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존 바에즈 : Mary Hamilton - 한 곡의 노래로 보는 파란만장 영국사

windshoes 2013. 1. 28. 17:55

<다시 듣는 이 한 곡의 노래> 존 바에즈 : Mary Hamilton
- 한 곡의 노래로 보는 파란만장 영국사





Word is to the kitchen gone, and word is to the Hall
And word is up to Madam the Queen, and that's the worst of all
That Mary Hamilton has borne a babe To the highest Stuart of all

소문은 부엌으로 번지고, 소문은 궁정으로 번져서,
마침내 여왕의 귀에도 들어갔네,
메리 해밀튼이 아이를 낳았다고, 그것도 가장 고귀한 스튜어트 왕통의 아이를...

Arise, arise Mary Hamilton Arise and tell to me
What thou hast done with thy wee babe I saw and heard weep by thee

“일어서거라, 일어서 메리 해밀튼, 일어나서 내게 말해보거라.
네 갓난아기는 어떻게 하였느냐? 나는 흐느낌소리와 눈물을 보았노라"

I put him in a tiny boat And cast him out to sea
That he might sink or he might swim But he'd never come back to me

“그 아이를 조각배에 담아 먼 바다로 띄워 보냈사옵니다.
물에 빠져 죽었을지 어쩌면 살았을지도 하지만 두 번 다시 제게 돌아올 수는 없겠죠."

Arise arise Mary Hamilton Arise and come with me
There is a wedding in Glasgow town This night we'll go and see

“일어서거라, 일어서 메리 해밀튼,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꾸나.
글래스고에 결혼식이 있단다. 오늘 밤 우리 함께 보러 가자꾸나."

She put not on her robes of black Nor her robes of brown
But she put on her robes of white To ride into Glasgow town

그녀는 검은 예복을 입지 않았고, 갈색 예복도 치워버렸어요.
오히려 새하얀 예복을 입고 글래스고로 나섰죠.

And as she rode into Glasgow town The city for to see
The bailiff's wife and the provost's wife Cried ach and alas for thee

그리고 그녀가 글래스고 시내에 들어설 때, 온 도시가 쳐다봤죠
행정관 부인과 시장 부인이 외쳤어요, "아, 어쩌나, 가엾게도."

You need not weep for me
she cried You need not weep for me
For had I not slain my own wee babe This death I would not dee

"아, 저를 위해 울지 마세요."
그녀는 말했네, "저를 위해 울지 마세요.
제가 낳은 제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전 이렇게 죽지 않았을 걸요."

Oh little did my mother think When first she cradled me
The lands I was to travel in And the death I was to dee

"아, 나의 어머니는 몰랐겠지. 나 어릴 적 요람을 흔드실 때는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또 어떤 죽음 맞게 될지.“

Last night I washed the Queen's feet And put the gold in her hair
And the only reward I find for this The gallows to be my share

"어젯밤 나는 여왕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머리에는 금장식을 얹어 드렸죠.
그 대가로 오늘 받는 보상은 이것뿐, 교수대가 바로 제 몫이네요.“

Cast off cast off my gown she cried But let my petticoat be
And tie a napkin round my face The gallows I would not see

"벗겨요, 제 예복을 벗겨 가세요. 하지만 제 속치마만은 그냥 두세요.
수건으로 제 얼굴을 가려주세요. 교수대를 보고 싶지 않으니."

Then by them come the king himself Looked up with a pitiful eye
Come down come down Mary Hamillton Tonight you will dine with me

그때 왕이 납시어, 가여운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네요.
"내려오너라. 내려와, 메리 해밀튼. 오늘 밤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누자."

Oh hold your tongue my sovereign liege And let your folly be
For if you'd a mind to save my life You'd never have shamed me here

"오, 그런 말씀하지 마소서, 존엄하신 전하, 정말 덧없는 말씀,
제 목숨을 구하려하셨다면 절 이렇게 욕보이진 않으셨겠죠."

Last night there were four marys tonight there'll be but three
It was Mary Beaton and Mary Seton And Mary Carmichael and me.

어젯밤까지는 네 명의 메리가 있었죠. 하지만 오늘 밤엔 셋만 남겠네요.
그 네 명은 메리 비튼, 메리 시튼, 메리 카마이클과 나였지요.




16세기 스코틀랜드 민요였던 <Mary Hamilton>은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민요를 모던포크의 디바인 존 바에즈가 불러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노래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 중 한 분이 칠판에 가사를 적어놓고 가르쳐주어 어릴 적 배운 노래가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1972)>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 노래를 처음으로 번안한 사람은 당시 이화여대에 재학하고 있던 방의경이 1971년 서울대 문리대 축제에서 부르기 위해 번안한 것이 최초였다고 한다.

방의경이 이처럼 슬픈 노래 가사를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로 바꿔 부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당시의 엄혹했던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노랫말 역시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방의경이 이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작사·작곡자를 확인할 수 없는 민요들 역시 당시 시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어 노래 가사를 조금씩 뒤틀곤 한다. 그래서 어떤 노래가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한다고는 하더라도 가사가 역사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였던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등극이라는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사의 내용은 왕국의 궁정이 배경이다. 왕비의 시녀였던 매리 해밀튼은 왕의 눈에 들어 정사를 나누고 그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지만 왕의 아이를 키울 수 없어 죽이게 되고 결국 왕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왕이 왕비의 시녀와 눈이 맞아 아기를 낳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가사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경우를 영국에서 찾다보면 누구라도 금방 헨리 8세와 그의 불운했던 왕비들이 떠오른다.






헨리 8세의 불운한 여섯 왕비들
1509년 헨리 8세는 온 백성들의 축복과 환희의 축제 속에 즉위했다. 그러나 장자가 아니었던 헨리 8세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형 아서가 1502년 사망한 덕분이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헨리 8세에게 부왕의 유언집행인들은 미망인이 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도록 강권했다. 왕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형수와 결혼했지만 한동안 헨리 8세는 행복했다. 스페인 아라곤의 왕족 출신인 왕비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왕권을 강화시켜주었고, 아이도 다섯 명이나 낳아주었다.

문제는 그 가운데 오직 메리 공주(1516년)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헨리 8세는 왕은 튜더 왕조의 운명을 이어갈 남자 상속인의 확보를 바랐지만 캐서린은 임신연령을 넘어섰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는 사이 왕은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영화 <천일의 앤>의 바로 이 앤이다)을 탐했는데 그녀는 결혼에 대한 보장 없이는 이에 응하지 않으려 들었다. 만약 헨리 8세가 합법적 권위에 연연하지만 않았다면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혈기왕성한 왕이었고,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이 있었다. 그는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빚고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반포한다. 이로써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성립하게 되었지만 홀로 고립될 것이 두려웠던 헨리 8세는 무력을 앞세워 스코틀랜드로 하여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결별하고 잉글랜드와 통합하도록 윽박지른다.

헨리 8세의 결혼 행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대충의 개요 정도만 소개해보면 앤 불린이 왕과 결혼할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는데, 1533년 9월에 장차 엘리자베스 1세가 될 딸을 낳았다. 헨리는 그녀가 아들이 아니어서 몹시 실망한데다가 1536년 1월 앤이 남자 아이를 유선하게 되자 신(神)이 자신의 결혼을 저주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왕은 앤 불린을 궁정에 유폐(1536년 5월)하고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한다. 그러나 제인 역시 아들 에드워드 왕자를 출산한 후 후유증으로 12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의 에드워드 왕자가 훗날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이다. 제인 시모어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유럽 내부에서 동맹을 찾기 위해 클리브스(Cleves)의 앤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가문에 비해 교양도 부족했고, 원했던 동맹마저 성사되지 않자 곧바로 이혼해 버렸다. 그 다음이 캐서린 하워드였는데 그녀 역시 전처인 클리브스의 앤의 시녀였다. 그러나 캐서린 하워드 역시 1542년 2월 간통죄로 처형당한다. 헨리 8세는 1543년 7월 온화한 성격에 인문학적 교양이 넘치는 캐서린 파(Parr)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그녀가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였다. 여기까지는 대략 <매리 해밀튼(Mary Hamilton)>의 가사와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라 메리 해밀튼을 죽게 만든 왕이 헨리 8세일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도 아니고, ‘앤’도 아닌 ‘메리’였을까?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와 에드워드 6세
여섯 번의 결혼으로 헨리 8세가 남긴 자식들은 첫째 부인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메리, 둘째 부인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에드워드  뿐이었다. 제인 시모어가 에드워드를 낳고 불과 12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눈을 감을 때까지도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가 제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을지 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남긴 유일한 정통 혈육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와의 결혼을 추진한다.

메리 스튜어트는 아버지 제임스 5세가 남긴 스코틀랜드 왕실의 혈통은 물론, 어머니 마리 드 로렌을 통해 프랑스의 피가, 그리고 할머니 마가렛을 통해서는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헨리 8세는 아들 에드워드와 메리를 결혼시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병합을 추진했는데 스코틀랜드가 이를 거절하자 1544년 하포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를 앞세워 스코틀랜드를 침공한다.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영내에 침입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며 에든버러를 불태웠지만 메리는 무사했다. 이것이 이른바 ‘난폭한 구혼(Rough Wedding)’이라 불리게 된 사건이었다.

결국 에드워드 왕세자와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에 실패한 헨리 8세는 헨리는 마지막 칙령을 내려 에드워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위원회로 하여금 정사를 돌보도록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추기경 그랜머에게 에드워드를 부탁했다.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의 외삼촌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섭정을 자청하고 나서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였지만 워릭 백작(뒤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에게 숙청당하고, 실권은 노섬벌랜드 공작이 차지하게 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시대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산업혁명의 기틀이 된 양모 생산과 모직물 산업이 영국의 기간산업으로 뿌리내린 시대이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단지 그의 결혼과 이혼만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이와 같은 경제적 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따른 부작용만큼이나 이와 같은 경제적 격변에 따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양모 산업을 통해 이득을 얻었던 젠트리 계급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울타리를 그음(엔클로저운동)으로써 농민들의 고통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 묘사되듯 실제로 에드워드 6세는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하고, 파괴된 농지의 부흥과 경작을 유도하기 위해 젠트리 계급에게 1인당 2천 마리 이상의 양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젠트리 계급은 친척의 명의를 빌어 양을 소유하는 편법을 사용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로버트 케트와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농민들을 부추겨서 폭동을 일으키는 등 에드워드 시대의 사회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던 1553년 1월, 에드워드에게 처음으로 결핵 증세가 나타났다. 그리고 5월이 되면서 왕의 병세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확실한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태에서 왕이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은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다툼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헨리8세가 우려했던 혈통을 잇지 못하게 될 사태가 발생했다. 에드워드 6세가 죽는다면 왕위계승권은 헨리 8세가 규정(1544년 왕위계승법)한 대로 메리에게 있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손에 있었고,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가 왕위에 오른다면 국교회 신자였던 자신은 물론 여러 귀족들의 지위마저 불안해질 것이라 생각해 에드워드 6세를 부추겨 자신의 며느리이자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로 하여금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고, 그녀의 아들들도 왕위 계승 서열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 얼마 후 마침내 에드워드가 죽고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르자 기존의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던 메리와 제인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블러드 메리 vs. 제인 그레이
헨리 8세의 장녀였던 메리는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후계자이자 외가인 스페인 아라곤 집안의 후광을 입어 줄곧 유럽 왕실들의 구애를 받아왔지만 이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왕위 계승을 기다려왔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한 뒤 새 왕비가 된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1세)를 낳은 뒤, 메리가 부모와 만나지 못하도록 막았고, 헨리가 캐서린과 이혼하면서 사생아 신세가 된 메리의 왕위 계승 자격마저 박탈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앤 불린은 메리를 어린 엘리자베스 앞에서 시녀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메리는 스페인으로 쫓겨난 어머니 캐서린과 비밀리에 편지를 교환하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앤 불린과도 헤어진 헨리 8세는 얼마 뒤 메리를 궁으로 불러 메리에게 아버지인 자신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고, 어머니 캐서린과의 결혼이 ‘근친상간에 따른 불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딸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처음엔 제안을 거부했지만 사촌인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설득에 따라 제안을 받아들인 메리는 신분이 회복되었다. 이후 메리는 헨리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의 아들 에드워드 왕세자의 대모가 되기까지 하였다.

미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노래를 잘하고 말솜씨가 있는 데다 왕위 계승 서열도 높아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주였던 메리지만 아버지의 이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평생 ‘사생아’라는 딱지를 멍에처럼 짊어져야 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는 ‘성공회’를 선포한 후 예배에서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남들 몰래 자신의 개인예배실에서 예전대로 가톨릭 미사를 올리다가 발각되어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누이들(메리와 엘리자베스)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목숨만은 빼앗고 싶지 않았던 에드워드 6세의 배려 덕분에 간신히 무마될 수 있었다.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간계로 눈앞에서 왕위를 빼앗긴 메리는 노포크로 몸을 피신했는데, 이곳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불운을 동정하는 분위기를 간파한 메리는 다른 귀족들을 규합해 의기양양하게 런던으로 돌아왔다. 메리는 제인 그레이와 노섬벌랜드 공작을 런던탑에서 참수하고 37세의 나이로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 메리 1세로 즉위했다. 불과 9일 간 통치자의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던 제인 그레이는 눈이 가려진 채 참수당하는 순간까지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라면서 참관인들을 향해 흐느꼈다고 한다.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지지했던 귀족과 민중들은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던 메리가 현명한 여왕으로 처신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곧 이들의 기대가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영국국교회를 파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국가로 환원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수도원 정리로 새로운 토지와 재산을 얻은 귀족들은 가톨릭 환원을 반대했다. 또 의회에서는 왕가의 혈통을 지닌 사촌 데번 백작 코트니를 결혼상대로 천거했지만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메리는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자기보다 11살이나 연하였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의회가 반대하자 메리 여왕은 “결혼은 내가 하는 것이다”라며 화를 내면서 의회를 적으로 만들었다.

토마스 와이어트(Thomas Wyatt)경이 이끄는 신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메리는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반란군에 맞섰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처형당했다. 반란을 진압한 메리 여왕은 예정대로 펠리페와 결혼했고, 이어서 가톨릭에 반발하는 신교도들을 반란자로 몰아 제거할 목적으로 이단처벌법을 부활시켰다. 메리 여왕의 재위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짧았지만 이 기간 동안 3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단자이자 반란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것이 그녀를 ‘피의 메리(Blood Mary)’라고 부르게 된 이유였다. 그녀의 악명은 훗날 금주법 시대의 미국에서 주류단속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칵테일 이름으로 부활하는데 토마토주스에 진을 섞은 칵테일이 붉은 핏빛이라 하여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 불렸다.

그녀에 대해 동정적이었던 국민들이 차츰 메리 여왕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비난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 와중에 메리 여왕은 남편인 펠리페 2세의 왕국인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다가 프랑스에 있던 마지막 잉글랜드 영토(칼레)마저 상실하며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건강을 잃은 메리는 암에 걸렸고, 펠리페 2세와의 사이에서 몇 차례 상상 임신은 있었지만 끝끝내 자녀를 갖지 못한 채 1558년 11월 17일 눈을 감았다.


엘리자베스 vs. 메리 스튜어트
1558년 11월 17일, 영국 최초의 여왕 메리 1세가 죽자 지금까지 런던탑에 갇혀있던 25세의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해 화려한 대관식을 치른다. 대관식을 마치고 나오던 그녀에게 군중 속에서 한 소녀가 메리 시대에는 금지되었던 영역판 성서를 바쳤는데 감격에 찬 여왕은 그 책을 받아들어 입을 맞추고 높이 들어올린 다음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수많은 국교도들이 환호성을 질렀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다른 한 편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대낮에 촛불을 들고 나오자 여왕은 큰 소리로 “그 촛불들을 치워라! 그것 없이도 우리는 이제 잘 볼 수 있노라”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든, 아니면 엘리자베스 1세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여왕의 치세를 가늠하기엔 충분한 이벤트들이었다.

앞서 그녀의 경쟁자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 여왕이 사라지고, “짐은 영국과 결혼하였노라”라며 최대의 치세를 성취한 여왕으로 칭송받지만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헨리 7세의 손녀이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8세가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강제로 결혼시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던 상대였다. 헨리 8세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생후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5세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잉글랜드의 침공 ‘난폭한 구혼(Rough Wooding)’으로 위기를 맞이한 스코틀랜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했고, 잉글랜드를 물리친 뒤 메리 스튜어트를 자신의 맏아들(프랑소와)과 결혼시키기 위해 프랑스로 데려갔다. 프랑스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한 메리 스튜어트는 16세에 소꿉친구나 마찬가지였던 프랑소와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인 1559년 7월 앙리 2세가 신하인 몽고메리 백작과의 마상시합에서 눈에 창을 맞고, 10일 뒤에 파리에서 갑작스레 죽었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 프랑소와 2세는 프랑스 왕에 즉위한다.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면서 잉글랜드의 정통 왕위계승권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의 안락한 궁정에서 성장한 메리 스튜어트는 영국 왕실의 복잡한 권력 승계 절차를 지켜보면서도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라 여기기보다 혈통에 의거해 당연히 따라오는 권리 정도로 인식했다.

왕비가 된지 1년 만에 병약했던 남편 프랑소와 1세가 갑자기 사망하고, 자신이 ‘장사꾼의 딸’이라 경멸했던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가 권력을 잡게 되자 프랑스 궁정 내에서 그녀의 위치는 현격하게 약해졌다. 때마침 자신을 대신해 스코틀랜드 섭정을 맡고 있던 어머니 마리 드 기즈가 죽으면서 메리 스튜어트는 불현듯 자신이 5살 무렵 떠나온 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땅 스코틀랜드를 통치할 의무가 생겼다.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이복 오빠인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에게 스코틀랜드 통치를 위임하고, 자신은 프랑스 왕궁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남편을 잃은 힘없는 과부로 프랑스 궁정에 남을 바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하루를 살더라도 왕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불과 19세였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스코틀랜드 정국은 종교분쟁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에는 태어날 때는 적자(嫡子)였으나 나중에 서출이 되면서 즉위하기 전까지 런던탑에 갇혀 목숨과 권력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던 엘리자베스 1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귀여움과 아첨을 받으며 성장한 메리 스튜어트는 애초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국가와 결혼한 여왕과 남자를 사랑한 여왕
역사는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여왕을 최대의 라이벌로 만들었는데, 그 뿌리는 아버지 헨리 8세에게 있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이혼하고 그녀를 처형한 뒤 엘리자베스를 서출이라고 공표했기 때문에 왕으로 즉위할 명분이 취약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추대한 세력은 메리 1세에게 핍박받던 영국 국교회 세력이었지만 메리 1세 여왕을 추대했던 영국의 가톨릭 세력은 여전히 엘리자베스 1세가 서출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녀를 대신할 왕위계승권자로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스튜어트가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서출이라면 헨리 8세에겐 적통 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제1 왕위 계승권은 메리 스튜어트의 할머니, 헨리 7세의 딸이자 헨리 8세의 누나였던 마가렛 튜더에게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의 행복한 왕비였다면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남편을 잃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지만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가 왕위에 오른 것을 축복해주지 않았다(다시 말해 왕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또한 실제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된 것도 아니면서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 왕관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자신에 앞서 오랫동안 섭정을 해온 이복 오빠 제임스 스튜어트 모레이 백작과 공종하며 권력을 안정적으로 분배했고, 스코틀랜드 내부에 싹트고 있던 프로테스탄트를 배척하지 않는 등 제법 안정적인 통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의 가장 큰 문제는 결혼과 사랑이었다.

20대 초반에 혼자된 메리 스튜어트의 결혼 문제는 혼인을 통해 권력을 나누어 가졌던 당시 유럽 왕실의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녀가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물론 유럽 전체의 세력이 재편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메리 스튜어트의 일거수일투족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만약 메리 스튜어트가 스페인처럼 강력한 가톨릭 국가와 결혼한다면 잉글랜드와 자신의 왕위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의 마음을 빼앗은 남자는 스페인 국왕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내부에 있었다.

그녀는 훤칠한 미남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귀족이자 자신과는 사촌관계가 되는 헨리 스튜어트 단리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헨리와의 결혼은 그녀에게 커다란 재앙이 되었는데 제일 큰 문제는 훤칠한 외모에 빠져 결혼하고 나서보니 그가 골빈 남자였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내심 메리 스튜어트가 외국의 왕과 결혼해 비록 섭정이라도 스코틀랜드의 통치권을 독점하길 바랐던 이복오빠의 실망, 세 번째는 왕위계승권을 가진 두 남녀(헨리 단리 역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의 결합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를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레이 백작은 반란을 일으켰고 해외로 망명했다가 그녀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여 귀국했지만 호시탐탐 자신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메리 스튜어트를 몰아낼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헨리 단리가 아내를 의심해 임신 중이던 메리 스튜어트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비서 다비드 리치오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편에게 그나마 있던 정(情)마저 떨어진 메리 스튜어트는 남편을 유폐시키고, 새로운 남자 제임스 햅번 보스웰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남자는 헨리 단리보다도 더 악질이었다.

그는 바람둥이 불한당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여왕을 납치해 감금한 채 강간(?)했고(이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마다 보는 관점이 약간씩 다른데 두 사람이 밀월여행을 갔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여왕이 납치되었다고 관점이 있다. 어쨌든 여왕은 임신했다), 여왕의 남편인 헨리 단리를 그가 유폐된 집에 불을 질러 죽게 만들었다. 여왕은 남편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에 보스웰 백작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마저 여왕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명분을 얻은 모레이 백작은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여왕은 반대파에게 사로잡혀 이제 막 한 살에 불과했던 자신의 아들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강제로 양위해야만 했다. 왕위를 빼앗긴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이것이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위계승을 다투는 제1의 라이벌이자 바로 얼마 전까지 그녀에게 최대의 치욕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메리 스튜어트의 망명은 뜨거운 감자이자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자신들의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게다가 친척이자 같은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왕위를 되찾아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파란만장한 여왕들의 통치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치적으로 매우 교묘한 방법을 이용해 메리 스튜어트를 처리했는데 우선 왕이기 때문에 남편의 죽음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명분을 들어 재판 대신 질의란 형태로 실질적인 재판을 받게 만들었다.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번엔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적(위기)을 가까이 두고 감시(관리)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다고 여긴 엘리자베스 여왕의 판단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를 겉으로는 국빈으로 대접해 연금을 지급하고, 수행원(물론 이들 중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스파이들도 있었다)들을 고용해주었지만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메리 스튜어트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 스튜어트 역시 엘리자베스의 의도를 간파했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엔 결코 이 연금 상태가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메리 스튜어트 역시 겉으로는 자신의 보호자이자 당고모이기도 한 엘리자베스를 위해 기도나 하며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뒤로는 가톨릭 세력과 연계해 엘리자베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메리 스튜어트의 주변엔 이미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 측근의 간자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헛된 노력들은 이미 여왕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같은 왕족이라는 이유로 메리 스튜어트를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나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여왕의 측근들도 애가 닳기 시작했다.

만약 엘리자베스 여왕이 메리 스튜어트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가톨릭 신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또다시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장관들은 “그녀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이 있고, 그들이 희망 속에 사는 한, 우리는 공포 속에 살게 된다”고 메리 스튜어트의 죽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충복인 월싱엄의 계략에 말려 가톨릭 신자였던 앤터니 배빙턴의 모반 계획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고 말았다.

메리 스튜어트는 모반죄로 유폐된 지 19년만인 1587년 2월 7일, 잉글랜드의 노샘프턴셔에 있는 포더링헤이 성의 커다란 홀에서 집행되었다. 당시 메리 스튜어트의 나이는 44세로, 마지막까지 비극적인 인물로 남았다. 사형 집행인의 솜씨가 서툴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목을 잘라내기 위해 두 번의 도끼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일화 중 하나는 그녀가 귀여워하던 애완견이 치맛자락 아래로 기어들어와, 죽은 여왕의 시신에서 떠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때 그녀는 가톨릭을 상징하는 붉은 색 페티코트(속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불운했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와 아버지 헨리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는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지만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 때 할머니 메리 스튜어트처럼 왕으로 처형당하고 만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이어지는 시기 영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메리’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여왕과 ‘엘리자베스’란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여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명의 메리는 피의 여왕이란 오명을 쓰고 죽었고, 나름 한 명의 여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쳐 보이기도 전에 목이 잘렸다. 다른 한 명의 여왕은 두 명의 여왕과 경쟁하며 오늘날까지 칭송을 받는다. 흔히 영국은 여왕의 치세기간에 흥했다고들 하지만 앞서 우리는 몇 명의 여왕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치세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의 민요 <Mary Hamilton>이 이런 영국사를 반영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한 번쯤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가 어째서 <아름다운 것들>이란 제목의 노래 가사로 번안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긴 글을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