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파크닝(Christopher Parkening) - Bach, Prelude
크리스토퍼 파크닝(Christopher Parkening) - Bach, Prelude
고등학교 때 친구 중에 클래식 기타를 정말 잘 치던 친구 한 명이 있었다. 학교에 클래식기타 써클이 있었음에도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써클에 들지 않고, 혼자서만 기타를 쳤다. 축제 기간에 그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연주회를 갖게 되면 꼭 이 친구를 불러 게스트로 초대한 것으로 보아도 그 녀석의 기타 솜씨는 터부나 아집이 세다면 셀 수 있는 아마추어 동호회 모임에서도 인정해줄 만한 정도였던 거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그렇게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나랑 더 잘 어울렸던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친구의 집에 갔다가 내 기억에 클래식 기타만 서너대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통 기타와 일렉트릭 기타는 별개로 하고 내가 알기로 검정색 가죽 하드 케이스에 담긴 클래식 기타만 서너 대가 있었으니 그 녀석 방은 정말 기타의 방이었다.
클래식 기타는 의자에 앉아 한 쪽 발을 지지대에 올리고 기타를 허벅지에 기대듯 하고 연주하므로 얼핏보면 어린 아이 감싸안는 자세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마에 진땀을 송글송글 맺힐 만큼 연습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늘 못마땅한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나는 그의 기타에 반해 언제라도 최고의 찬사를 보내줄 마음이 있었음에도 그럴 만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연주를 마치고는 무척 기분 나쁘다는 듯 기타를 케이스에 집어넣고는 날 바라보면서 '형편없지'라고 말은 하지 않더라도 그 이외의 다른 말은 기대할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본인이 본인의 연주에 만족하지 못하는데 옆에서 백날 '훌륭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사정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나역시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그 무렵 내가 알고 있는 클래식 기타리스트는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 정도였다. 줄리언 브림(Julian Bream)이나 페페 로메로(Pepe Romero), 앙헬 로메로(Angel Romero) 형제를 알게 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었고, 크리스토퍼 파크닝(Christopher Parkening), 마뉴엘 바루에코(Manuel Barrueco) 등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또 한참 뒤의 일이 된다. 세고비아의 기타는 바로크 풍의 가벼운 곡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묵직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파크닝은 안드레아스 세고비아(하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기타리스트가 있을까?)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위기가 흡사하다고 하더라도 매우 섬세하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그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기댈 수 있는,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느낌의 연주를 펼쳐보인다.
크리스토퍼 파크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플라이 낚시에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해 플라이 낚시의 윔블던 대회랄 수 있는 국제골든 컵 타폰 토너먼트에서 챔피언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기타 줄과 낚시 줄의 차이를 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나의 무식한 관점에서도 어쩐지 이 둘이 묘한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첼리스트 피아티고라스키로부터 음악의 해석을 배웠고, 세고비아에게 배우기도 했다.
이 곡은 'A Bach celebreation' 에 수록된 곡이다. 다시 옛날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매듭짓자면 그의 아버지는 승려였다. 이상하게 목사의 아들은 이해가 되는데, 승려의 아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같은 크리스트교 아래에서도 가톨릭과 개신교가 있는 것처럼 불교의 여러 종파에서도 결혼을 허용하고 있는 종파가 있는데, '중놈의 자식'이란 상소리가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에 대해서 아버지의 직업에 대헤서도 콤플렉스가 있었다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 무렵의 나는 비교적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수녀님 한 분을(혹은 수녀가 되려던 어떤 분) 몹시 사모하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종교인들이 어째서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약간이었다.
나는 자신의 부모를 긍정하는 아이들보다는 부정하는 아이들과 늘 더 친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부모를 부정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혹여 자신의 부모를 몹시 존경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면 그 아이들의 심성이 어딘가 유치하고 덜 떨어진 탓이라고 종종 혼자 생각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란 뜻임을 알았다. 그 친구는 스스로의 부모를 부정하고 싶었던 탓에, 또 그 아이를 그렇게 몰고간 것이야 어디 그 아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주위 시선 역시 곱지 않았으리란 것은 미루어 짐작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니까.... 어쨌든 나는 그 녀석의 기타가 탐이 난 탓에 그 녀석의 집, 그러니까 절집에 자주 들락거렸고, 그런 와중에 녀석의 아버지와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허리를 깊숙이 기울여 두 손으로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다.
녀석의 인사 하는 방법 한 가지만 보고서도, 나는 더이상 녀석에게 아버지에 대해 깊이 묻는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상처는 본인이 스스로 치유하기 전까지는 건드리기 어려운 것도 있는 법이니까.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과정에 이르지 못하고 헤어졌지만(내 인생에 유난히 사단이 많았던 1987년 겨울 명동성당 시위가 실패로 끝나고 도망다닐 때 잠시동안 녀석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구나) 나는 아직도 그 녀석의 마음을 알 것 같고, 녀석이 계속 기타에 정진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어떤 예술가는 자신을 미워하기 위해 예술을 하지만, 예술을 하면서 끝까지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예술가도 흔치 않은 법이다. 창작이든 연주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이지만 동시에 상처를 소독하고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녀석이 자신의 연주를 못마땅해 한 원인, 그가 계속 기타 연주하는 일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가 끝끝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었는지까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클래식 기타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버릇처럼 그 녀석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