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거세개탁(擧世皆濁)에 숨겨진 참뜻

windshoes 2012. 12. 24. 11:09

<교수신문>은 해마다 그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전국의 교수들에게 설문조사하여 발표하는데 시의적절한 사자성어가 나올 때가 많아서인지, 연말연시 뉴스거리로 삼기 괜찮은 주제인 탓인지 주변 언론들도 곧잘 인용 보도하여 뉴스거리로 삼는다. 올해 2012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는 전국 교수 6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28.1%(176명)가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의 ‘거세개탁(擧世皆濁)'을 선택했다고 한다.

 

'거세개탁'이란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말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있기 힘듦’을 의미할 때 쓰이는 말이다. 굴원이 모함을 받고 쫓겨나 강가를 거닐 때 한 어부가 “어찌 이 꼴이 되었느냐”고 묻자, “온 세상이 흐려 있는데 나만 홀로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 그래서 쫓겨났다(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 是以見放)”고 답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다만 이뿐이었다면 굴원의 《어부사(漁父辭)》가 시대와 세월을 거슬러 남겨진 수많은 한시(漢詩) 중에서 명시(名詩)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그런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시로 남았거나 잘해야 굴원이라는 굴곡많은 한 사대부가 남긴 비탄에 젖은 남긴 시 한 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어부사(漁父辭)》

 

屈原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于斯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而歠其釃 何故深思高擧 自令放爲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굴원이 추방되어 강과 호숫가를 이리저리 떠돌며 시를 읊고 방황하니 안색은 초췌하고 몰골이 마르고 시들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초나라 삼려대부가 아니시오? 어찌 이곳에 이르러 방랑하시오?” 굴원이 말했다. “세상이 모두 탁해졌는데 나 홀로 맑고 바르고자 했으며,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몽롱하거늘 나 홀로 술 깨어 있고자 했노라. 이런 연유로 추방되었노라.” 어부가 다시 말했다. “성인은 만사에 엉키거나 얽매이지 않고 능히 세속과 어울려 옮아갈 수 있다 했소. 세인이 모두 탁하다면 왜 그대는 썩은 진창의 물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탁한 물결을 일게 하지 않으시오? 또한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세인이 혼몽하다면 왜 그대는 어울려 술지게미를 먹고 진한 술을 마시지 않으시오? 무슨 까닭에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하여 스스로가 추방되게 하였소?” 굴원이 말했다. “내가 듣길, ‘새로이 머리를 감은 사람은 관을 털어 머리에 얹고, 새로이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고 걸친다.’라고 했소. 그러니 어찌 청결한 몸에 더럽고 구저분한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 묻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어찌 깨끗하고 흰 내가 세속의 더러운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어부가 웃으며 노를 저어 배를 몰아가며 노래를 지어 말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탁하고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 어부가 어딘가로 가 버려 다시 더불어 말을 나누지 못했다. (역: 문태준)

 

거세개탁의 배경 :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주(周)나라가 도읍을 호경(鎬京, 현재의 서안 부근)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BC 770년부터 이후 403년까지 약 360여 년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공자가 편찬한 『춘추』를 토대로 불리기 시작한 이름이고, BC 403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하는데,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이 이 시대에 전국을 유세하고 다니던 사람들의 활동을 기술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봉건제에 기틀을 두고 있던 주(周)나라의 국가체제가 흔들리면서 주의 종주권을 그나마 명목상으로라도 인정하던 춘추시대를 거쳐 이후 주나라의 권위조차 부정하고 제후들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시대가 바로 전국 시대였다.

 

여러 제후국들 중에서 진(秦)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일곱 국가, 서방의 진(秦), 북방의 燕(연), 동방의 제(齊) 그리고 중원의 한(韓)·조(趙)·위(魏), 남방의 초(楚)를 일러 전국칠웅(全國七雄)이라 하는데 굴원은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에게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초나라 회왕이 누구인가? 중국 역사에서 미녀를 좋아하기로 소문난 왕이었고, 암담한 제후였으니 애초에 굴원 같은 충신들을 곁에 두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주군으로는 역량이 부족한 자였다. 게다가 굴원 역시 정적(政敵)들과 자주 충돌했다는 것으로 보아 자기주장에 대한 믿음이 강하여 융통성이 부족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주변에 정적을 많이 만드는 편이었으리라는 건 능히 짐작이 된다.

 

전국시대에는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진나라가 가장 강성하였기 때문에 나머지 여섯 나라들은 진에 대항하여 살아남기 위한 국가전략을 수립해야만 했다. 당연히 여러 주장들이 나와 경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나머지 여섯 나라들이 위에서 아래로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소진(蘇秦)의 합종론(合縱論)과 이들이 연합할 수 없도록 막아 진나라의 고립을 막으려고 했던 장의(張儀)의 연횡론(連衡論)이 가장 큰 힘을 얻었다. 굴원은 초나라가 제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에 속했으나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연횡파(連衡派)와 초 회왕의 애첩(愛妾)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권좌에서 밀려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진의 모사(謀士)인 장의는 제·초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초나라에 잠입하여 신하들 사이에 자기편을 만들고, 장의와 간신들의 변설과 감언이설에 넘어간 초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한 뒤 영토를 약속한 진나라에 땅을 요구하였으나 한껏 비웃음만 당하고 만다. 격분한 초 회왕은 분을 참지 못하고 무리하게 출병하였으나 조나라에마저 배신당하고 두릉(杜陵)에서 대패하고 만다. 진나라는 화평의 조건으로 계책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진해서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를 석방하고, 초 회왕을 폐위하여 진나라에 보내도록 요구했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급히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린 뒤였다.

 

초 회왕은 자식들에 의해 폐위되어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로 진나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막내 자란은 자신의 아버지를 객사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였으므로, 굴원은 이를 비난하다가 다시 죄를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는데 《어부사(漁父辭)》는 이때에 남겨진 작품이다. 《사기》에 실려있는 <회사부(懷沙賦)>는 굴원이 마침내 분을 참지 못하고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였다.

 

굴원의 또 다른 목소리, 어부

《어부사(漁父辭)》를 찬찬히 읽어보면 굴원(사대부, 지식인)이 추방되어 방황하는 동안, 그를 알아본 한 어부(민중)와의 대화를 시로 옮긴 것이다. 먼저 어부가 그를 알아보고 묻기를 ‘자네는 삼려대부에 속하는(국가운영에 책임이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 초췌한 모습으로 강가나 방황하고 있소?’하고 묻자 굴원은 ‘세상이 모두 더러워졌는데 나만 깨끗하게 굴다 보니 이렇게 되었소’라고 답한다. 굴원의 대답 속에는 초나라(세상)가 망하게 된 것에 대한 원망도 있지만, 자신의 책임보다는 그의 주장에 귀기울여주지 않은 세상(초나라)에 대한 한탄이 녹아있다. 그의 말을 들은 어부가 말하길 ‘자네는 세상이 더러워서 자네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만약 자네가 깨끗하게 산다는 명분보다 주변에 더 많은 동료들을 포용하고, 이들과 함께 임금에게 좀더 현명하게 간언하였더라면 그런 세상에서라도 희망을 만들어내고,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어부의 힐난어린 목소리에 굴원이 재차 변명하기를 ‘세상이 이토록 더러운데 내가 어찌 그 속에서 나의 뜻을 굽히고, 그런 자들과 통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네’라고 말한다. 그러자 어부가 웃으며 말하길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럽다면 발을 씻으면 되지’라며 융통성 없는 굴원의 어리석음을 조롱한다. 굴원은 어부와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미 그는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보이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과연 굴원이 강가를 헤매다가 정말로 현명한 어부를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어부사(漁父辭)》 속에 등장하는 현명한 어부 역시 사실은 굴원의 다른 페르소나가 들려주는 목소리였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그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며 충성을 다했던 초나라의 멸망은 정해졌고,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전 회한으로 가득했던 굴원은 어부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의 과오 - 강직하였으나 융통성이 없었던 - 에 대해 고백하고 성찰한 것을 시로 남겼다는 뜻이다.

 

중국인들의 세계화,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목소리, 거세개탁

<교수신문>에는 2012년의 사자성어로 ‘거세개탁(擧世皆濁)'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할 지식인과 교수들마저 정치참여를 빌미로 이리저리 떼거리로 몰려다니고, 진영논리와 당파적 견강부회가 넘쳐나 세상이 더욱 어지럽고 혼탁하다”며 “이명박 정부의 공공성 붕괴, 공무원 사회의 부패도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해법과 출구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고 거세개탁을 추천한 이유를 밝혔다. 김민기 숭실대 교수(언론홍보학)는 “MB정부의 부패, 공공성의 붕괴, 분노사회 등 우리사회의 문제를 직시했다”, 김석진 경북대 교수(경영학)는 “모든 것에 획일적으로 시장과 경쟁의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근시안적 접근으로 자신의 이익만 우선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이것만이 ‘거세개탁(擧世皆濁)'의 의미였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들의 근거도 나름 일리가 있겠으나 나는 2012년 ‘거세개탁(擧世皆濁)'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된 절묘한 까닭의 이면에는 크게 두 가지의 함의(含意)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사 남 탓하기 좋아하는(선거 패배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작태들을 보라) 우리 사회에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더러움을 질타하지만 정작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그 세상을 변화시켜야 했음에도 자신의 무지와 무능으로 인해 실패한 세력들(지식인, 정치인, 진보개혁세력)에게 던지는 어부(민초)의 질타가 이 사자성어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중국 대륙이 곧 천하(天下)였다. 그런 의미에서 춘추전국시대는 그들이 20세기 말엽 개방개혁시대를 거치며 만나게 된 ‘21세기의 세계화’ 이전에 경험한 ‘고대의 세계화’였던 셈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천하쟁패는 정치·경제·사회제도의 급격한 변모를 이끌며 중국 대륙을 뒤흔든 세계화였고, 그 당시 변화의 속도와 진폭은 오늘날 디지털 문명의 세계화를 능가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였다.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제후국들은 봉건적 신분질서를 뒤흔들었고, 무한경쟁을 통해 토지 소유의 제한이 폐지되어 백성들에게도 사유제가 허락되었으며, 부유한 계층은 더욱 넓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농경법도 기술적으로 진보하여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에서도 철기가 사용되었고, 소(牛)를 농사에 이용하게 되면서 수확량이 증대되었다. 농경을 위한 수리관계 공사를 위해 천문지리와 같은 학문도 발달하면서 생산력이 더욱 증대된 만큼 상공업도 발달하여 도시에는 상설시장이 생겨나면서 금속으로 주조된 화폐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은 이미 춘추시대 중기 이후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루어졌던 문물의 눈부신 발전은 훗날 진시황에 의한 천하통일과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한나라가 이후 중원의 패자가 되어 세계최대의 제국으로 자리 잡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공후(公侯)를 주군(主君)으로 모시는 의리와 능력만이 중시될 뿐 신분과 출신,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자본의 국경 없는 이동 못지않은 대단한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나 글로벌리즘(globalism)이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 그런 맥락에서 굴원의 《어부사(漁父辭)》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역시 남다를 것이다.

 

天下非一人之天下 天下之天下

춘추전국시대라는 이른바 ‘난세(亂世)’를 거치며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의 고통 속에서 중국(인)의 문화적 심성구조에는 국가(임금)권력에 대한 충의(忠義)와 다른 맥락에서 백성에 대한 충의로서 의협(義俠)의 세계관이 출현한다. 그러나 의협의 세계가 최종적으로는 판타지나 무속(巫俗)의 세계로 후퇴하게 된 것은 현실정치에서 민중의 정의를 의미하는 의협이라는 대의명분이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운 정치인지 반증한다. 또 민중의 정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의협의 세계가 민중들에게 항상 존중받을 수는 없었다는 것 역시 주목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굴원의 또 다른 페르소나인 어부의 목소리를 통해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 어부(민초)가 원하는 이상적 사대부(지식인이자 정치세력)란 대의에 입각해 홀로 깨끗하고 고결한 명분의 수호자가 아니라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선택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평화와 갈리아의 평화가 동일한 의미일 수 없듯 왕의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백성의 태평성태와 같은 의미일 수 없는 것이다. 굴원이자 곧 어부인 작중화자의 회한은 민중의 정의를 표방하는 의협과 대의명분이라 할지라도 무능하여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거나 백성을 설득할 수 없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대의명분이란 결국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천하관이란 천하도리를 논하는 이념인 동시에 현실정치를 반영한 철저한 실용주의이기도 하다. 백성들은 유능하지 못한(실패한) 의협도 판타지나 무속의 세계에서 신(神)과 영웅으로 떠받들지만 현실정치에서는 그 고통이 극에 달하여 반역(변혁) 이외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거나 확실한 대안을 보여주기 전에는 선택하는 법이 없다.

 

무릇 천하를 논하고, 민중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天下非一人之天下 天下之天下(천하는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며 천하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것)”라는 말을 가슴에 새길 일이다. 《육도(六韜)》에 나오는 말이다.



* 신중국 건국 시기, 좀더 정확하게는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침탈을 받게 된 중국에서 굴원은 민족적 이상을 재현하는 인물로 높이 표상되는데 특히 곽말약은 망국의 위기에 처한 중국인들에게 일본을 비롯한 외세저항의 상징으로 굴원을 첫 손에 꼽아 굴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단오절에 용주(용머리를 한 배)를 타고 강가에 나가 떡과 과자를 뿌리며 굴원을 기리는 풍습을 지켜왔는데 이것은 물고기들이 투신자살한 굴원의 사체를 훼손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