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미학 - 진중권, 미와 쿄코 | 세종서적(2005)
성의 미학 - 진중권, 미와 쿄코 | 세종서적(2005)
내가 처음 진중권을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요설스러운 독설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종종 그의 독설이 방향타를 잃었다고 비난 받을 때도(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 자신이 그렇다고 느껴질 때조차) 그에 대해서는 한 수 접어주고 보았다. 그만큼 그(의 글)에 대해 받은 첫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인데 나에게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준 책은 이 책 "성의 미학"이 나온 세종서적의 다른 책 "춤추는 죽음"1.2권이었다. 예전에 알라딘에 짤막한 서평을 올린 적이 있는데(그 무렵엔 500자던가 리뷰에 제한이 붙어서 길게 쓰질 못했지만, 다시 쓰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춤추는 죽음"이 서양미술에 나타난 타나토스(Thanatos)에 대한 책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개념인 에로스(Eros)도 언젠가 나올 것이란 생각 때문에 나름대로는 간절하게 에로스를 다룬 그의 저서를 기다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국내 저자가 쓴 서양미술 서적 가운데 그것도 죽음(타나토스)이란 테마를 가지고 그렇게 깊이 있게 저술된 책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지적해두고 싶은 건 최소한 중세의 죽음에 관한한 진중권도 필립 아리에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야 당연한 귀결일테고, 그와 상관없이 "춤추는 죽음"은 판갈이해서 언제 다시 출판할까 기다려졌을 만큼 좋은 책이었는데, 당시의 만듦새는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보니 다시 판갈이해서 며칠 전에 출간된 것 같다. 아마도 "성의 미학"을 출간하면서 이 책도 판갈이해 재출간한 것 같다. 양장본이라니 구미가 당겨서 일단 보관함에 넣어둔다("춤추는 죽음"은 절대 손해보지 않는 책이니 특히 권하는 바이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성의 미학" 이야기를 해보자. 책 머리에 진중권이 밝히고 있듯 아니, 그보다는 신화적 세계의 틀 안에서나 우리의 일상에서나 매일반으로 일어나는 일들인 삶(에로스)과 죽음(타나토스)은 진중권이 "삶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와 자연에서 삶을 퍼 올리는 생식의 신 에로스"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나 같이 둔한 사람도 죽음을 다루었으니 삶(사랑)을 다루는 책이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춤추는 죽음"에서 진중권이 주가 되고, 미술사가(아내) 미와 쿄코가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 책은 반대로 미와 쿄코가 주가 되고, 진중권이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역할 분담이 어느 정도로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저 책 읽는 독자의 감각으로 보았을 때 공동 지은이로 되어 있지만 미와 쿄코가 지은이, 진중권은 옮긴이가 아닐까 싶을 만큼, 이 책에서 진중권의 예리함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진중권 문장의 힘은 사유의 여백에서 온다기 보다는 하나하나 가득차 있는 요설스러움에서 온다. 그의 문장이 끌고 가는 대로 질질 혹은 자발적으로 끌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그는 예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해 들어온다. 그것이 마치 낚시 바늘 끝에서 살짝 벌어진 날카로움처럼 의식의 한 귀퉁이를 푹 찌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한 구절처럼 '지금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서 우리들 안으로 들어올 그대여 기억하라. 죽음을...'처럼 그렇게 피해갈 수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그에겐 지극히 평범한 인식조차 범상하지 않은 무엇으로 탈바꿈시키는 문장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런 재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 책에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류의 책이 여러 종 출간된 현재의 상황에서 그 장점들은 그렇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볼 거리가 없거나 잘못 만들었다거나(그렇다고 하기는 커녕 만들어진 것이나 글의 내용은 오히려 튼실한 편이다) 하는 건 아니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실망의 폭만큼 잔혹해져서 별 셋 이상 줄 기분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