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비인간화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진사(1988)
예술의 비인간화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 미진사(1988)
"나는 단순히 난파자(難破者)의 사상을 믿는다. 나는 난파한 극적인 밑바닥에서 태어난 사상을 믿는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15~16년 전의 나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대중의 반역"이라는 중요한 고전을 토해낸 스페인 출신의 학자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고, 당시엔 민중의 개념(정치적으로는 평등을 좀더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는)이 머리 속에 제법 확고하게 들어있었으므로 가세트의 이 책들도 그와 관련된 무슨 책들이 아닐까 싶어 구입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코미디에 가까운 구입동기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표적인 반대중주의, 반민중주의의 기수격인 사람으로 엘리트주의 문화이론가다. 그런 사람의 책을 그저 민중예술론을 펼친 사람이려니(그것도 제목만 보고서) 하고 구입했으니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예술의 비인간화"라니 ... "대중의 반역"을 구입할 무렵에야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서 나는 묘한 매력을 느꼈다.
어쨌든 이 책이 아직 절판되지 않고, 여전히 나오고, 게다가 대학 교재로 쓰이고 있는 걸 보니 반갑다고 해야할지 우울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의 상당 부분은 현재까지 유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자 서문에도 밝혀져 있듯 이 책은 원래부터 단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책이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의 관점(points of view)에 대하여", "예술의 비인간화", "소설 노우트" 라는 각각 다른 세 편의 예술 에세이를 하나로 엮은 "The Dehumanization of Art and Other Writings on Atrs and Culture"를 저본으로 삼아 우리 말로 옮긴 책이다. 이 책에는 그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개념들 - "대중의 반역"이나 "원근법주의", "예술의 비통속성" 등 오늘의 관점으로 보아도 유의미한 여러 개념들이 잘 소개되고 있다. 내가 가진 재주로 그걸 좀더 알기 쉽게 풀어낼 능력이 없으므로 대신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삶과 그의 학문 사이엔 커다란 괴리가 존재한다고 여겨왔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학문적으로 주장한 바와 삶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내 학자들의 경우와는 그 괴리가 정반대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가세트는 1883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여 마드리드 대학을 나와, 독일의 라이프찌히, 베를린, 마르부르크 등 독일의 주요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일 형이상학과 훗설의 현상학 등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페인으로 귀국하여 마드리드 대학에서 형이상학 교수로 취임하여 철학, 문학에 관한 수종의 잡지를 편집하면서 현대 스페인의 중요한 작가들을 서구 문단(당시만 하더라도 피레네 산맥 이남 지역은 유럽이 아니란 식의 관념이 살아있던 시절이다)에 소개했다.
이 부분까지 그의 학문적 지향점과 삶의 내력이 크게 달라진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스페인시민전쟁 시기를 살았던 학자라는 점이다. 스페인시민전쟁이 발발하자 가세트는 인민전선의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다가 결국 국외로 되하여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인민전선 정부가 붕괴시키고 들어선 프랑코 정부는 가세트를 스페인 국가공인 철학자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1945년 귀국할 때까지 남미에서 망명생활을 보낸다. 귀국한 뒤에도 그가 프랑코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듣지 못했는데, 그는 귀국 후에도 독일 등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강연 활동을 펼치는 등 스페인을 떠나서 생활하는 기간이 많았고, 1955년 세상을 떠난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사상은 대중사회에 반하는 엘리트주의 문화론으로 비판받는다. 가세트는 "대중"이라는 무자격자의 정치적인 지배를 맹렬히 반대해왔는데,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열광은 물론 미국의 실증주의(전문기술주의) 풍조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인물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F. 니체의 엘리트주의와 오르테가의 엘리트주의는 종종 동일한 것으로 평가되어 동시에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이 둘 사이엔 차이가 있다. 가세트의 입장 "다수를 차지하는 열등한 자가 보다 우수한 자에게 반역하고 있다"는 "대중의 반역"에서 그가 염려한 것은 무자격자인 "대중의 지배" 이긴 했으나 이때 그가 말하는 대중이란 단순히 "노동자,농민 계급"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형이상학자이란 사실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의 문제이지, 계급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게 있어 문화적 엘리트란 것은 정치적 엘리트이기 보다는 문화적으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그로 인해 철저한 고독에 처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그런 귀족성을 의미한다.
나는 스페인의 뜨거움, 열정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 "돈키호테"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같은 허구적인(?),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역사 인물이 출현할 수 있는 토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생각해야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사상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과는 그닥 관련이 없는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그는 1929년 마드리드 대학 학생 연맹이 지도한 반독재 학생 운동에 동참하여 대학 당국에 사표를 제출하고 반년간이나 강의를 거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학생 연맹의 요청에 따라 "대학의 사명"이란 주제로 강연도 하고, 대학이 황태자의 어용을 위한 울타리가 되어선 안 되며 생의 긴박과 정열의 한 가운데에서 열광에 대해서는 냉정을, 경박과 불손한 우열에 대해서는 정신의 진지한 예리함을 유지하여 자신을 변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사상은 정신적 고귀함을 추구하도록 대중을 일깨우는 것에 있었지, 전제왕정이나 귀족정치를 지지하는데 있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난파자의 사상을 믿는다. 나는 난파한 극적인 밑바닥에서 태어난 사상을 믿는다." 어떤 맥락에서 읽노라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야말로 진정한 아나키스트가 아니냔 생각이 들 만큼(물론 이런 고루한 엘리트주의자가 아나키스트일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사상은 철두철미하게 고립되어 지고(至高)의 미와 덕을 추구했다. 그의 이론이나 사상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에게 그의 삶이 준 감명은 어느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엘리트주의)을 극한으로 추구한 결과, 독재정권으로부터 망명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그 형이상학적 귀족정신의 일단과 그 신념을 추구하는 양심이다.
그러니 그의 이론에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어도, 그란 한 인간에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그 반대로 걸어간 수없이 많은 사례들을 살펴보면 더욱더 그렇다. 그의 학문적 주장과 사상에 동의할 수 있는가 없는가와는 별개로 그의 학문과 삶의 내력을 비교하면 진정으로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