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WORK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부정당한 것들의 존재증명 - <청소년문학> 2010년 봄호

windshoes 2011. 4. 7. 09:27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부정당한 것들의 존재증명



2009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작가선언 6·9 | 실천문학사 | 2009


2009년 12월 30일, 속보로 전해진 ‘용산참사 협상타결’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먼저 느껴진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었던 생각들은 후련함보다는 갑갑함, 기쁨보다는 서글픔, 그리고 노여움이었다. 장례비용과 보상 문제는 해결되었을지 몰라도 남편과 아들의 영정 사진을 들고 용산 남일당 골목에 나란히 앉아 오열하는 유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할 수 없었다. 2009년 1월 20일부터 장장 345일이다. 가족의 안위와 생계를 짊어진 채 삶의 터를 지키겠다고 안간힘쓰던 다섯 사람과 경찰 한 사람이 생때같은 목숨을 화염 속에 잃었다. 그리고 23명이 다쳤다.


‘용산참사 협상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 민간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 했던 국무총리의 ‘깊은 유감’이 전해졌다. 그는 용산참사를 “우리 시대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총리의 말대로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한 일이 벌어졌지만 우리 정부는 무시했고, 이들을 진압한 경찰청 고위관계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을 무마하고 은폐하려 들었고, 검찰은 이들을 기소했고, 판사는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사건 발생 1년여가 다 되어가도록 ‘용산참사’는 마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적 없었던 것처럼 치부되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대한민국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차가운 냉장고 속에 방치되었다. 그래서 오도엽 시인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용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대한민국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본문 141쪽>고 노래했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우리는 참사(慘事)라 부른다. 용산참사로 희생당한 사람들은 그처럼 비참하고 끔찍하게 죽었다. 이들의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을 앞에 두고 시인, 소설가, 비평가, 만화가들은 이들의 죽음을 은폐하고, 망각하려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발하는 릴레이 기고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이다. 이 책은 용산참사로 희생당한 고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헌정문집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 승무원 생활을 경험했고, 훗날 『25시』를 쓴 작가 게오르규(C. V. Gheorghiu)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했다. 밀폐된 공간인 잠수함의 공기가 부족해지면 토끼가 가장 먼저 괴로워하는 것처럼 사회가 혼탁해지면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들이 먼저 징후를 읽어내고 사회의 다른 이들에게 경고를 발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는 지난 1980년 5월 광주 이후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이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죽임 당한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이들을 끊임없이 소환해낸다. 우리 전통 장례 풍습에 따르자면 유족과 함께, 그들을 대신해 곡(哭)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 문학은 ‘5월 광주’에 대한 막중한 부채의식을 민주화를 통해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빠르게 현실에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소설가 한지혜는 자신이 매일 직접 경험하던 철거 현장의 악몽을 문예창작과 재학 중 작품으로 썼지만 작품 강평 시간마다 “소설은 다 지나간 시대를 붙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시는 현실을 외면한 혹은 왜곡한 감상주의라고 비판”<본문 158쪽>받았다고 고백한다.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도록 가르친 우리 문학이 1990년대 이후 위기에 직면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학 작품보다 현실이 더 극적인 것이 우리 사회의 오래된 진면목이라곤 하나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자세마저 보기 어려워진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9작가선언’에 참여한 192명의 문인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들을 대신해 울어주고, 울음 섞인 목소리를 전해줌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또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단지 권력을 가진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무관심에도 그 책임이 있음을 뼈저리게 확인시켜준다.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1월 19일 그날, 내가 볼일을 보러 가다 말고 남일당 건물 앞에 멈춰 섰더라면.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들의 절규에 귀 기울였더라면. 그래서 나와 또 다른 나, 그리고 또 다른 나, 수많은 나의 눈과 입과 귀가 그곳에 모여 야만 정권과 폭력 경찰에게 너희의 만행을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음을 엄중히 경고했더라면. 그랬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최소한 정부가 철거민이 옥상에 올라간 지 겨우 하루 만에 특공대를 투입하여 가혹하고 기민한 진압 작전을 펼치는 대신 그들과 대화를 해보려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수많은 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아아, 정말이지 그랬다면. <본문 189쪽>

아프리카의 스와힐리(Swahili)족들은 사사(Sasa)와 자마니(Zamani)라는 독특한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인들에겐 누군가 숨이 멎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망자(亡者)는 죽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사'의 시간 속에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 사람과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망자는 영원한 침묵의 시간, 즉 ‘자마니'로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금 전 용산참사역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의 장례가 치러지더라도 이 땅에서 자본에 의한 폭력적인 개발이 지속되고, 쫓겨나는 이들이 생겨나는 한, 정당한 국민의 요구를 공권력으로 짓밟는 일이 계속되는 한, 우리가 다음에 내릴 역, 또 그 다음에 마주하게 될 역도 언제나 용산참사역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출처 : <청소년문학> 201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