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 미디어특강 강연 <2009.5.14.>
▶ 좌로부터 김창남(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님들이다. 오, 이런...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의 공부법
여러분 안녕하세요.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입니다. 오늘 오면서 보니까 이번 강연을 알리는 포스터에 저를 가리키는 말로 “뚱뚱한 르네상스맨”이란 새로운 별명이 생겼더군요. 이번 강연을 준비하면서 학생 여러분이 얼마나 고심했을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이곳에 다녀갔던 다른 분들처럼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 분들처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질만한 특정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인터뷰하고, 홍보하는 동영상을 만들고 포스터까지 만드는 어려운 과정을 준비해온 팀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실 제 직업은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이고, 이름은 전성원이지만 인터넷 온라인 세계에서는 바람구두라는 닉네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라는 주제로 10년이 되어가는 디지털 아카이브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운영자로 더 많이 소개되는 편입니다.
어느 방송국 PD나 사진작가, 아나운서 같은 구체적인 직업으로 호명되지 않고 “르네상스맨”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소개를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제가 이른바 신문편집자들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일본식 속어인 ‘야마’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잡다하게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는 합니다. 사실 제 소개를 스스로 하라고 한다면 저는 지식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인문사회과학전문 계간지인 황해문화 편집장,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디지털 아카이브를 운영하는 디지털 아키비스트, 새얼문화재단이라는 인천지역의 문화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지역문화운동가,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의 운영위원이자 동시에 사진비평, 영화비평, 문화예술정책 분야는 물론 심지어는 아동문학비평까지 온갖 분야를 참견하고 비평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저는 이런 분야에 대해 아무런 라이센스도 취득한 바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문학비평이나 영화비평을 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나 영화잡지를 통해서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도록 되어 있습니다. 의사들이 중세 길드 조합에서 출발한 것처럼 예술가들도 이런 길드를 형성해서 자격 없는 사람은 아예 비평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저는 한 마디로 글쟁이이자 자격 없는 문화지식인인 셈입니다. 저는 공부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해서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했고, 3년간 전국의 막노동판을 떠돌면서 노가다꾼으로 살다가 남들보다 4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운전면허 시험도 시험이라고 미루고 미루다가 제 나이 서른한 살에 간신히 땄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갈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저랑 대학동기인 집사람이랑 같이 방송통신대학 2학년에 편입했는데 저는 그 대학도 5년만에 졸업했습니다.
오늘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김창남 교수님은 지금도 저만 보면 “언제 논문 쓰고 졸업할 거냐?”고 혀를 끌끌 차십니다. 제가 2005년에 성공회대 문화대학원에 입학했는데 올해가 2009년이니까 대학원만 5년 동안 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서 “나는 나를 이렇게 공부시켰다”는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오늘 강연의 가장 큰 주제이자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저토록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미디어 특강까지 나올 수 있었을까?
인생은 C다!
사실 저는 자라온 과정이나 환경을 살펴보면 계간지 편집장이나 글쟁이보다는 조폭이나 깡패가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꼭 버스나 지하철에서 강제로 물건 팔러 온 사람처럼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세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일곱 살 때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셔서 그 뒤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습니다. 제 나이 열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뒤로는 할머니와 함께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밑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습니다. 굉장히 고생하면서 살았을 것 같지만 숙부, 숙모님이 훌륭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고생이라 느끼진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아주 잘 해서 반장에, 학생회 간부도 맡아서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실 삶이란 매우 작은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고, 다른 이들에게 평가받는 것도 큰 성과나 실책이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도 아마 평생 살면서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핵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일은 아마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택이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는 일이거나 아니면 무언가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해봐야겠다 고민하는 정도겠지요. 저도 살면서 사소한 일로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젊어서 일찍 죽어도 스타가 되고, 영웅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장수만세에 출연해도 좋을 만큼 오래 살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엔 별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삶의 밀도 차이 때문입니다. 짧게 굵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지요. 밀도란 부피분의 중량을 말하는 건데 인생에 있어서의 밀도란 그 사람이 평생 살았던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경험하고, 얼마나 많은 일을,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했는가로 결정될 겁니다.
여러분, 넌센스 퀴즈 같은 것인데 B와 D 사이엔 뭐가 있나요? 그렇죠. C가 있습니다. B! Bith(탄생)과 D! Dead(죽음) 사이엔 C! Contents(내용)가 있습니다. 그럼, 이 컨텐츠는 무엇으로 만들어질까요? 컨텐츠는 3C, 소통을 뜻하는 Communication과 상호협력을 뜻하는 Cooperation 그리고 창조를 뜻하는 Creative로 만들어집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도 많이 보았음직한 만화 <슬램덩크>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자칭 천재 강백호도 아니고, 서태웅도 아니라 불꽃남자 ‘정대만’입니다. 어릴 적엔 농구의 천재였던 정대만은 중학시절 농구대회를 석권할 만큼 뛰어난 농구실력을 지녔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경기 중에 무릎 부상을 당하고 좌절해서 깡패가 됩니다.
그런 정대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과거 “포기하면 그 순간이 끝”이라고 가르쳐줬던 안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였습니다. <슬램덩크>는 북산고라는 만년 하위팀이 어떻게 팀워크를 다져가면서 정상을 향해 도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오관돌파를 하는 것처럼, 조자룡이 조조 군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면서 유비의 자식인 아두를 구해내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슬램덩크>의 작가도 각각의 캐릭터들에게 극적인 순간들을 부여하는데 정대만의 극적인 장면은 오랫동안 농구를 쉬었기 때문에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마지막 3점슛을 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그는 이 순간 스스로에게 말하죠. 자기 팀 동료들을 믿는다고. 설령 자신의 3점슛이 불발로 끝나더라도 리바운드 천재 강백호가 있고, 서태웅이 있고, 채치수가 있으니까. 그는 안심하고 슛을 쏩니다. 그게 바로 협력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대만은 일순간 경기를 지배하게 되고, 모든 관중이 숨을 죽이는 순간을 연출해 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인 거죠.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것은 제가 어떻게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고, 누구와 협력해서 무엇을 창조했는가 혹은 무엇을 창조하려는가 하는 겁니다.
민주화운동에서 냉소에 이르기까지
제가 1970년생입니다. 우리 나이로 올해 딱 마흔인데요. 우연한 이유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이 역사 속에서 태어나 살게 되는 탓인지는 몰라도 저는 태어나긴 서울시 구파발동에서 태어났지만 자라기는 송파구 마천동에서 자랐습니다. 마천동은 요즘 제2롯데월드와 함께 이전하냐 마느냐로 논란이 되었던 공수특전사령부가 있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그 일대가 나름대로 번화해진 뉴타운이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고무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할 만큼 가난하고 못 사는 동네였습니다. 비만 오면 온 동네가 진구렁으로 변할 만큼 낙후된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지역은 청계천을 덮고 그 위로 삼일고가도로를 만들면서 원래 그곳에 살던 도시 빈민들을 성남광주지구로 강제 이사시키면서 만들어진 동네입니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도 이 동네 이름이 나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 공수부대사령부인 특전사가 있었기 때문에 12.12사태가 일어나던 날 밤엔 저희 집에서도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가 제 나이 열 살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들 중에는 아버지가 직업군인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공수부대, 특전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광주사태, 5.18민주화운동일 겁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지금 서울구치소 옆에 있었고, 당시 전두환 정권 아래서 집권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이 있었습니다. 84년이던가 85년이던가 민정당 연수원 점거농성사건이 있던 날엔 저희 학교 수업 중에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을 만큼 최루탄 냄새가 지독했지요.
어쨌거나 저처럼 비뚤어지기 쉬운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잘 살았던 편입니다. 그런 제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중학교로 전학 온 한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란디? 그랑께”하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녀석이었는데 광주에서 전학 온 촌놈이었지요. 제가 이 녀석에게 넌 광주에서 왔으니까 광주사태에 대해 잘 알거 아니냐고 해서 물었더니 이 녀석이 저를 운동장 저 구석까지 끌고 가서 한다는 소리가 이거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이야기해주는 거였습니다. 자기 사촌 형도 공수부대원에게 죽었다는 거죠. 사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들이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별로 충격도 아니었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제 친구들의 아버지가 광주로 내려가서 제 친구의 사촌 형을 총으로 쏴 죽인 겁니다. 그때부터 도대체 광주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오신 사회선생님이 계셨는데, 저를 참 예뻐해주셨습니다. 이름도 잊지 않는 것이 그 분 성함이 이원숭 선생님이라 저희가 원숭이라고 놀렸거든요. 그 분에게 어느날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여쭸습니다. “선생님! 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땠을 것 같아요? 저는 그 순간 이 분의 얼굴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서 저를 다시 쳐다보더니 지금은 말해줄 수가 없으니까 이따 방과 후 학교 근처에 있는 중국집 앞에서 기다리라는 거예요. 제가 이 날을 잊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는데 난생 처음으로 중국집에서 짜장면 말고 잡탕밥이란 걸 먹은 날이거든요. 선생님이 퇴근하고 오실 때까지 학교 근처에서 놀다가 중국집 앞에 서서 선생님을 기다리니까 저를 밀실로 데려가셨어요. 거기에서 처음으로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성당에서 은밀하게 광주비디오란 걸 돌려보고는 했는데 저도 나중에 어른들 틈에 끼어서 광주비디오를 봤습니다. 겉으로는 영화 <미션>을 성당마다 돌아가면서 상영회를 했는데 <미션>을 보고나서 광주비디오를 틀어준 겁니다. 어린 마음에 그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어요. 며칠 동안 밤에 잠을 못 잤어요. 무서워서.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갖고 있구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 역시 내 스스로 탐구하고, 알아보기 전엔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말이죠. 그때부터 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이후부터 교과서보다는 금지된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세계사교과서를 대신해서 자와할랄 네루가 영국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다가 옥중에 갇혔을 때 자기 딸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하도록 하기 위해 썼다는 <세계사편력>을 시작으로 풀빛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민중사> 같은 책들을 읽었죠.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 1986년이었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가 1987년이었습니다. 87년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어떤 인연으로 당시 운동과 결합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너무 구구한 사연이 될 듯합니다. 다만, 1987년 12월 명동성당이란 시대의 막간극 무대에 저도 잠시 편승했던 적이 있었다는 정도를 밝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50여개 학교, 2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공정한 대통령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 중 일부만이 기억하는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엽합’의 명동성당 시위였습니다.
조세희 선생은 1987년 12월 대선의 그 날을 ‘악이 드러내놓고 선을 가장하고, 선이 악에게 패배한 날’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의 역사는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잘못 시작되었습니다. 17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당시의 저는 그 날의 충격과 비참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국민의 다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자 후계자였던 노태우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치인들, 운동세력은 독재의 문민화를 전복시키는데 실패했습니다. 독재의 문민화 전략이 먹혀들고,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명망 높았던 운동가들은 속속 전향 선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력은 제도권에서 자신의 입지를 쌓는 업적으로 변신되었습니다. 지역주의가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과거 독재 권력에 뿌리를 둔 정당에 투신해 새로운 지배 권력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20년의 역사는 동시에 전향의 역사이고,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제게 그 같은 일련의 흐름들은 대단한 충격이었고, 저 자신의 삶마저도 굴절시킬 만큼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거의 10여 년 간 냉소와 자기비하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 혹은 대학생 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출세와 성공이라는 일반적인 삶의 궤도를 이탈하게 만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5.18광주’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테러를 가했던 ‘5.18광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본질과 우리 앞에 민주주의의 얼굴로 미소 짓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고, ‘5.18광주’의 진실을 접했던 우리들은 시대와 양심의 부름에 호응하는 것이 청년의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명동성당 시위를 마무리 짓는 비참한 현장에서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진실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과 안위를 떨치고 일어나 진실을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보이는 것과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거나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제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이 싸움은 내가 평생을 전력투구한다 할지라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란 깨우침이었습니다. 저는 진보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란 당대의 현실을 고민하고,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보는 언제나 현실을 토대로 미래를 상상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지녔던 가장 강한 매력은 계급착취가 없고,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대접받고, 존재하는 인간해방의 평등세상이란 구체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했습니다. 그것도 마치 역사의 법칙처럼 부르주아자본주의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한 뒤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한다는 엄밀한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좌절이라면 좌절이었을 법한 그 경험 이후 97년까지 거의 10년여를 방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었고, 다시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3년여를 보내다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 무렵의 제가 스스로 대단히 불행하다거나 불운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연애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세상에 대해 받았던 느낌은 오래도록 민감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 배신감에 저는 세상을 향해 실천 없는 냉소만을 보냈습니다.
천호동텍사스촌에서 황해문화 편집장에 이르는 길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을 때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당시 재수를 해서 경원대학교에 다니던 친구인데 그 친구에게 제 고등학교 1년 후배가 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요. 1991년 5월 3일에 분신을 했다고 하더군요. 이때를 역사는 이른바 분신정국이라 부르는데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 분신, 5월 1일 안동대생 김영균 분신, 3일 경원대생 천세용 분신, 6일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의문사,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 10일 노동자 윤용하 분신, 18일 시민 이정순 분신, 22일 노동자 정상순 분신,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경찰에 밟혀 압사, 6월 1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 등 이 기간 동안 모두 10명이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때 막연하게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막노동판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면서 대학등록금을 벌었어요. 그때는 제가 제 돈으로 속옷 사 입는 것도 아까워서 남이 입다가 버린 속옷을 주워서 삶아 입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갔어요. 그때는 서울예전이 서울 명동에 있었는데, 저는 서울에 올라와서 살 거처가 마땅치 않아서 천호동 423번지 옥탑방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천호동 423번지 알아요? 천호동 423번지의 별명이 일명 '천호동 텍사스촌'이었어요. 학교에서는 매일 같이 아름답고 순수한 시를 배우고, 저녁에 집으로 가는 길엔 창녀들이 옷깃을 잡는 날들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옥탑방이 3층이었는데 1층은 쇼윈도우 케이스였고, 2층은 벌집으로 작업방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잡은 직장이 한보그룹의 막내아들이 개인적으로 돈을 투자해서 만든 광고사였어요. 이때 제가 한 일이 광고 카피라이터 겸 광고대행사의 AE같은 역할이었는데, 이 무렵 제가 만든 출판 광고들이 한보그룹에서 수입했던 피아트 자동차, 삼성 라이온즈 팬북, 한보철강 브로슈어, 한보그룹 브로슈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삼성인의 법률상식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여러분, 얼마 전 삼성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기억하시죠. 이미 10여년도 훨씬 전부터 삼성은 삼성인의 법률상식 같은 책을 만들어서 사내 기밀을 누설하면 징역 몇 년을 맞을 수 있다는 식으로 직원들을 교육했습니다.
당시 한보는 유원건설 같은 중견건설 회사도 인수하고, 하루가 다르게 회사가 확장일로에 있었기 때문에 저도 나름대로 잘 나갔어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아는 분이 거의 없겠지만 이른바 수서비리 사건이라고 해서 지금의 박연차 게이트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비리 사건으로 결국 한보그룹이 휘청이면서 무너지고 맙니다. 저도 그 때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이 때 저랑 같이 일한 사람이 함민복 시인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자본주의의 우울”이란 시집을 냈죠. 직장을 그만두고 3개월 동안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고민했습니다. 유명한 시 구절이 있지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꼭 그랬더라구요. 80년대 운동하다가 민자당 입당하고 그런 사람들만 잘못 산 것이 아니라 나도 잘못 살았구나.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 천하의 흥망은 평범한 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인천에서 지역문화운동을 하는 새얼문화재단에서 황해문화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랑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 그 선배가 장석남 시인입니다. 그런데 이 선배랑 같이 일을 한 기간은 막상 얼마 안 됩니다. 한 1년 반 정도 함께 했는데 갑자기 그만둬 버렸어요. 물론 저도 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독서도 하고, 의식화 학습도 했지만 사실 제 주전공은 문학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혼자서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편집을 혼자 떠맡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도전과제가 주어진 거죠.
공부는 일로 배워라
여러분! 공부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세요. 공부는 일로 배우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직장을 다니게 될 텐데요. 자기가 공부 잘하면 학교에서 장학금 주죠. 요즘 같이 취업하기 어려운 때에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 하는 건 좀 암담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에 나가서 직장이란 게 얼마나 좋은 거냐면 선배들이 일 가르쳐주는데 거기에다가 달달이 공부하라고 월급도 준다는 겁니다. 어느 학교에서 매달 용돈주고, 공부시켜주는 곳이 있겠어요.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이라면 몰라도. 제가 공부는 일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한 것은 곧이곧대로 들으면 배 아픈 이야기겠지만 이 말은 일을 반대로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로 여기란 뜻입니다.
저는 문학전공자라서 다른 인문사회과학분야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문이나 잡지, 다른 계간지들을 죄다 살피면서 제 마음에 드는 필자 1,000명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물론 이 일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은 아니었지요. 우리 김창남 교수님에게 강의를 들었다면 누구나 기억하게 되는 말일 텐데요.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은 전부 바닥으로 빠져나가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나물은 자란다는 말이 있지요. 제가 성공회대학교란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도 이때의 일입니다.
저는 노동과 공부, 놀이가 하나로 결합될 때 우리의 삶이 가장 행복해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참 어렵죠. 저 혼자 그렇게 하려고 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한 개인이 완전히 바꿀 수는 없어도 본인 자신이 발상을 전환하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신상명세를 작성하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낯선 사람, 낯선 세계, 낯선 생각들을 만나는 일은 놀이동산에서 88열차 타는 것만큼 신기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계간지 특성상 매 계절마다 새로운 주제로 특집을 꾸밉니다. 편집기획 일이란 것이 내가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알지 못하면 기획도 할 수 없고, 원고청탁도 할 수 없고, 교정이나 교열도 볼 수 없습니다. 뭘 알아야 이번 특집은 이런 의도로 만들어졌고, 이렇게 이렇게 써달라고 부탁을 할 거 아닙니까?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겁니다. 마케팅에서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기 전에 뭘 하나요? 시장조사란 걸 하지요. 편집자도 똑같습니다. 어떤 지식인에게 원고 청탁을 하려는데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이런 청탁을 하면 어떤 글을 써줄지 대충은 알아야 원고 청탁을 할 수 있습니다. 안 그랬다간 완전히 엉뚱한 글이 나오기 때문이죠.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사람 책을 읽어야 됩니다. 제가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에 진학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김창남 교수님의 책으로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을 죄다 사서 읽는 일이었습니다. 박사 논문으로 쓴 것부터 김창남 교수님의 친구 중에 화가 분이 있는데 이분이 쓴 에세이집에 나온 김창남 교수님의 고교시절 모습까지 전부 찾아 읽었습니다. 한 번 시작했으면 아예 뽕을 뽑는 거죠.
먼 길 돌아가는 공부일수록 즐겁다
저의 공부란 것은 주로 이런 식입니다. 가끔 어느 어느 분야에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부와 놀이에는 공통요소가 있습니다. 멀리 우회할수록 성취했을 때의 만족도가 커지고, 그것이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판소리 중에 “흥보가”를 아실 겁니다. 판소리 흥보가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 중 하나가 놀부가 화초장을 하나 얻는 대목입니다. 놀부가 너무 귀한 보물을 얻었다고 생각해서 집에 갈 때까지 화초장 이름을 기억하려고 계속 외우죠.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얻었구나. 얻었구나. 화초장 한 벌을 얻었다. 화초장 한 벌을 얻었으니 어찌 아니가 좋을소냐.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또랑 하나를 건너뛰다, 아뿔까, 잊었다. 이것 무엇이라고 허등만요? 응, 이거 뭐여? 뒤붙이면서도 몰라, 초장화? 아니다. 장화초? 아니다. 화장초?”
그런데 그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어 버립니다. 놀부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대로 엄청난 욕심쟁이죠. 가진 거라곤 물욕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놀부지만 화초장의 이름을 까먹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더 이상 금은보화 같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됩니다. 놀부가 화초장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화초장은 욕구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거죠.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인고? 간장, 고초장, 꾸둘장, 방장, 송장? 아니다. 어따, 이것이 무엇이냐? 천장, 방장, 꾸둘장? 아니다.”하면서 놀부는 화초장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제법 먼 길을 돌아갑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후, 아내에게 “얼른 썩 알아맞춰, 죽이기 전에”라고 말하면서 묻습니다. 놀부 마누라가 “이전에 우리 친정 아버지가 그런 걸 보고 화초장이라고 허던구마”라고 말하자 “놀보가 어찌 반갑던지, 아이고, 내 딸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공부란 건 이처럼 즐겁고 순수한 놀이처럼 해야 됩니다. 앞서 저는 괜찮은 광고회사를 다녔다고 했습니다. 아마 계속 그 길로 나갔으면 지금처럼 10년도 넘은 차를 계속 고쳐가면서 타지 않아도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데 광고 일을 하면서 저는 별로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볼 때는 별로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도덕적으로도 별로 훌륭한 기업이 아닌데 그 회사가 훌륭하고, 그 회사의 CEO가 훌륭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죄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셈이지만 순전히 제 개인적인 차원에선 그랬습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
우리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에 대학 4년을 다니면 공부하는 기간만 16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가 뭐예요.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도대체 뭔가요? 우리 옛 선인들은 공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 첫 구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하니라.
큰 가르침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과 하나 되는 것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에 있다. <『대학』, 經一章>
공부를 하되 항상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현대의 교육은 대부분 직업교육이 되어 버렸습니다. 옛날 교육의 목적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인생의 목표를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딱 의식주를 마련하는 게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인 것처럼 배웁니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물질로 만들어져 있고,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물질을 섭취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제한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고, 또 요즘 여러분들이 피 말리게 경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16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당장에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갈 데가 없고, 취업을 했다손 치더라도 기껏 인턴이고,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는데 사오정이고 오륙도가 되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육체를 위해 추구해온 모든 것들은 육체가 없어지는 순간 그 가치와 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며 살아오면서 추구해온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괴로움과 고달픔을 참고 견디며 노력해온 공부의 대가는 무엇인가? 사실 이와 같은 일생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고, 반드시 닥쳐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살며,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겠죠.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욕망이 일원화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물질적인 욕구에 찌들어 있는 거죠. 모두가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그걸 내 후손에게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다리 타기’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오늘 제 강의가 일종의 자기계발방법에 대한 강연으로 생각하고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간신히 졸업한 공돌이였다가 노가다판 일꾼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계간지 편집장이 되고, 독학으로 문화지식인이 되었나 인간승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오신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제 아무리 자기계발은 허구다, 모순이다 이야기를 해도 세상의 모든 공부는 결국 자기계발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자기계발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저는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기계발, 즉 공부 자체는 좋지만 내 공부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으며,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계발론의 문제점은 “내가 노력하고, 자기계발 열심히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다. 하면 된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처음 출발선부터 다른 사람들이 도처에 있고, 사실은 사회가 그것을 강제하는 시스템입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까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대한민국 1%에 속한 사람들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자녀들에게 주식을 물려줘서 7살짜리 아이가 230억 원어치 주식을 증여받았지요. 잘못된 자기계발론은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거죠. 자기 혼자만의 입신출세를 위한 사다리 경쟁은 결국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내 안의 이기적인 자아가 나의 참된 자아를 착취하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맙니다.
▶ 성공회대 미디어 특강에서 그다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모로 부족한 나란 사람을 탐구대상으로 정하고 연구해준 조원들과 기념 촬영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
공부, 즉 배움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해서 나를 위한 공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 해서 남을 위한 공부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까요? 윤리적으로는 당연히 남을 위한 공부가 더 높이 평가 받을 겁니다. 그런데 공자는 나를 위한 공부 없이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영어 교과서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일대기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당시 우리 반에는 전교 1등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영어 선생님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니까 이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이타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 선생님은 대답해주는 대신에 저희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생명으로 당연히 자신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이기주의자지만 그런 사람의 욕구가 사회공동체의 이익에 합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람을 위대한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답했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지난 2000년부터 지금 2009년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주제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면서 어느덧 조회 수가 200만을 바라보고 있고,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들만 3,000명 가까이 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엔 다음세대재단에서 우수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주는 상인 ‘정보트러스트어워드’란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돈 한 푼 생기지 않는 일이지만 저는 이 홈페이지를 내가 세상에게 받은 빚을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지난 10년간 꾸준하게 해왔습니다. 작년 촛불시위에 즈음해선 커뮤니티 인원이 너무 많이 늘어나고 디지털 아카이브란 본래 취지에 맞추기 위해서 커뮤니티를 따로 분리해서 “깃발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커뮤니티 사이트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커뮤니티 내부에서 운영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지금은 그 분들이 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 내부에는 이 분들이 마음에 맞는 분들끼리 독서클럽, 사진가클럽 등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클럽 활동을 합니다. 1년에 두 차례씩 망명자대회라는 오프라인 총회 모임을 갖고, 또 문화특강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활동가 민이 씨, 우토로살리기 시민모임의 활동가 분 등을 모시고 특강 행사를 한 뒤에 성금을 모아서 전달하는 행사를 갖는 자발적인 네티즌 모임으로 키워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인천이라는 지방도시에서 발행되는 『황해문화』의 편집장으로 있는 지난 10년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원고청탁을 거절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성공회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님이자 저희 『황해문화』 편집위원이신 백원담 선생님의 아버님은 여러분도 잘 아는 백기완 선생님입니다. 제가 백기완 선생께 처음 원고 청탁을 드렸을 때만해도 백기완 선생님이 『황해문화』가 황해도 도민들이 만드는 잡지가 아니냐고 하시면서 원고 청탁을 거절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황해문화』의 특집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것이 중앙지 문화면이나 사회면에 실리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저는 잡지의 진보적인 논조를 지키기 위해 발행인에게 사표를 내기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거나 ‘저주받은 세대’, ‘인턴세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나 시대의 자식들이고, 누구나 힘든 시절을 거치기 마련이며 어느 세대든 그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소명이 있는 법입니다. 땅에 넘어진 자는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말들을 두서없이 지껄였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딱 세 마디입니다. 먼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바랍니다. 둘째. 옳은 일을 하십시오. 셋째. 어떤 위기나 난관이 닥치더라도 인간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이며, 인간을 전진하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라는 겁니다. 우리 한국 불교는 대체로 당나라 임제 의현(臨濟 義玄) 큰 스님의 사상에 기초합니다. 임제 큰 스님의 제자 삼성 혜연(三聖 慧然)이 엮은 『임제록(臨濟錄)』 시중(示衆)편에 보면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했습니다. “처해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서는 곳마다 진리의 땅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성공회대 미디어 특강을 책으로 엮은 거다. 표지 상단 좌측에서 두 번째가 나란다. 누구냐? 넌!(밑의 책은 제법 팔렸던 것으로 아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건 한 푼도 없으니 알아서들 하시라~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