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볼크먼 - 스파이의 역사1:작전편-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이마고(2003년)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 / 이마고 / 2003년 10월
어쩌다보니 별로 좋아하는 저자도 아닌 "어니스트 볼크먼Ernest Volkman"이 저술해 국내에서 출판된 3종의 책을 모두 읽고, 그 세 권의 책에 대해 모두 서평을 올리게 되었다. 저자 소개에는 그가 첩보기관 및 스파이 분야의 대단한(하긴 대단하다) 전문가인양 소개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가 전문가인 영역은 이런 자료들을 쫓아가서 공부하고, 종합해내서 글로 써내는 저널리스트란 점에서 전문가라는 것이지, 이 분야에 종사한 경험을 지닌 전문가는 아니다. 어니스트 볼크먼의 저서 세 권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20세기 첩보전의 역사 : 인물편"은 국내에선 모두 "이마고" 출판사에서 나왔다. 내가 읽은 그의 저서 세 권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였고, 그 뒤로 읽은 책 "스파이의 역사"가 제법 재미있었다. 가장 근간인 :20세기 첩보전의 역사"는 생각외로 재미가 적었다.
어니스트 볼크먼은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 잘 발휘되는 것으로 대중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이지만 전문가들이 잘 손 대지 않거나, 대체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를 잘 파고 든다는 점, 둘째는 그가 풍부한 사료들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는 것, 셋째는 어려운 이야기를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잘 풀어낸다는 것이다. 이 책 "스파이의 역사"에서는 그의 이런 장점들이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가장 훌륭하게 성공한 첩보작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작전"이라거나 "권력은 총구가 아닌 정보에서 나온다"와 같은 구절들은 스파이들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전제가 된다. 즉, 저자가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이제 비밀 제한 기간이 완전히 지나서, 비밀이 해제되었거나 너무나 끔찍한 피해를 겪어서 더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사건들로 국한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들이거나 아직도 그 의미가 남아 있는 것들은 여전히 비공개로 남는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이 책의 제2부 "암호와 감청 전쟁: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에서 독일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비밀암호작성기인 "에니그마"의 암호 코드를 영국은 "배틀 오브 브리튼" 이전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할 수 있고,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해독해냈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비밀로 남아 있었다. 007을 감독한 가이 해밀튼이 1969년 감독한 영화 "배틀 오브 브리튼"은 독일의 영국 침공과 이에 맞서는 영국 공군의 대혈투를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 영화 어디에서도 에니그마 암호를 풀어냈기에 독일 공군이 어딜 목표로 날아오는지 미리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은 단 하나도 없다. 역시 이 영화의 DVD서플먼트에는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다우딩이 출연해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에니그마 암호를 풀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다. 왜냐하면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전쟁의 최전방에서 이를 지휘했던 다우딩 중장조차 이를 영화든, 회고록이든 어디에도 언급할 수 없었고, 영화에도 그런 극적인 부분을 삽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대적 개념에서 첩보전을 최초로 실시한 나라는 영국이었고, 특공대를 만들어 운용한 나라 역시 영국이었다. 오늘날 대테러부대의 전세계적 모델이 된 SAS를 만들어낸 나라 역시 영국이었다. 그런 영국도 바보같은 실수를 한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의 비교적 낭만적인 첩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 한층 냉혹해지고, 이후 동서냉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첩보전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혹시 캐빈 코스트너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영화 "노웨이 아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캐빈 코스트너가 미 해군 장교로 등장하는 영화인데, 대통령이 케빈 코스트너의 애인과 밀통하다 우연히 그녀를 살해하고, 그 죄를 덮어 씌우려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영화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음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CIA내부에 소련이 침투시킨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설정이 겹치면서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다룬 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는 아니지만, 첩보전의 역사에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 있었다.
이 책의 "제3부 반역작전: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첩보조직 내부에 침투한 첩보원, 이중첩보원에 대한 이야기와 이들을 추적해 색출하기 위한 첩보작전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거듭되는 반전을 경험하며 골머리를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이 장을 펼쳐 읽으며 다시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손자병법에서는 간첩의 종류를 향간, 내간, 반간, 사간, 생간이라 하여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들 다섯 종류의 간첩을 사용하여도 적이 그 방법을 알지 못하니 이를 신기, 즉 귀신 같은 경륜가 재능이라 일컫는다고 말한다. 우선 향간은 적국의 사람을 포섭하여 이를 활용함이고, 내간은 적국의 관리를 포섭하여 이를 활 용함이며, 반간은 적의 간첩을 포섭하여 이를 활용함이고, 사간은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아군 간첩이 이를 알리고 적에게 전달케 함이며, 생간은 돌아와 보고함을 말한다.
동서냉전 시기에 CIA와 KGB는 서로의 조직에 간첩을 침투시키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더군다나 영국 최고의 첩보기관인 MI6의 최고 책임자 지위에 오를 뻔한 킴 필비가 KGB의 간첩이었단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 첩보 기관의 스트레스는 하늘을 찔렀다. 이런 와중에 KGB로부터 탈출한 전직 KGB요원 하나가 말하길, CIA 내부엔 이미 KGB스파이들이 잠입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CIA의 방첩담당자는 CIA내부의 요원들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이후 KGB에서 망명한 요원을 CIA를 교란시키기 위해 침투한 간첩으로 오인해 수년간 스파이 혐의로 반인권적 처우를 가했다. 결국 이런 방첩 행위는 CIA내부의 반발을 불러왔고, 방첩담당자는 해직당한다. 그 이후 재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의심을 받은 이가 바로 방첩행위를 주도했던 그 담당자였다는 이야기는 웃어 넘기기엔 너무 슬픈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 역시 분단 이후 아직 풀지 못한 숱한 사건들을 가지고 있다. 위장 간첩 사건부터 시작해서, 권력의 안위를 위해 조작된 간첩 사건, 휴전선을 넘나드며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고투를 거듭했던 이들이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 종종 스파이들을 용도가 폐기됨으로 잊혀지거나 좀더 심할 경우 그들을 부렸던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책 "스파이의 역사"는 물론 그런 부분에 대해 소상한 언급을 하고 있거나 독자들에게 어떤 흥미 이상을 갖도록 이끌어주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노라면 저절로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