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궁궐 이야기 - 홍순민 | 청년사 | 1999
우리 궁궐 이야기 - 홍순민 | 청년사 | 1999
최근 모 계간지(?)에 실린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풍수지리학 혹은 환경심리학의 대가 최창조 선생의 글이 문제가 되었었다. 그 분의 개인적인 견해로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건 말건, 솔직히 내 개인적으로는 행정수도든, 본격적인 천도든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든 아직까지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대목은 아마도 그 글의 일부분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청와대의 터가 좋지 않아서 역대 대통령들의 말로가 썩 좋지 않았다. 청와대의 시작은 일제 시대 조선총독의 관저로 이용되면서부터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 뒤엔 미 군정 장관 하지의 관사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경무대'로 불리다가 4.19이후 청와대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청와대가 처음 지어진 것은 1927년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사이토 마코토 때였다. 그가 조선에 부임해 서울에 도착하던 날 강우규 의사는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는 한 차례 더 조선총독을 역임한 뒤 1932년 일본 총리대신의 지위에 오르지만, 1936년 "2.26사건"으로 젊은 일본군 장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조선에 부임해온 일본 총독들의 말로가 썩 좋지 않았고, 그 뒤를 이어 청와대를 차지했던 인물들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인데... 우리에게 풍수지리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철학이기도 하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우습게 볼 일만은 아닐 것이다. 신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서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청와대 부지 선정을 두고 정부가 목하고심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이 머무는 건축물이 어찌 그냥 지어질 수 있을까?
최고의 권력이 머무는 최고의 건물? 궁궐....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최고 권력인 왕이 머물던 궁궐은 어떤 의미를 담아 어떻게 건설되었을까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리라.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쓰고 있는 책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홍순민 선생의 이 책 "우리 궁궐 이야기"가 떠올랐다. 홍순민 선생의 이 책 "우리 궁궐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제1장 "궁궐 멀리서 보기"와 "궁궐 가까이서 보기"가 그것이다. 우리는 주말이면 종종 가족을 대동하고 궁궐을 찾는다. 어찌보면 지엄하신 왕실의 궁궐에 일개 시민 나부랑이들이 유모차를 끌고 카메라를 들쳐메고 놀다 올 수 있는 것, 그것은 공화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궁궐박사이자, 오랜 기간 궁궐만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홍순민 선생이 이전에 썼던 논문 '조선왕조 궁궐경영과 양궐 (兩闕) 체제의 변천' 과 그의 "역사기행 서울궁궐"을 하나로 합쳐 새롭게 펴낸 책이다. 우리에게 궁궐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종묘사직이 낯선 곳이듯, 낯선 곳이다.
홍순민 선생은 제1장에서 수도 서울의 의미와 궁궐의 역사, 궁궐 답사를 하는 의미 등에 대해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그가 우리 궁궐에 대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주로 자랑과 안타까움) 많은지는 이 책의 머리말이 다른 일반적인 책들에 비해 훨씬 길다는 사실이 입증해 주고 있다. 그는 '궁궐을 돌아보는 발걸음을 위하여'라는 서문을 통해 이 책이 실제 현장(궁궐답사)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사람들 손에 들려서 함께 궁궐나들이에 이용되길 바라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역사기행 및 문화유적 답사란 말이 더이상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시대이나 정작 1,000만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수도 서울에 대한 문화답사팀이 변변하게 꾸려져 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들 가운데 왕릉을 제외한 대개의 건축물들은 서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물론,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 조선 왕조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 건축물은 왕궁이 아니라 종묘라고 생각한다).
혼이 빠진 건물 - 궁궐
나는 종종 사람이 빠져나간 건물은 혼이 빠진 건물이란 생각을 한다.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듯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은 아무리 낡아도 쉬이 무너지지 않으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부서진다는 말씀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 왕실의 윈저궁이나 버킹검,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로 이용되는 엘리제궁, 러시아의 정치 1번지인 크렘린궁, 일본의 황궁과 달리 우리 궁궐에 사람이 살지 않기에 그곳이 생기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궁리를 해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왕당파란 건 아니다. 중국의 자금성을 방문해본 이들은 자금성의 그 삭막함에 놀라곤 한다. 맨땅이라곤 찾을 수 없고,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우리네 궁궐은 자연 속에 묻혀 있으므로 도심 속의 생태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조상님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궁궐을 사랑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 정도의 이유말고도 더욱 풍성한 근거들을 제시해준다. 그는 ‘지금 죽어있는 궁궐' 을 보면서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이 궁궐들을 사랑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궁궐을 단순한 건물, 도심의 작은 숲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궁궐을 조선 시대 ‘국왕을 둘러싼 모든 계층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로 보라고 말한다. 즉, 이제는 머물고 있는 국왕도, 그를 시종하는 궁녀들도, 호종하는 무관들도 없지만,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역사로서 살고 있다고 상상하며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는 궁궐에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래야만 궁궐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에...
궁궐의 풍수지리와 청와대의 풍수지리
이 책의 저자는 궁궐의 건축철학, 동양 철학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을 궁궐의 배치와 건물 배치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 까닭도 역시 그런 철학의 바탕에 인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새롭게 건설될 청와대 부지로는 행정수도 예정지의 중심이면서 금강 부쪽에 자리잡은 원수봉과 전월산 앞자락이 유력한 부지로 떠오르고 있다는데, 이 경우에도 역시 풍수를 감안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앙청 철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중앙청 철거를 역사적 이벤트로 만든 것은 역대 정권, 특히 문민정부들어 문민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복원하는 중요한 거사처럼 치뤄졌고, 나는 그것이 그다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청 철거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찬반으로 나뉘어 격론을 나눴고, 모두들 그 나름의 의미와 정당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던 논의들이었다. 나는 중앙청 철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문화주의,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받아들였고, 기꺼이 반대했다.
반대했다고 해서 중앙청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자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중앙청 철거와 관련해 건축계 일각에서 나왔던 주장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중앙청 철거와 관련해 건축계 일각에서 나온 얘기 중 이런 것이 있었다. 중앙청의 하부 토대에 대한 건축 공사를 실시해서 중앙청이 자체 하중에 의해 1,000년(혹은 100년)에 걸쳐 스스로 침강해 들어가도록 하자는 제안이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중앙청을 지하로 가라앉히자는 제안이었는데, 건축계 일각의 이런 제안에 대해 당시 중앙청 철거를 주장하던 측 입장에선 많은 비용 등의 문제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으로 묵살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유야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책의 1부에서 서울과 궁궐에 대한 총론 성격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면, 2부에서는 서울의 5대 고궁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을 하나하나 살핀다.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의 논문 주제이기도 했던 조선의 양궐 체제인데, 이때 양궐 체제라는 것은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을 의미한다.
법궁이라 함은 정식궁궐을 말하고, 이궁이라는 것은 특수한 경우 머무는 궁을 의미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조선 궁궐의 역사는 곧 조선 왕조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태조 이성계는 법궁으로 경복궁을 건립하였으나 태종은 경복궁을 떠나 창덕궁을 짓는다. 왕자의 난에서 이복 동생들을 죽인 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외에도 광해군이 대비들의 숙소였던 창경궁을 크게 개창한 것은 그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고, 본래 덕수궁의 이름이 본래 경운궁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물러난 고종의 퇴위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일제에 의해 고종이 머물던 궁의 이름을 태조 이성계의 양위를 상징하는 "덕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궁궐의 전, 각, 문들에 대해 얽힌 수많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복원시킨다. 그는 일제에 의해, 전란에 의해,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된 조선 궁궐의 원 모습을 우리들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복원시키고자 했다. 특히 홍순민 선생은 ‘건물을 볼 때는 내가 건물을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보는 것이 요령'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들이 창조적인 시선으로 문화유산 답사를 해주길 소망한다.
궁궐, 우리 민족사 500년의 건축물과 중앙청 철거
스페인 바르셀로나 외곽에 지어지고 있는 성가족교회(Temple de la Sagrada Familia)는 가우디가,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인 1882년 3월 19일(성 요셉 축일)에 공사를 시작해 1926년 6월 그가 죽을 때까지 교회의 일부만 완성했고, 현재까지도 계속 작업 중에 있다. 교회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앞으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한다. 1882년 시작해서 2004년인 현재까지 완성되지 않았으니 건물을 짓는데만 100년 이상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가우디가 서른 살에 시작했다. 오늘날에야 가우디를 세계적인 건축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가우디의 명성이 지금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100년이 넘는 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중앙청은 비록 식민지의 잔재라고는 하나 분명히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중앙청의 침강에 1,000년이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월에 걸쳐 그것의 침몰을 즐길 마음의 여유, 그 건물을 통해 두 번 다시는 일제와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겠노라는 우리 민족의 자신감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급하게도 그 건물을 때려부쉈다. 공화국 대한민국이 앞으로 1,000년 뒤에도 존속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지난 5,000년을 견뎌온 것처럼 앞으로 1,000년 뒤에도 존속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조선총독부의 건물이었던 중앙청의 철거에도 알게 모르게 풍수지리학은 작동했다. 중앙청은 일제가 경북궁과 북한산의 정기를 억눌러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세웠으므로 중앙청을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논리엔 모순이 있다. 만약 중앙청이 정말 우리 민족의 정기를 억누르는 것이었고, 그들이 세세만대에 걸쳐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아직도 일제의 지배 아래 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중앙청이 건설되기 이전에 조선은 일제에 병탄되었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 앞 터에 자리잡은 뒤 일본은 패망했다. 우리 민족의 흥망이 어찌 건물 하나, 쇠못 하나에 좌지우지될 수 있을까라고 한다면 지나친 낙관주의일까?
신행정수도 건설과 새로운 청와대 건설에 대해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조급하게 서두르기 보다는 1,000년의 먼 미래까지는 아니더라도 100년 후는 내다보고 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하나와 이 가을에 가까운 고궁에 나갈 일이 있다면 이 책 한 권정도는 들고 가 보시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