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영화/DVD

가스파 노에 (Gaspar Noe) -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windshoes 2011. 10. 7. 15:54


돌이킬 수 없는 - 가스파 노에 (Gaspar Noe) 감독, 뱅상 카셀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3년 5월




"가스파 노에"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을 보던 날이 생각난다. 한 마디로 이토록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이 영화는 함께 본 친구들 앞에서 날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내 감정을 스스로 돌이켜 보건데 그건 분노도 무엇도 아닌 짜증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넘쳐나는 짜증이 날 분개하게 만들었고,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애꿎은 물만 벌컥벌컥 들이키게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아름다운 한 여인(모니카 벨루치)이 지하도에서 한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자신의 애인이 강간당했다는 것을 안 남자 친구가 분개해 그날 밤 내내 강간범을 찾아다니다 결국 강간범을 찾아내 그에게 끔찍한 복수극을 벌인다는 이야기이다. 얼개만 남겨놓고 보면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설정이지만 이 영화를 본 뒤에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결코 간단치 않다.


최근 개봉되어 관객들을 들끓게 하고 결국 시민들의 분노가 쌓여 재수사하게 된 광주 인화학교의 실태를 다룬 영화 "도가니"를 본 사람들이 영화를 본 뒤 며칠동안 밥을 먹을 수 없었다며 영화 "도가니"를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내게는 이 영화가 그랬으니까.



100분 동안 우리는 감독의 설계에 따라 시간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즉, 끔찍한 폭력이 발생한 순간부터 일상의 평온한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의 궁극적인 복선이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운명론처럼 결코 "되돌이킬 수 없는" 잠재적으로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혹은 반드시 그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히 반복되고 있을 상황으로 관객들을 내몬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멈출 수 없는 짜증으로 몸부림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나 역시 이런 강간 사건의, 폭력 사건의 공범일 수밖에 없는 냉정한 현실, 거미줄로 아름다운 나비를 몰아댄 또다른 범죄자가 아니냔 생각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이 영화가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우리 모두는 "흘러버린 시간의 죄수들이지 않느냐"는 반문을 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도가니"는 우리가 막을 수 있었던, 막아야 했던 시간의 범죄다. 내가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평범한 일상은 순식간에 파괴될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말이다. 어쨌든 그 누구도 흘려보낸 시간을 되돌이킬 수 없다...시간의 냉정한 불문율.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알렉스(모니카 벨루치)의 현 애인 마르쿠스와 전 애인 삐에르는 한 게이 바에 들어가 사람 하나를 잔혹하게 소화기로 짓이겨 죽인다. 다시 역순 그들은 택시를 타고 게이 바로 들어가고, 게이바로 가기 전에 거리의 창녀들을 만나 그들이 찾는 사람이 게이바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 알렉스가 지하도에서 잔혹하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르쿠스와 삐에르 그리고 알렉스가 파티장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고, 그보다 다시 더... 더...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종말이 아닌 시작점에 이른다. 이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은 그래서 내러티브의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참혹한 현재에서 시작해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내러티브보다 더 무서운 건 인간의 감정이다. 후회가 없는 인간은 없으므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지 못하면 사랑이 없어진 뒤엔 더이상 사랑할 대상이 남아있지 않다는 후회가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그렇듯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느낌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은 오늘 당장은 아니라도 내일의 어느 날이라도 뒤통수를 가격한다. 가스파 노에는 마치 그리스희비극에서 운명의 노예가 된 오이디푸스처럼, 엘렉트라처럼 알렉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복선을 깔아둔다. 영화가 시작되면 첫 장면에서 우리는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늙은 남자의 대화를 본의아니게 엿듣게 된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말한다.


"내가 왜 빵에 갔다 왔는지 자넨 모르지? 내가 내 딸을 강간했기 때문이야. 참 예쁜 애였는데 말이지."


그러자 다른 남자가 말한다.


"아, 그놈의 근친상간!"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 남자들이 대화를 나눈 방 근처의 게이 바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연이어 파티장을 빠져나온 알렉스가 지하도를 홀로 걸어가다가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강간범은 알렉스에게 말한다.


"네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당했지? 아, 죽이는 엉덩이군." 



 

물론 알렉스가 실제로 자기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노에 감독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내러티브의 배치 구조 상 우리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게 될 뿐이다. 우연의 동시성. 알렉스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지하 터널의 꿈을 꾼다. 두 갈래의 길... 그 어느 한 편에서 그녀는 참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된다. 노에 감독은 삐에르와 마르쿠스에게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신화적 세계 속에서 진짜 복수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 처음은 알렉스의 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와 삐에르가 게이바에서 강간범이라고 생각해 소화기로 얼굴을 짓이겨 죽인 사람은 알렉스의 강간범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선량한 희생자일까? 글쎄,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 까닭은 마르쿠스와 삐에르조차도 선량한 알렉스의 남자 친구들이기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알렉스의 복수랍시고, 한 남자를 곤죽이 되도록 패 죽이고 만다. 하지만 강간범은 바로 그들 곁에서 이 광경을 희희낙락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그러하듯 운명은 우리들 사이를 빗겨간다. 이제 세 사람은 과거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이걸 알렉스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가? 강간당해야 할 운명, 복수되지 않는... 그걸 운명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여성들 가운데, 아니 지난 역사 시대를 모두 통틀어 어느 시대의 여성이 강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알렉스가 강간당하던 바로 그날. 알렉스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확인했지만 마르쿠스에게 말하지 못했다. 세상은 과연 합리적인 이성의 적절한 통제를 받아가며,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글쎄... 노에는 그걸 믿지 못하는 듯 하다. 내가 짜증이 났던 이유가 생각났다. 그건 어쩌면 노에 감독에게 내가 그런 건 아니야 혹은 꼭 당신이 말하는 대로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도가니"를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다. 그 통증과 슬픔을 외면해선 안된다는 건 알지만 정말이지, 정말이지 두렵다. 나는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다시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