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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 봄날은 간다

windshoes 2010. 9. 13. 15:21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 2001)


감독 허진호의 영화는 이로써 두 편을 보게 되었다. 어제 만난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작자 오기민 씨는
"최근 한국영화의 돌풍의 뒤에는 나날이 작아지는 감독들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고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한국 영화들은 영화 자체의 흥행 성적은 둘째로 하더라도 감독의 이름만큼은 뚜렷이 남았던 것 같은데 최근의 히트한 한국영화의 감독들 이름을 나는 모르겠다. 가령 <조폭마누라> 등등. 어쩌면 이제 영화는 정말 감독의 작품이기 전에 그저 상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든 이의 이름을 모르듯이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허진호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연출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의 이름 석자는 나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질 것이다. 그의 첫번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나는 잔잔하며 순간을 놓치지 않는 그의 연출력에 놀라워 한 적이 있다. 그는 화면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없는 대신에 어떤 화면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는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 연결. 관객의 기대와 호흡을 적절히 끊어 놓고 이어주는 그 연출력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영화아카데미 6기 출신이다. 이만하면 한국 영화아카데미는 한국영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대열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봄날은 간다> - 가지 말라 해도 그날들은 간다.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나는 사실 두려워서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나의 절친한 친구가 말하기를 "너는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말하면서도 "절대로 누군가랑 같이 보지 말고 혼자 보라"는 그 말이 나에겐 두려움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극장에서 혼자 보았으면 너무 슬펐을 영화를 집에서 마눌과 함께 보았다. 첫사랑의 흔적을 현재 함께 살 맞대고 사는 여자와 함께 확인하러 간다는 것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 사랑의 흔적이 나만의 것일 수 있을까. (그 내숭덩어리가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첫 사랑은 혹여 존재하는 것이 아닐런지.)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며 떠오르는 상념들이 많았다는 것. 친구 녀석이 말하기를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누구하고도 같이 보지 말고 꼭 혼자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던 이유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이다. 간혹 어떤 영화들은 정말정말 보고 싶은데 그와 꼭같은 이유로 죽어라 보기 싫은 영화들이 있다. 내게는 이 <봄날은 간다>의 경우가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그렇게 말해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옆에 누워 영화 보는 내내 재잘거리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녀가 내 곁에 있음으로해서 나는 저 영화를 보면서도 이렇게 슬프지 않을 수 있구나. 아, 이 여자가 내 옆에 있어줌으로 해서. 만약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제 얘기같아요, 라고 말한다면 화낼 사람들 많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돌아가고 싶은 시기. 그러나 너무 아파서 차마 돌아가고 싶다는 마법의 주문을 끝까지 읊조릴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봄날은 간다>는 바로 그런 사랑의 마법에 걸린 연인들을 그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깊이라는 면에서는 <줄 앤 짐>의 잔느 모로를 능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영애라는 배우의 매끄러움을 훑어간다. 너무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여자.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마치 손아귀에 쥐고 있는 한줌의 모래알들처럼 힘주어 쥐려 할면 할수록 어느새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세상에는 아무리 갖고자 소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분명히 사람의 마음 일 것이다. 사랑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고, 사랑하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랑이란 것도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사랑의 층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다양하다. 가령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자. 두 주인공은 예정된 파멸의 길로 나간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랑을 택함으로써 그 파국을 애처롭지만 지켜보는 아픔을 택한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이제는 일종의 클리셰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모습이다. "버스와 여자는 지나간 뒤에는 잡지 않는 법"이란 충고를 손주에게 해주던 할머니의 연분홍 치마는 바람에 날린다. 그리고 나에게 이 영화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이영애가 강릉의 자기 아파트 창가에 머리를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앞으로 숙이는 장면이다. 아주 묘한 느낌을 전해주는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이 이 두 연인의 다가오는 파국을 잘 보여주는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글쎄, 명확히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어렵겠지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멀리서 흔들리는 깃발, 혹은 무지개처럼 끝없이 도달할 수 없는 먼 미지의 무엇이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영애의 행복에 겨운 그러나 동시에 나른한 듯한 포즈는 잡힐 듯 잡을 수 없는 집 나간 고양이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도 느껴진다.


"라면 먹고 갈래요."

그리고 잠시후


"자고 갈래요"

그리고 다시 잠들었던 유지태가 깨어나 이영애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자 얼마간 서로를 애무하던 이영애(음, 배우의 이름으로 그냥 쓰려니까 영 어색하네.)는 유지태를 밀어내며 말한다.

"다음에 좀 더 잘 알게 되면...우리 그때 해요"

우리는 이때 극중 한은수(이영애)가 '냉정한 불'이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물론 극중에서 한은수가 이혼녀라는 방식으로 그녀에게도 나름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대어 진행된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이라는 동종의 짐승이 아니라 아예 서로 다른 종이란 것이다. 그들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오랜 세월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통하지 않을리 없지 않은가?) 생각하는 방식도 심지어는 먹이의 종류도 다르다(연인과 함께 식사할 때 남자와 같은 메뉴를 시키는 여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봄날은 간다>는 슬픈 영화다. 나는 영화 <줄 앤 짐>을 보면서 상당히 비통해 했고, 잔느 모로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를 유쾌하게 보았다. 옆에서 시종일관 잔소리를 늘어놓는 마누라의 등을 긁어주며 오랜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 때문에 가슴 아픈 이들이여! 세월이 약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