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의 특별사면과 아이러니의 한국 정치
사면은 법무부장관이 나서서 직접 발표하는 게 관행입니다. 사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특정한 범죄로 유죄를 받은 사람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일반사면이고, 특정한 사람을 지정해 죄를 사해 주는 것은 특별사면입니다. 흔히 ‘특사’로 줄여서 말하는 특별사면의 적확한 의미는 ‘특별한 사면’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을 지정하는 사면’ 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고, 대통령이 베푸는 은전이라는 성격이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특별사면은 5공과 6공 군사정권 시절에 훨씬 더 자주 단행됐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시절, 악법으로 꼽히는 국가보안법이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감옥에 가두어졌지만, 두 대통령은 수시로 사면을 단행해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여론이 좋지 않다’ 싶으면 1년에 두어 차례씩 사면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씨도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은전(?)이라는 특별사면을 받아 목숨을 부지했고, 복권을 통해 다시 정치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범법자를 잡아들여 벌을 주는 하수인들은 따로 있고, ‘국민 통합을 위해’(이 당시 사면을 단행할 때마다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마음씨 좋은 대통령’(?)은 따로 있었던 셈입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이 시절 특별사면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었습니다. 또 사면을 발표하는 당국도 ‘국민 통합 차원에서 공안사범도 대거 사면에 포함시켰다’는 점을 꼭 발표문의 서두에 포함시켜 사면을 발표하곤 했습니다.
문민정부 시절의 첫 번째 특별사면은 김두희 법무부장관 재임 중에 단행됐습니다. 김 장관은 검찰총장에 이어 곧바로 법무부장관이 되었는데, 그럴 만한 실력과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습니다. 사면은 광복절처럼 특별한 날에 맞춰 단행되기 때문에 미리부터 기자들이 그 내용을 알기 위해 취재를 벌입니다. 하지만 법무부관리들은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만큼, 사전에 귀띔도하기 어렵다’며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지라도, 사면의 대체적인 기준과 대상자는 법무부에서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합니다. 청와대에서는 사면의 기준에 대해서는 법무부의 안을 받아들이면서도, 특정한 인물 몇 명을 사면에 포함시키라고 지시한다고 합니다.
특별사면 발표가 예정된 시각 오전 11시, 김두희 장관이 직접 발표문을 낭독하고 대상자를 발표했습니다. 당시에는 서석재 전의원이 특별사면에 포함될 것인지 여부가 기자들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서씨는 동해시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지 채 100일이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별사면이 아무리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지라도, 대법원 유죄판결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면한다면, 지나치다’는 게 당시의 여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씨는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됐고, 김두희 장관은 이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물론 서씨에 대한 특별사면은 불가피하다는 일부 여론도 있었습니다. 서씨는 3당 합당 이전에 야당 총재이던 YS를 대신해 옥살이를 했다는 주장입니다. 그 시절에 큰돈을 주고 유력한 상대후보를 사퇴시키는 행위가 당 총재의 묵인이나 지시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당 총재를 보호하기 위해 서씨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고, 그 뒤 YS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실상 국민들이 서씨의 죄를 탕감해줬다’는 논리였습니다. 기자들은 김두희 법무부장관에게 물었습니다. ‘서석재 씨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지 채 1년도 못돼서 특별사면을 단행한다는 것은 3권 분립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장관은 평소 습관대로 잠깐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기자들은 장관의 말을 받아쓰기 시작했습니다. 30초 가량 장관의 답변을 받아 적다가, 기자들이 하나 둘 펜을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장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기자들이 오히려 서로 눈을 맞추면서 당황한 표정이었습니다. 장관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답변으로서 단 한마디도 기사에 인용을 할 수 없을 만큼,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장관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말의 속도는 평소보다 더 느렸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는 시쳇말이 딱 어울렸습니다. 기자들이 먼저 제풀에 지쳤습니다. ‘아주 특별한 특별사면’의 시작은 바로 이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세월이 흘러 광복 60주년이 됐습니다. 60이란 숫자는 동양에서 말하는 환갑과 맞물려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청와대는 특별사면도 단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에도 ‘아주 특별한 특별사면이 있을 것인가’가 기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기자들은 정대철 전 열린우리당 선거대책본부장이 사면에 포함될 것인지에 촉각을 세웠습니다. 정씨는 쉽게 말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뇌물수수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형기도 3분의 1 정도만 마치고, 지병을 이유로 병원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특별사면을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개국공신’으로 평가받는 정대철씨는 특별사면에 포함됐습니다. 특정인을 봐주기 위한 사면이 아니냐고 기자들이 따져 물었습니다. 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괄적 의미로 보면 뇌물이 아닌 정치자금을 받은 것에 해당되는 만큼 사면을 하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뇌물이라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법무부장관이 너무도 손쉽게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특별사면’의 역사는 이렇게 해서 반복됐습니다. 왜 역사는, 특히 ‘별로 좋지 않은 역사’는 반복될까요?
김종화, <아주 특별한 '특별' 사면> 중에서
- (http://imnews.imbc.com/mpeople/rptcolumn/rptcol20/1272391_7071.html)
앞서 특별사면권 남용의 역사를 간단히 살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 대통령 특별사면이 특사로서 그나마 의미 있었던 시절이 전·노집권기였던 것처럼 박정희 추종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억눌렀던 시절도 아이러니하게 전·노집권기였습니다.
민주화와 함께 되살아난 박정희의 망령
박정희 신드롬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출몰하기 시작했는가를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이후의 일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정치적 머슴이나 다름없는 세력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죽음을 눈물로서 애도할지언정 박정희가 남긴 정치적 세력이 재부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정희의 유해를 담은 영구차가 청와대를 나와 광화문을 거쳐 동작동에 이르기까지 연도에 늘어선 국민들은 눈물로 홀아비 독재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지만 이것은 박정희 시대의 부활을 염원했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전두환은 박정희의 정치적 양자에 가까웠지만 현실에서는 죽은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기보다 그와 다른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습니다. 전두환 시절에 이루어진 많은 정책들, 예를 들어 1980년 7월 30일엔 과외금지조치(자기 자녀에겐 과외를 시켰다고 한다)가 그러했고, 1945년 9월부터 37년간 지속된 야간통행금지조치가 1982년 1월 5일 해제되었고, 1983년부터 중고교에 두발 및 교복자율화 조치가 실시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헌법에서 5.16혁명(?) 정신을 삭제했고, 유신 세력이던 구 공화당 세력을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 혐의로 제거하면서 박정희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기로 규정합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뿌리를 부정한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정의 사회 구현'의 신정치 세력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정의 사회 구현 세력이 되기 위해서라도 과거 박정희 정권과 일정하게 선을 그으며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여러 차례 언론에 의해 회상되고, 노출되었던 박근혜 당선인과 신군부 세력 간의 알력과 구원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박 당선인이 용서할 수 없는 자들로 이들 신군부 세력을 지목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가 재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원인은 일정하게 혹은 전적으로 민주화 세력 때문이었습니다. 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세력은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하였고,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민주화투쟁을 통해 확장된 정치 공간은 민주화 세력, 노동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그간 전두환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던 박정희의 잔존 세력들 역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공화당을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고, 이들은 지역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일정하게 부활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결과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유신 세력의 부활을 가져온 셈이었던 것이지요.
기득권 세력의 문화투쟁
박정희 사망 이후 10년이 경과한 시점(1989.10.25.)에 실시되었던 <중앙일보>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더 극명해집니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과오보다 공적이 많았다"는 응답이 전체 61%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선택적으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질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탄압,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실은 쉽게 망각된 반면 '양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경제지표와 생활지표들은 항상 더 많이 부각되었습니다.
박정희의 '과오'보다 이와 같은 '공로'가 더 많이 부각될 수 있는 밑바탕을 놓은 사람이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었습니다. 비록 3당 야합을 통해 집권했으나 김영삼에겐 박정희 정권 말기의 투쟁으로 '민주화의 기수'란 상징을 획득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90%를 웃도는) 지지율을 획득하며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3당 합당을 통해 출범한 태생적 한계 등으로 인한 개혁의 실패, 아들을 비롯한 측근 비리로 인해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애초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정책 실패를 오도하는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실패는 무리한 세계화, 개방 전략으로 IMF체제라는 최악의 위기를 자초했던 것입니다.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은 잇따르는 개혁(?)정책이 자신들의 입지와 기득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오자 거대한 문화투쟁(Kulturkampf)을 기획합니다. 사실 문화투쟁의 원조는 독일 보수주의 정치를 대표하는 비스마르크였습니다. 대외적으로 철혈정책을 통해 제국을 통일했던 비스마르크였지만 대내적으로는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는 개혁세력(사회민주당, 노동자)을 길들이는 방편으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는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채찍이 정치적 탄압이었다면 당근은 복지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정부의 진짜 채찍은 이전까지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학교 관리(교육)를 빼앗아 국가가 직접 교육 관리에 나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개혁세력 역시 가톨릭이 장악하고 있던 학교 교육에 반대했기 때문에 두 세력은 교육의 세속화 정책이라 할 수 있는 국가의 교육 관리에 대해 일정하게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들 누구나가 알고 있듯 군국주의 국가의 탄생이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자학적 역사관으로 비판하면서 기득권 세력들은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을 '국부(국부)'로, '건국의 아버지'로 부활시키는 상징조작을 통한 문화투쟁에 나섭니다. 이것은 박정희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이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한보 및 김현철 사건 등으로 실추된 정권의 도덕성을 만회하기 위한 전략으로 치부되었고, 기득권 세력은 그 틈새에 부패한 김영삼 정권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박정희 시대를 강력한 리더십과 청렴, 자기희생과 경제성장으로 치장해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과 없는 용서와 화해 : 민주화세력의 취약성 혹은 타협
이후 정권을 잡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여러모로 취약한 민주화세력의 입지를 잘 보여줍니다. 만약 IMF외환위기라는 국난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보수의 분열이 없었다면, 유신잔당이 아닌 유신본당을 자처한 김종필과의 지역 분할 구도가 없었더라면 김대중으로의 정권교체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겁니다. 출범부터 이처럼 취약한 구조였던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과 철저하게 결별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기념관 건립지원을 약속하는 등 박정희 시대에 정당성마저 부여하고 말았습니다. 표면적으론 화해와 용서를 말했지만 사과 없는 일방적 용서였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부터 IMF체제가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거부할 수 없었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은 한국의 노동자정치세력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한국의 노동세력은 노동자정치는커녕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해 투쟁하는 세력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김대중 정부의 실패와 타협으로부터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받아들인 김대중 정부의 타협과 실패는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가 글로벌 스탠더드를 로컬하게 받아들이는데 성공한 결과를 빚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부의 양극화를 넘어 마침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이 말을 하던 당시의 문맥은 상생협력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지만 언론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줄 마지막 버팀목이 정부라고 생각하던 일반 대중들에게 이것은 정부의 항복 메시지로 여겨졌던 것이지요. 노동 세력은 물론 민주화 세력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던 노무현 정부는 결국 어디에서도 의미 있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지게 된 까닭에 대해 전문가들은 박정희 시대에 일정하게 공유되었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정치경제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들 하지요. 변화하는 국제경쟁체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조정하는 새로운 경제운용방식을 개발하지 못한 채 선거공학에만 치중했던 민주화 세력의 실패가 오늘의 실패를 가져온 셈이라고 말입니다. 기업으로부터, 정부로부터, 시민사회 어디에서도 구조의 메시지를 받을 수 없었던 우리들은 난민이 되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모색했고, '부자되세요' 열풍에 사로잡혔습니다. 고등학생의 44%가 '10억이 생긴다면 1년 정도는 감옥에도 갈 수 있다'고 답하는 배금주의와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병든 사회,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아이러니의 아이러니 : 한국 정치의 딜레마
아이러니(irony)란 말은 흔히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실제와 반대되는 뜻의 말을 하는 것을 ‘반어(反語)’ 즉, 아이러니라고 하지요. 민주화운동을 하며 피땀을 흘려 오늘의 민주화를 이룩한 세대의 입장에선 오늘의 청년 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쩌면 저 ‘민주화’란 말을 모두 ‘근대화’라고 바꾸면 민주화운동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 이전 세대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의 청년 세대는 임기 말 MB 대통령이 “나라 전체가 비리투성이”라며 개탄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아이러니를 느낍니다만 그런데 이들은 그런 MB를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세력에게서도 마찬가지의 아이러니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가 열렬한 골프광이라고 하지요. 그가 골프를 배우고, 후배들에게 정치하려면 골프도 좀 배워두고 그래야 한다고 충고할 때 이미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대에 대한 기대의 시효는 만료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청년 세대 입장에선 이미 지독하게 보수화되었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다시 말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욕하는 걸로 받아들인다는 거지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청년 세대는 가슴 아픈 세대입니다. 버림받고, 고립당하고, 배신당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운동 세대로서는 작금의 상황이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즉 ‘아이러니’였던 것처럼 청년 세대에겐 민주화를 부르짖은 세대가 그 이전의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 못할 역사의 아이러니이거든요. 참으로 믿고 신뢰할 놈 하나 없다는 ‘아이러니의 아이러니’가 지금 우리의 정치, 우리가 바꿔나가야 할 한국이란 사회의 딜레마일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