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SY/한국시
마종기 - 證例6
windshoes
2011. 9. 7. 11:03
證例6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패기 있는 철학자들의 연구를 미워하지 마라. 너는 그이들보다 착하다. 나이 들어 자랄수록 건망증은 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어두워진단다. 그이들은 비웃지만 아가야, 너는 죽어서 내게 다시 증명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
마종기 시인은 시인이자 의사이고, 의사이자 시인이지만 그 전에 한 아이의 아비였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마종기 시인의 "證例" 연작 시리즈는 그가 시인이기 전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란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지만 마종기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끝 연에서 이 시는 세상을 다 알고 경험한 척하며 철학자연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책만 들척이며 세상의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세상의 만사를 자기식대로 난도질하는 지식인들이 나는 우습기까지 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내가 의대생으로 해부에 매달리면서 일어났다. 졸업 후에 밀어닥친 의사 생활 중에 더 두드러지게 되었지만, 문학이라면 적어도 그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행동주의 문학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이 없이 관념의 추상 언어로만 지껄이는 문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 없는 문학이라고 믿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
'진정성'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다시 말해 정의되지 못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쉽게 내뱉어지고 쉽게 사용되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해 '진정성'이란 말은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어쩌면 정의될 수 없는 말이란 뜻이다. 진정성이란 말 자체가 본디 한자어에서 왔을 테지만 이 말의 '진정'이 명사 '眞情'인지 부사 '眞正'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우엔 명사가 아니라 부사 '진정'이란 의미에서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으로 받아들인다. 진정성을 영어로는 'authenticity'라고 흔히 번역하는데 이 말은 진정성보다는 '진본성'에 더 가까운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때보다 '진정성'이 강하게 요구되고, 자주 사용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말의 참 뜻을 아직 모르며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비록 시인은 철학자들의, 지식인들의 창백한 지식과 이성이 빚어내는 냉정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앞의 첫 연에서 의료시스템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도구로서의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 그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그 역시도 알지 못했던 자각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에야 비로소 시인은 환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앤 샌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귀엽게 살아 있는 너"로 재인식하게 된다. 마종기의 이 시가 지닌 진정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이 자각, 그 역시 창백한 지식과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성찰에서 출발하는 것일 게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자각도 아마 그것이었을 게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정성은 그의 말대로 결국 '행동',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행동"만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 앤 선더스 아가에게
- 마종기
내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환자는 늙으나 어리나 환자였고, 내가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나는 기계처럼 치료하고 그 울음에 보이지 않는 신경질을 내고, 내가 하루하루 크는 귀여운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내 같잖은 의사의 눈에서는 연민의 작은 꽃 한 번 몽우리지지 않았지.
가슴뼈 속에 대못 같은 바늘을 꽂아 비로소 오래 살지 못하는 병을 진단한 뒤에 나는 네 병실을 겉돌고, 열기 오른 뺨으로 네가 손짓할 때 나는 또다시 망연한 나그네가 되었지.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 나는 드디어 귀엽게 살아 있는 너를 보았다. 아, 이제 아프게 몽우리졌다. 네 아픔이 되어 낮에도 밤에도 속삭이는구나.
미워하지 마라 아가야. 이 땅의 한곳에서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패기 있는 철학자들의 연구를 미워하지 마라. 너는 그이들보다 착하다. 나이 들어 자랄수록 건망증은 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은 어두워진단다. 그이들은 비웃지만 아가야, 너는 죽어서 내게 다시 증명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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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은 시인이자 의사이고, 의사이자 시인이지만 그 전에 한 아이의 아비였고,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다. 마종기 시인의 "證例" 연작 시리즈는 그가 시인이기 전에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란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지만 마종기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끝 연에서 이 시는 세상을 다 알고 경험한 척하며 철학자연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도서관에 앉아 책만 들척이며 세상의 진리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글을 쓰고, 세상의 만사를 자기식대로 난도질하는 지식인들이 나는 우습기까지 했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내가 의대생으로 해부에 매달리면서 일어났다. 졸업 후에 밀어닥친 의사 생활 중에 더 두드러지게 되었지만, 문학이라면 적어도 그 당시 상당히 유행하던 행동주의 문학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이 없이 관념의 추상 언어로만 지껄이는 문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험을 통한 현장의 은유야말로 살아 있는 시를 만드는 새로운 질료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진정성을 갖춘 문학이라고 믿었다. 행동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 문학은 공중누각이고 세상에 필요 없는 문학이라고 믿었다. 골방에만 박혀서 하루하루의 질박한 삶을 외면하는 의식의 조작이 아니고,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시의 길이라고 믿었다."
'진정성'이란 말은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다시 말해 정의되지 못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쉽게 내뱉어지고 쉽게 사용되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해 '진정성'이란 말은 쉽게 정의되지 않으며 어쩌면 정의될 수 없는 말이란 뜻이다. 진정성이란 말 자체가 본디 한자어에서 왔을 테지만 이 말의 '진정'이 명사 '眞情'인지 부사 '眞正'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우엔 명사가 아니라 부사 '진정'이란 의미에서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으로 받아들인다. 진정성을 영어로는 'authenticity'라고 흔히 번역하는데 이 말은 진정성보다는 '진본성'에 더 가까운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때보다 '진정성'이 강하게 요구되고, 자주 사용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이 말의 참 뜻을 아직 모르며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비록 시인은 철학자들의, 지식인들의 창백한 지식과 이성이 빚어내는 냉정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 역시 앞의 첫 연에서 의료시스템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도구로서의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 그가 "한 아가의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그 역시도 알지 못했던 자각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한 내 팔에 안겨 숨질 때"에야 비로소 시인은 환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앤 샌더스'라는 이름을 가진 "귀엽게 살아 있는 너"로 재인식하게 된다. 마종기의 이 시가 지닌 진정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이 자각, 그 역시 창백한 지식과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성찰에서 출발하는 것일 게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자각도 아마 그것이었을 게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진정성은 그의 말대로 결국 '행동', "땀과 눈물과 피로 만들어내는 행동"만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