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인문학

기호학연대 -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

windshoes 2011. 6. 13. 12:58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
기호학연대 엮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3년 10월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는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쓰인 책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모두 꼭같은 의도를 지녔다고 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합의하고 있는 것들은 첫째. "대중문화는 지배 블록과 피지배 블록의 헤게모니가 투쟁하는 장"이란 점이고, 둘째.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자 자기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란 것이다. 그리고 셋째. "문화는 억압인 동시에 해방"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넷째. "기호학은 읽고 쓰는 능력을 일컬었던 기존의 ‘리터러시(literacy)’라는 개념을 대체하여 문화에 대한 이해와 판단 능력을 포함한 새로운 읽고 쓰는 능력"이다. 대체로 이상과 같은 부분에서 필자들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며 기호학,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기호학을 해방의 수단(방법론)으로 쓰고자 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는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도흠의 "왜, 어떻게 대중문화를 낯설게 읽을 것인가?"와 강인규의 "기호학 : 의미를 둘러싼 투쟁"은 두 가지 점에서 이 책의 전체 핵심을 관통하는 글들이다. 먼저 이도흠의 글은 어째서 대중문화가 어째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놓고 투쟁하는 장이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도흠의 글은 이 책의 목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강인규의 글은 문화연구의 방법론이 어째서 기호학이 되는가? 기호학이란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김기국은 "신창원 사건 보도 뒤집어 보기"를 통해 매스 미디어의 보도 논법을 기호학적으로 어떻게 낯설게 읽을 것인가를, 백승국은 우리가 쉽게 마주치는 식료품점의 진열장이 어떻게 우리들을 조작하는가에 대해, 박여성은 청소년 베스트셀러였던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만화의 기호학적 속성을 통해 우리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밝힌다. 이렇듯 앞의 두 장이 전체를 통괄하고 있다면 뒤의 8개 장은 각각의 개별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실생황에서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어떻게 조작과정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기호학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접근하고 있다.


대중은 엘리트에 의해 조작되는 동시에 나름대로 대중문화 텍스트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들로서 그들 나름의 미학적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은 전통예술에 기초해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일 뿐이며, 이는 서구의 비평가들이 낯선 동양의 예술을 야만으로 간주한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편견일 뿐이다. 대중문화 텍스트는 맥락과 층위(context)에 따라 다르게 수용된다. 모든 문화는 의미소통이며 의미작용이자 이것을 조직화하는 체계다. 한 문화 안에서 인간이 의미를 만들고 소통을 하고 조직화하는 것은 세계관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세계관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 문화의 헤게모니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이들은 그동안 우리가 낯익은 것들이므로 당연하고,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모든 것들을 새롭게, 그리하여 낯설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낯설게 읽기란 기존의 읽기 방식 또 이에 의존한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부정의 읽기이며, 이런 작업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낯설게 읽기는 부정의 읽기이고, 동시에 창조적 해석이므로 기존의 의미(지배 이데올로기)와 투쟁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실천의 행위가 된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의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 집단이다. 대중문화가 저질이고 야만이란 것도 이분법적 편견이다. 중생과 부처, 주체와 대상 사이가 서열도 대립도 없이 평등한 것처럼 대중과 엘리트, 작가와 독자, 나와 타자라는 것도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니다. 대중이 교양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면 엘리트요, 엘리트라 할지라도 대중을 계몽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엘리트가 아니다. 문화는 억압인 동시에 해방이며 문화는 길들임과 동시에 부정의 행위다. 대중예술은 욕망을 추구하면서 욕망을 억압하려는 체제로부터 일탈한다. 예술이란 것이 현실을 넘어서 꿈을 꾸는 것이듯 대중예술 또한 현실의 굴레를 넘어서서 꿈을 꾸고 비전을 제시한다. 문화가 양가성을 갖듯 대중문화 역시 양가성을 갖는다. 대중문화에서 억압과 길들임, 해방과 일탈의 양면을 볼 때 대중문화는 올바른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텍스트를 바꾸면 현실은 전혀 다르게 변한다. 정직한 텍스트일수록 진정한 현실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텍스트와 현실 사이엔 ‘좁혀지기는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이처럼 텍스트는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쓰는 주체는 자신이 가진 이데올로기, 세계관 등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선택한다. 그는 말 그대로 현실을 다시 존재(re-presense)하게 한다. 재현은 단순히 의미생산에 그치지 않고 당대 권력과 유착해 지식을 생산하고 그 지식은 당대 진실로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띤다. 재현은 본질적으로 정치성을 지닌다. 텍스트는 의미를 드러내는 만큼 감춘다. 신화는 사물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정화시켜 순결하게 만들고 그것에 자연적이고 영구적인 정당화(justification)를 부여하기에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신화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기만하는 신화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광고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독자는 주체의 의도대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현실을 표상할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읽고, 자기 나름으로 해독하여야 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다시 써야 한다. 텍스트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수신자를 향하면서 담론으로 변하고 담론은 이데올로기를 품는다. 언어도 그렇지만 텍스트는 억압하는 습성을 가진다. 텍스트의 분석은 신화를 캐는 작업을 동반해야 하며 가장 적극적인 신화 캐기는 그 신화와 대항신화를 형성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다.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은 텍스트를 뒤집는다. 뒤집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파헤치고 텍스트를 다시 쓴다.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세계를 다시 창조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시 쓰기는 텍스트를 단순히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신화에 조작되던 대상이 주체로 서서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기호학은 바로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기호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의미를 찾아 나선다. 기호학은 모더니즘 예술 못지않게 화장실의 낙서에도, 그리고 누벨바그 영화 못지않게 싸구려 에로비디오에도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기호학이 사회의 모든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기호의 과학(science of sign)’이라면, 기호학의 관심은 어떤 문화가 더 ‘우아’하고 ‘고상’한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현상이 ‘더 의미 있는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저급문화’와 ‘고급문화’의 위계화된 구분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기호학을 방법론의 하나로 채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권력은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영속화하는 데 기여하는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물론 그들의 이익에 역행하는 의미와 즐거움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으로 제시된다. 예컨대 남성지배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적으로’ 육아와 가사에 관련된 일을 맡기에 적합한 것으로 의미화된다. 기호학은 이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문제 삼음으로써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는 장치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을 ‘거짓말의 이론(theory of the lie)'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호학은 기호로 간주되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대상과 의미 있게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기호가 될 수 있다. 기호가 특정 대상을 지시할 때 그 대상은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호학은 원칙적으로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거짓말에 사용될 수 없다면, 역으로 이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이라크와의 전쟁(War with Iraq)’라는 기호는 얼핏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중동의 언론이 사용하는 ‘이라크 침략’이나 ‘이라크 학살’등의 기호와는 달리 ‘전쟁(war)’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호다. 그리고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와의(with)’는 ‘~에 대한(against/on)’과는 달리 두 세력의 충돌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처럼 제시한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이란 기호를 사용한 반면 알자지라 등 아랍계 언론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라는 계열체를 사용했다. 하나의 대상이 동시에 ‘민중해방’과 ‘민중학살’이 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구 하나는 에코의 지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말없이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대중매체의 보도 사진에는 언제나 ‘자상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미디어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진의 의미를 특정한 방향으로 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전쟁을 보도하면서 민간인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미군의 사진을 사용했을 때, 그 신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미군에 대한 특정한 의미와 느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들이 사진을 보면서 “미군들이 이라크 민간인들을 거지 취급하고 있다”거나 “미국이 경제제재로 이라크 민간인들을 굶겨 놓고 이제는 사탕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는 창의적인 해석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신문은 사진의 의미를 차단하기 위해 밑에 글을 달아 그 사진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친절히 설명해 주려 한다.


기호의 둔갑술로 인해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평화의 사도’가 되기도 하고, ‘국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이 둘이 동시에 옳을 수 없다면, 어느 하나는 ‘대상을 갖지 않은 기호’, 즉 ‘거짓말’일 것이다. 기호를 통한 의미의 구성은 언제나 특정 입장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호는 그리 허술하게 자신의 허구성을 폭로하지 않는다. 이렇게 의미체계가 특정 개인 및 집단의 현실적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호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닌 물리적 실체이며 권력 관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기호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우리는 이야기의 세계에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루는 뉴스도 예외가 아니다. 뉴스 역시 항상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이야기의 틀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현실은 결코 그 자체로 이야기의 요소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뉴스가 사건을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것뿐이다. 결국 뉴스란 사건을 이야기체로 내러티브화하는 작업이며, 이 과정에 특정한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narrative)란 항상 특정한 기술자의 입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건이 이미 예측할 수 있는 이약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면, 뉴스는 사건보다 앞서 쓰이는 이야기인 셈이다. 뉴스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파업이 ‘불법’이고 ‘과격’하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울 것이라는 사실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익숙한 이야기’란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 ‘현실’이란 객관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회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지배적 현실감(dominant sense of realism)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남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여자다운 여자’가 되고, 지방색을 벗고 표준어를 써야만 멋진 인텔리가 될 수 있으며 ‘과격한’ 지하철 파업을 근엄하게 꾸짖어야만 ‘온건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라면 우리는 ‘비현실’을 지향해야 한다. ‘현실’이란 지배체제의 자화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현실’을 거부할 때, 사회의 변혁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 즉 ‘의미를 둘러싼 투쟁’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