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2002)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2002)
그에 비해 침상에 읽는 책이란 밑줄 쳐가며 읽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종종 책을 덮고 잠시 생각에 빠지거나 포스트잇 같이 간편한 기억보조장치들을 동원해 나중에 다시 펼쳐볼 장에 손쉽게 기억을 연장해줄 만한 장치들을 가할 수 있는 그런 책을 말한다. 게다가 읽는 재미도 쏠쏠한 그런 책이 되겠다. 어쩌다보니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가 "킹덤 오브 헤븐"이었다. 사실 "십자군" 혹은 "십자군 전쟁"의 전후 시기를 다룬 이야기들은 소설 혹은 영화를 통해 여러번 되풀이 되어왔다.
예를 들어 지난달(2005년 5월)에 나온 토머스 F. 매든의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역시 비록 이전의 관점들과 현재의 관점 사이에 교묘하게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서구의 시각으로부터 크게 이탈해 있지는 않다. 우리들은 "로빈 훗", "아이반호우"를 비롯해 서구의 기사 문학 혹은 기사도 문학, 그리고 십자군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이야기들을 통해 알게 모르게 서구적 시각에 깊이 침윤당해 있다. 그런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김태권 같은 이는 "십자군 이야기1-충격과 공포"란 책을 내기도 했으며, 최근 이라크 전쟁과 맞물려 이런 류의 시각 교정 도서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오랫동안 국제부 기자로 일했고, 파리에 정착한 레바논 출신의 아랍인 "아민 말루프"는 지난 93년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이상의 사실로 미뤄 보더라도 이 책을 엄밀한 역사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이 그간의 역사서들보다 나은 점이 최소한 두 가지나 된다. 우선,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이(물론 전문적이라면 더 좋겠지만)라도 읽기 쉬울 만한 난이도를 가진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실증적인 역사서가 갖지 못하는 당시 혹은 현재의 아랍인들이 가질 만한 정서를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종종 역사서가 통계나 수치 혹은 공공 제도의 변천사 등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당시를 살았던 소위 "대중정서 내지는 민중정서"가 묻혀 버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역사책에 경제발전 수치만 제시된다면 전두환 집권기의 제5공화국은 나름대로 살기 좋은 시절이란 오해도 받을 수 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당시를 살았던 지식인의 이야기들을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다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서 역사가 과거와의 대화라는 오랜 명제를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 시작점을 투르 프와티에 전투까지 거슬러 오를 수도 있지만, 서로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과 관련해 가장 최근에 제작된 "킹덤 오브 헤븐"은 과거에 제작된 영화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무슬림과 살라딘에 대해 호의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매우 객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이 책을 읽은 탓인지 책 속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도 우연치 않게 영화 속의 두 주인공 발리앙과 살라딘의 이야기이다. 물론 영화와 역사는 다르지만, 부분적으로 역사와 일치하는 대목들도 있고, 영화가 좀더 그럴 듯하게 그려낸 부분도 있다. 영화에서는 나병에 걸린 예루살렘의 왕이 스물 네 살의 나이로 죽고, 왕위가 바로 기 드뤼지냥에게 넘어간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왕의 조카인 6살 짜리 보두앵 5세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1년 뒤인 1186년 보두앵5세마저 죽자 보두앵 5세의 어머니가 기 드뤼지냥과 결혼하면서 살라딘과 예루살렘 사이의 휴전이 깨지게 된다. 이 부분부터 르노 드 샤티용의 부추김을 받은 기 드뤼지냥이 십자군을 이끌고 살라딘을 공격하다 무참하게 패하는 장면은 영화와 역사가 일치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것보다 살라딘은 더욱 너그러운 인물이었고, 발리앙 역시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던 듯 싶다.
어쨌든 저자 아민 말루프는 아랍인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줘야 할 부분은 이때 아랍인의 시각이란 것이 민족주의적인 관점, 혹은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십자군전쟁을 그려내고 있진 않다. 그는 서구인들의 시각보다 훨씬 더 균형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아민 말루프는 아랍 진영은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 이전부터 자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크인들의 침공은 이런 결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결함들은 첫째. 아랍의 문화적 부흥을 이끌어갈 만한 성장 동력의 결여, 둘째. 안정적이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정치 제도(백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측면에서도)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서구인들이 오랫동안 비웃듯 말해온 동방 전제군주정의 비밀스럽고, 때론 잔혹하기까지 한 권력 교체와 권력 전환기의 혼란과 분열 말이다.
거기에 더해져 침략자이자 정복자로 아랍에 들이닥친 프랑크인들은 상대적으로 아랍의 발달된 문화와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의 최종적인 승자였던 아랍은 프랑크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서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려들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비록 일본에 대해 최종적인 승리는 거두었으나 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그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려들지 않았던 역사와 흡사하다.
십자군 전쟁이 서유럽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진정한 혁명을 일으키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동방에게 이 성전은 오랜 쇠락과 암흑의 시기로 내몰리는 계기였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던 무슬림들은 몸을 도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겁을 먹었고, 방어적이었으며, 너그럽지 못했고, 메말라 갔다. 다른 세계가 발전함에 따라 이 태도는 점점 심해졌고 그 결과 그들은 변방으로 밀려났음을 느끼게 되었다. 무슬림들에게 발전이란 다른 세상 얘기였다. 근대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문 365-366쪽>
침상에서 나로 하여금 책을 덮고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대목이다.
* 이 책의 주석들은 모두 책 뒤로 빠져 있다. 읽는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편집자의 배려가 잘 이해되지만, 중간의 몇몇 부분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낯익지 않은 아랍의 관제와 지위 등은 "괄호( )"를 통해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