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공연/음반

Jacqueline Du Pre - The Very Best Of Jacqueline Du Pre(EMI)

windshoes 2011. 1. 26. 11:19

 


어느새 자클린느 뒤 프레가 세상에 온지도 60년이 넘어 버렸구나.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만 60환갑이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녀는 지난 1987년 세상을 떠났다. 나는 87년에 대한 몇 가지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상하게 87년은 내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도... 아마 97년의 요맘 때였을 거다. 연립이라기 보다는 다세대에 가까운 곳에 나는 원룸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7년을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남자에게 세상은 220V전기 콘센트에 연결된 110V전구이거나 선풍기이다. 그것은 순간 지독한 빛을 발하거나 맹렬한 속도로 뜨거운 바람을 쏟아내다가 한순간 퍽하고 나가버리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다.

 

세상이 맹렬하게 빛을 내다가 어느 순간 마치 매트릭스의 그 사내처럼 일순간에 느려진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어느날 나는 마음 둘 곳 없어 음악에 정 붙이고, 오디오에 마음을 두었다. 나로서는 처음 누려보는 순전히 나만을 위한 호사였다. 그것은... "모던쇼트 10i 스피커, A1-X 앰프, 인켈 CD-7R"가 내가 장만했던 최초의 오디오였다. 나만을 위한 사치품이었고, 동시에 나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날도 지난 어느 여름밤처럼 비 오기 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A1-X는 비록 싸구려 입문기였지만 A급 동작으로 유명한 기종이다(A급 동작이란 기술적으로 설명하긴 곤란하지만 하여간 앰프의 발열량이 장난이 아니란 뜻이다). 에어콘을 틀어놓아도 시원치 않은 판에 라디에이터를 틀어논 셈이니 그날 밤 공연히 내 방으로 초대받은 친구들은 얼마나 더웠을까.

 

비가 내리는 어느 깊은 밤, 그날 따라 우리는 아주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들을 내 자취방에 불러모으고 뒤 프레의 첼로협주곡(엘가)을 틀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는 모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밖으로는 비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자클린느의 보우잉은 힘차게 현을 긁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는 자클린느의 사진이 담긴 CD재킷을 들고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쩐지 이 여자는 일찍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친구는 뒤 프레의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그 활달한 미소를 바라보면 어딘지 모르게 요절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뒤 프레 그의 이름을 들으면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마도 요절한 천재들에 대한 선입견 탓일 수도 있고, 그녀를 앗아간 ‘다중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금세기 최고의 여성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그녀가 너무나 일찍 무대를 떠나야 했던 것에 대한 우리들의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바비롤리 경 지휘의 EMI음반)은 아마도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명반 중 하나이다. 다중경화증을 앓으며 그녀가 잃어 버린 것은 첼로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 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자클린느 뒤 프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튕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사실 그녀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이 음반에 수록된 음원들은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한 것을 제외하곤 이미 모두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자클린느 뒤 프레의 무덤을 한 번도 찾지 않은 다니엘 바렌보임이 미워서 그의 음반은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음반은 한 장 가지고 있어야 할 듯 싶다. 나를 대신하여 울어준 눈물, 자클린느 뒤 프레를 위하여...

그녀는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이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 자클린 뒤 프레에 대해 좀더 자세한 내용은....
http://windshoes.new21.org/classic-dufr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