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WORK
[내 인생의 특별한 영화] 허공에의 질주
windshoes
2011. 9. 15. 08:40
내 안, 옛 친구를 바라본다
[내 인생의 특별한 영화] 허공에의 질주
어떤 사람이던 감추고 싶은 비밀 한 가지쯤은 다들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픈 치부이기도 하고, 부끄러운 상처이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 그런 상처 아닌 상처가 하나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청춘이란 세상 어디에 반항할 곳 하나 없어도 반항하는 것이라고 했다지만 1980년대를 살아왔던 우리 세대에겐 그 시대 자체가 반항의 대상이자 저항의 상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1987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협의회’라는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공정한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농성시위를 이끈 적이 있다.
선거 결과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주장했던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고, 허망한 패배를 경험한 우리들은 당시 표현으론 ‘잠수’타는 신세가 되었다. 일주일여를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며 도망자 아닌 도망자 신세로 지냈는데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징계하지 말라는 교육청 지침이 내려와 다행히 퇴학은커녕 반성문 한 장 쓰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었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가 만들어진 것은 내가 고3이었던 1988년인데, 국내에는 개봉된 적이 없지만 리버 피닉스의 인기 덕분에 비디오로 출시된 것을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았던 것 같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대니(리버 피닉스)의 부모 아서와 애니는 1971년 베트남전에 반대할 목적으로 네이팜탄 무기연구소를 폭파했다. 비록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행동이긴 했지만 폭파과정에서 실수로 경비원을 다치게 한 죄로 십여 년간 FBI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한 곳에 정착해 살아갈 수 없는 도망자 신세였지만 자신들이 품었던 젊은 날의 신념과 이상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들 대니에게 숨겨진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자신들은 과거의 신념과 젊은 날의 실수로 인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런 이유로 자식마저도 꿈을 미처 펴볼 수 없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들 부모와 자식이 헤어지면서 나눈 대화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아버지는 아들 대니에게 “너도 이제 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라”며 아들을 떠나보낸다. 그는 비록 현재는 도망자 신세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싸웠던 것이고, 이제 자식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 역시 아들이 선택한 세상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특히 감동적인 까닭은 민권운동가로 활동하다가 FBI의 추적을 받으며 14년간 도피생활을 했던 원작자 나오미 포너의 실화이기 때문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리버 피닉스가 살아있다면 이제 그의 나이도 어느덧 마흔 둘이다. 나 역시 젊은 날의 반항아에서 이제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과연 나는 그간 세상을 좀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또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치열하게 산다는 건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남보다 치열하다는 것은 언제나 남보다 더 치졸해질 수 있는 위험을 곁에 두고 살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간신히 세상을 좀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에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안의 옛 친구를 바라본다.
출처 : 2011년 01월 12일 (수) <인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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