려 섬진강을 건너 시골 사람에게 물으면 '가찹지만' 도회 사람에게 물으면 차 없이 어떻게 가느냐고 할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 폐가에 들어가 한 달여를 살아본 적이 있었다. 강감찬 장군이 호령하여 한여름에도 개구리가 울지 않고, 여름내 극성이기 마련인 모기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그 마을에서 서울서 온 작가 선생으로 한 달 넘게 머물며 살았다.

내가 아직 푸릇푸릇한 문학청년이던 시절, 살기 나빠 고향을 떠났는지, 빚더미에 앉아 어느 밤 야반도주를 했는지 알 수 없는 폐가를 빌려 살았다. 창호를 열면 방 뒤편으로 대숲이 밤새 ‘솨아솨아’ 울어댔고, 밤늦게 사냥 나온 너구리와 오소리 가족들이 내 방 앞으로 슬그머니 지나다녔다. 한밤중에 닭들의 호들갑소리가 들리면 다음날 산책 길 대숲 속 어딘가엔 어김없이 피묻은 깃털 서너 개 떨어져 있었다.

여름내 나무 아래 떨어진 낙과(落果)를 주워 먹으며 시장에서 파는 시큼한 자두가 사실은 이처럼 달콤한 과일이란 걸 처음 알았다.

폐가, 부엌문을 열면 갑자기 들이닥친 햇빛을 피해 지네들이 어둠 뒤편으로
빠르게 뒷걸음질치고, 지네들이 정말 ‘사사삭’ 발자국 소리를 낸다는 걸 알았다. 폐가를 떠나온 뒤로 어느덧 20여년을 살았다. 냉장고, 세탁기, TV도 라디오조차 없이 살았던 그 시절, 나는 누구보다 부자였는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가진 나는 결국 버릴 것이 나만 남았을 때 비로소 다시 젊어질 수 있겠지.... 그때 나는 과연 홀가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