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동 - 바람의 소리
김영동 - 바람의 소리
부끄럽지만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 노래방에 가도 탬버린으로 리듬 맞추는 일조차 내가 하면 영 흥이 나질 않기 일쑤다. 악기를 배워보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려서는 주변 여건이 그러했고, 중학교 이후부터는 그것이 내게 사치라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악기 다루는 일에 등한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렇게 철 따라 나이 먹는 것이 일이 되어 나는 그저 듣는 귀동냥이나 열심히 하자는 축이 되었을 뿐 악기는 지금까지 단소 시험에 응하느라 중학교 때 단소를 배워본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요새는 그저 거문고를 다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그것도 욕심일 뿐 실제로 배우기 위해 떨치고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빈말인 셈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문고냐? 그저 그 소리가 좋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우리 국악에서 거문고는 기악의 편성상 중요한 악기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거문고는 특히 정신을 중히 여기는 우리 음악에서도 더욱 정신세계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악기란 생각이다. 그것은 선비들의 악기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거문고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 속에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흠모하는 마음이 조금은 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김영동의 "바람의 소리"를 틀어놓고 앉아있다. 그때의 내 마음은 나도 조금은 바람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나도 무위하였으면,
그처럼 나도 무익하였으면,
그처럼 나도 무해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그 안에 조금은 있는 것이 아닌지...
바람에게 무슨 생각이 있어 불어오고 불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경구는 이처럼 자연과 세상을 대면한 인간의 깨달음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도시에 살면서 다시 이런 마음을 먹고자 하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이 그만큼 자연의 소리, 자연의 깨달음과 대면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도가연하는 어설픈 도인들도 싫지만, 자연이 인간에게 내려준 풍부한 자연적 천성을 부인하는 거만한 휴머니스트들도 싫다.
디지탈 시대라고 한다. 그 기본이 되는 비트(bit)란 따지고 보면 있고, 없고의 구분이다. 그것은 소유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디지탈 기기들을 눈 앞에 두고 순간 숨막힘을 경험하는 것, 자연이 내게 너무 멀리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존재의 이유를 남에게 물을 필요도 없고, 그것을 다시 자신에게 반문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노자연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양의 음과 양 혹은 빌공자 하나를 써도 그것이 구분짓고자 하는 것은 있다, 없다의 의미도 옳다 그르다의 의미도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양적인 사유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김영동은 이 앨범 <바람의 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람의 소리'는 우리 음악을 통해 자연의 소리를 표현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작된 앨범입니다. 그간 잘 쓰이지 않던 전통악기 훈을 사용해 바람소리를 표현했지요. 훈의 소리는 마치 영혼을 불러들이는 듯 신비롭습니다.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지요."
내가 지닌 능력으로 이 음반이 어떤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말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 음반이 사람을 편안케 하고, 흙탕 같은 내 머릿속을 맑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설명하는데는 부족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동의 음악은 전통적인 세계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 없으나 한 번도 전통 그 자체만을 노래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증거할 수 있다. 듣기에 따라 김영동의 음악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이 음반은 듣기 어렵지 않다. 머리 아픈가? 봄꽃이 너무 멀리 있는가? 그렇다면 귀만이라도 자연에 적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