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얼마 전 국정원에서는 과거사진상규명활동보고서를 냈는데, 지난 7~80년대부터의 공안사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강화도에서도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만 하는 작고 외진 섬, 미법도에 한동안 국가공무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곳을 찾아 미법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납북 사건이 잊혀질 무렵인 1976년 오형근씨 사건을 시작으로 미법도에 공안사건의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1977년 안장영, 안희천씨, 1981년 황용윤씨가 차례로 ‘간첩’이란 꼬리표를 달고 법정에 섰다. 오형근씨 수사 과정에서 안장영씨에 대한 첩보가, 안장영씨 수사 과정에서 안희천씨와 황용윤씨에 대한 첩보가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나왔다. 황용윤씨의 수사 과정에서 나온 ‘첩보’가 발단이 돼 간첩으로 몰린 정영(67)씨 사건까지 서해의 작은 섬 미법도에서만 모두 5건의 간첩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미법도 납북 어부들은 군사독재의 하수인들에게 ‘황금어장’으로 비쳤던 게다. - <한겨레21>(2007년11월01일 제683호) 특집
불과 70여 가구가 거주하는 어촌에 불과한 미법도에 그렇게 많은 간첩들이 거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들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정부공안기관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들이었고, 국가기밀은커녕 검찰에서 자신이 하는 진술이 법정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설령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안기부 직원들이 바로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고문과 협박에 못이겨 했던 진술이라고 자신의 진술을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어부들을 법정으로 불러내 처벌한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화된 시대이기에 과거에 비해 국가보안법이 남용될 위험도 적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록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지난 4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뒤 5개월여 동안 이시우는 감옥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끊임없이 기밀과 창작, 검열과 창작의 자유를 놓고 투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장장 60여일에 걸친 단식 투쟁도 불사했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된 뒤 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그의 부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65kg이었던 체중이 20kg 정도 빠져 “뼈에 얇게 살을 발라놓은 몰골”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5월 1일 그가 아직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옥중에서 발표한 한 장의 편지가 있다.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이시우가 말하는 사진가는 우리에게도 『하늘에서 본 지구』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다. 한 사람은 군 헬기를 얻어타고 공중에서 DMZ를 촬영하고, 다른 한 사람은 풍경 사진 속에 강화 고려산 미군 통신시설의 일몰을 촬영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시우는 간첩일까?
먼저 간단하게나마 그의 약력을 살펴본다. 1967년 충남 예산 출생, 1988년 신구전문대 사진과 제적, 1989년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창작단장, 1990년 전국노동자문화단체협의화 풍물분과장, 1991년 전국노동자문화운동협의회 창작단장, 1993년 서울중구문화회관에서 <사람과 사진>전, 1995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혐의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그는 강화도에 거주하면서 주로 비무장지대 DMZ의 풍경을 촬영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해왔다. 사실 이 책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은 그의 이런 작업 내용을 담아 지난 1999년 처음 출간되었고, 올해 재판 1쇄가 새롭게 나왔다. 이미 본 사람들은 다 본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올해를 상징하는 책 10권 가운데 하나로 재선정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리게 되는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2007년, 올해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평양에 갔다. NLL(북방한계선)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던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갈라진 민족의 양 정상은 현재의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데 합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자신의 발로 직접 넘어서던 그 날, 사진작가 이시우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개월 째 수감 중이었고, 목숨을 건 40여일의 단식 투쟁 중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국보법에 대해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 시대에 있던 낡은 유물”이라며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냐,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민통선을 촬영하던 사진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대통령의 말이 진실이라면 국민이 주인 되는 시대, 인권존중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2003년 말 1,000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국보법 철폐’ 단식을 하면서도 끝끝내 수구보수세력의 저항을 넘어서지 못했다.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겠다던 대통령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저들과 보수연정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의 반동들이 모여 오늘의 위기를 자초했다. 2007년 올해 10년 만에 사회과학서점들이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인터넷 헌책방 미르북 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일단 석방되었다.
여기 거의 7년여 만에 재출간된 사진집 한 권이 있다. ‘슬픈 조국의 대지’를 만남과 강, 사색이란 주제로 촬영한 사진집이다. 강화도에서 정동진에 이르는 155마일 휴전선 아니 비무장지대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색할 수 있을까? 남과 북, 좌와 우의 꽉 막힌 철옹성들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