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WORK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windshoes 2012. 12. 12. 11:21

<만화책을 보세요-01>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정송희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5월







"인간에게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낙관론만을 어린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문화적인 관습이 되었다" - 브루노 베텔하임

1.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
잔인한 아동성폭력 범죄에 대한 보도가 연일 매스컴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성폭력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그동안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접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성폭력은 비단 『도가니』의 그 학교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어서, 말할 수 없기에 더욱 힘이 들며, 말한다고 해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없기에 더욱 말할 수 없다. 소통이 단절되므로 치유는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는 종종 나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 해야 할 때가 있다. “있잖아. 누가 그러는데”로 시작하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였던 뼈아픈, 지극히 개인적이라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묻어둘 수 없는 사회적 이야기, 그것이 섹스(sex)다.

2. 내 안에 너 있기에
정송희의 첫 작품집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모두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막 「가로막힘(blocked)」, 2막 「이야기하기(telling)」, 3막 「봄(seeing)」이 그것이다.


1막 가운데 첫 번째 단편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은 한 젊은 연인의 사랑과 접촉을 차단하게 만드는 과거의 경험에 대한 반추로 시작한다. 이제 막 몽우리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더듬는 담임을 아무도, 그야말로 아무도 가로막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어머니도 촌지를 가져다 건넬 뿐이었다. 내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을까. 믿음을, 구원의 순간을 외면당한 어린이에게 세상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존재들은 공모자가 된다.


그 순간 남자가 와락 껴안으며 말한다. “미안해.” “왜 자기가 미안해? 자기가 남자 대표야?”라고 여자는 말하고, 이번엔 남자의 회상이 시작된다. 고3 무렵 놀러온 옆집 여자 아이의 여린 성기를 만지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단지 만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가을이 오고, 남자 네는 이사하게 되고 그는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다. 그때도 그는 끝내 어린 소녀에게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남기지 못했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여자 친구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성폭력에 관한 침묵의 공조는 오랫동안 여성을 인간이 아닌 물(物)적 존재로 치부해온 남성 가부장제 사회의 불문율이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사내에게 돌을 던져라!" 어쩌면 성적으로 전복된 여성 예수가 출현한다면 선량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숱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가련한(?) 한 명의 성폭력 사내에게 그리 말할 지도 모르겠다.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의 사내는 그 여자 친구에게는 상대의 고통을 이해한, 꽤 괜찮은 사내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짐승 같은 사내로 기억될 수도 있다.






3. 그들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큰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성폭력이든, 언어폭력이든, 혹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본질은 구체적으로 한 인간의 존재를 파괴하고, 지배하려는 욕망과 감정의 소산, 즉 본질적으로는 권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권력이란 권력욕이기보다는 ‘권력 감정’이다. 막스 베버는 권력 감정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식,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신경 줄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는 감정"이라고 정의하면서, 형식상으로는 보잘것없는 지위에 있는 경우에도 일상생활을 초극(超克)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권력 감정’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은 욕망이자 동시에 감정의 산물이기에 거창한 의지나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일상에서 행사되는 무수한 권력들의 다양한 발산을 보게 된다. 성폭력 역시 그 중 하나이며 종종 이와 같은 폭력은 가부장적인 가족의 위계 속에서, 권위적인 교실에서, 군대에서 그 이외에 그와 같은 권력 감정을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내면화한 무수한 과정들 속에서 체험하고, 체현한다.


우리들 하나하나를 거대한 위계 속에서 계층서열화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양이가 탈출구를 지키며 노려보고 있는 막다른 둥지에 갇힌 생쥐처럼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머니가 자식들을 물어 죽이는 끔찍한 경험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문화예술은 어떤 사회가 피워낸 가장 화려한 꽃이지만 범죄는 그 사회의 어디가 아픈지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열매란 점에서 징후적이다.


병든 사회의 근본을 찾는 대신 몇몇 범죄자들을 희생자들을 달래는 제물로 불태운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어디선가 문이 닫히고, 굳게 닫힌 방, 지하의 퀴퀴한 냄새 속에서, 커튼이 내려진 교실에서 아이들은 또 다시 상처받고 죽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갇힌 진실은 도처에 있지만 그 원인은 제거하지 않은 채 전자발찌를 채우고, 얼굴을 알리고, 문패를 세우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안심하며 되돌아서는 순간 우리는 더 큰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 함께 보면 좋은 책 :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은수연, 이매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