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티시즘(Feroticism) - 김영애 | 개마고원(2004)
페로티시즘(Feroticism) - 김영애 | 개마고원(2004)
이 책은 지난 2004년 나오자마자 구한 책이었다.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무렵 소위 예쁜 그림들(에로틱한 그림들)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궁금해 하고 있던 차에 "페로티시즘"이란 제목이 주는 묘한 이끌림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6,000원 다주고 사기엔 아까울 수도 있지만 13,000원 내외로 구입한다면 그렇게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 돈으로 책의 값어치를 매길 수는 없겠지만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해도 좋을 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아저씨이므로 돈으로 가격을 매기는 것이 제라늄 화분이 있는 집 어쩌구 떠들어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해된다.
농을 약간 섞어 이야기하자면 이 책의 제목 "페로티시즘=feminism + eroticism"의 등식보다는 "fetishism+eroticism"의 등식이 이 책에는 더 적합할 것 같다. 아마 저자의 별도의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것인줄 알고 보았을 것이다. "페로티시즘"에는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몇몇 개념들이 들어 있다. 그 하나가 저자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페미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티시즘 그리고 몸(body)이다. 저자의 고집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도 괜찮다고 여긴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지금 만만하게 논의될 성질의 것들은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이런 말들을 하기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푸코, 사드, 바타이유, 프로이트, 라캉, 마르쿠제, 들뢰즈 가타리, 보봐르 등등 에로티시즘 내지는 성과 사랑, 욕망에 대해 한 마디쯤 했음 직한 사상가들을 죄다 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매우 어렵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어야 하는 건 이들을 끌어낸다고 해서 이들이 저절로 무언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표4(뒷표지)의 광고 카피처럼 새겨져 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좀 더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욕망, 혹은 치유? 에로티시즘은 무엇인가?"
"섹스"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가능할까? 의문이지만(학문의 영역에서 정의내리는 일은 가장 어렵고, 폭력적이란 생각을 종종 한다) 최소한 내 개인적인 범주 안에서의 정의로 보았을 때, "섹스는 대화다"라고 정의하는 편이다. 대화를 서구적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 했을 때, 사회학이나 인류학에서는 인간만이 상징체계를 통해 사회를 경험하고 인식하며 다른 인간과 커뮤니케이션한다고 생각하고, 이 자체가 문화라고 생각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이 만들어 내고, 경험하는 사회의 총체적인 생활 양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랬을 때 내가 말하는 섹스란 결국 사회의 총체적인 생활 양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무엇이 된다. 설명하기가 점점 더 난감해진다.
그만큼 성의 문제는 생식이나 욕망을 위한 섹스든, 철학적, 미학적 에로스의 문제든, 아니면 정치적, 사회적 젠더의 문제든 도자히 한데 꿰기 난망하기 그지없는 여러 바늘귀들을 하나의 화살로 동시에 꿰뚫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이 책이 애초에 저자가 의도했던 바, 수준만큼의 성취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이 책의 의미가 반감되진 않는다. 모든 책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는데, 이 책에도 다른 책에는 없는 미덕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 자신이 솔직히 한계를 시인하고 출발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사실 미술비평(이론)서와 현실(작품) 사이에는 언제나 괴리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거기에 수용자(독자일 수도 있고, 감상자일 수도 있는) 사이의 괴리까지 포함하면 그 차이는 더욱더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다. 저자 자신이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들어간 덕분에 우리는 대중적인 에로티시즘 개설서 한 권을 얻은 셈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다소 어려운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다른 미술 서적들에 비해 읽기 어렵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적인 시각으로 사회와 예술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 관점에 선뜻 동의하기도 어려울 수 있는 것이 소위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의 고민인데, 이 책은 그 점에서 첫 진입관문으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나름대로 풍성한 도판들과 최근 미술계의 조류(국내 작가들이 소외된 것은 좀 억울하겠지만)들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은 흥미를 배가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구매를 고민하는 분들은 한 번쯤 책을 살펴본 뒤 이 정도면 괜찮다. 구태여 페미니즘적인 부분에 민감하지도, 민감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쩐지 흥미가 생기는, 에로틱한 그림들에 관심은 있는데, 그 작품들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하지만 이 방면에 이미 많은 관심이 있고, 꽤 진도가 나간 분들이라면 구태여 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분들은 그런 분들대로 이런 책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엔 이런 시각으로 다뤄진 미술 서적들이 꽤 여러 종 되므로 그 책들과 잘 비교해 살펴보는 거도 좋다.
이렇게 이 책의 장단점을 살펴보았는데, 다만 한 가지 꼭 지적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쿠르베의 작품 "세상의 기원"에 대해(에로티시즘이든 페미니즘이든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49쪽에서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소장한 것이 들뢰즈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 작품은 부다페스트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나치에 의해 압수되었고, 이후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들뢰즈가 소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에도 그림이 너무 노골적인 것을 걱정한 그의 부인이 앙드레 마송에게 덮개그림을 주문하여 마송의 그림 아래 이중으로 숨겨져 있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최근 저서 "성의 미학"(세종서적, 2005)에는 그 소장자가 들뢰즈가 아니라 라캉으로 되어 있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걸까? 내가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1955년 이후 라깡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 맞는 것 같다. (진중권 말고도"팜므파탈"의 저자이기도 한 이명옥의 "사비나의 에로틱 갤러리"에서도 최후 소장자로 라깡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책과 비교해보기 전에 난 그것도 모르고 이 책만 믿고 들뢰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런 젠장.... 책을 믿을 수 없게 되면 연구자들은 아주 죽어난다. 저자의 잘못이든 편집자의 잘못이든 이런 잘못은 그래서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