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유시민, 자연인 유시민
* 나는 과거의 기억보다 기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기록들을 되짚어 보곤 한다(물론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나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길 바라지만).
유시민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당분간일지 영원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이제 우리 곁에 정치인 유시민은 없다.
고백컨데 나는 정치인 유시민을 단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고, 그런 나의 선택에 대해서는 지금 일말의 후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5년 내 홈피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 퍼날랐던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며, '유시민'이란 한 자연인에게 다시 한 번 연민과 애착을 느낀다. 비록 당신을 같은 편이라 여긴 적은 없으나 종종 당신과 같은 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왔으므로...
** 글이 좀 길어서 읽기에 지루하다면 맨 마지막 문단 "우리 모두는 구체제의 산물이다" 편만 꼼꼼이 읽어봐도 무방하리라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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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우린 모두 앙시앙 레짐의 자식들”
정혜신-최장집 글에 정면 반박 나서
유시민 의원이 6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정혜신 박사와 최장집 교수를 향해 날선 비판의 칼을 겨눴다. 두 사람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론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해온 대표적 논객들이다.
유 의원은 지난 5일 보좌진에게 최장집 교수가 최근 펴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을 급히 구해오도록 했다. <한겨레>에 보도된 최 교수의 연정론 비판을 읽고 책의 원문을 읽어보려는 것이었다. 점심 무렵 책이 도착했다. 그는 책 뒤쪽에 실린 35쪽 분량의 ‘개정판 후기’를 펼쳐들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오마이뉴스’에 정 박사의 글이 떴다. 유 의원은 그 글을 읽고는 정 박사를 먼저 과녁에 올렸다. <한겨레> 정치부 임석규 기자
다음은 유 의원이 쓴 글 전문이다.
우리 모두가 앙시앙 레짐의 자식입니다
- 정혜신 박사와 최장집 교수께 드리는 글 -
싸가지 없는 유시민
“똑똑해. 시원시원하고. 그런데 싸가지는 없어.” 어떤 여론조사 전문가께서 내게 전해 준 정치인 유시민의 대중적 이미지다. 내 면전에 대놓고 “재승박덕”이라는 평을 해준 사람도 여럿 있다. 그렇다. 내게는 문제가 있다. 오죽하면 같은 당 국회의원이 “저렇게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했겠는가.
나는 무엇인가? 직업이 국회의원이고 집권당 지도부의 일원이니 정치인임에 분명하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시사평론가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내가 생각해 봐도 분명 그런 면이 있다. <오마이뉴스>에 뜬 정혜신 박사의 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정박사는 내가 평소 몹시 좋아하고 존경하는 전문가이다. 그가 나를 분석하고 비판한 글에는 당사자로서도 공감하고 인정할 대목이 아주 많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쓴 글이라 하더라도 나는 같은 평가를 할 것이다.
나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특히, 도둑이 몽둥이를 들거나 똥 뀐 놈이 성을 내는 사태를 볼 때, 그렇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억눌러야만 할 때, 나는 특히 냉소적인 사람이 되곤 한다. 텔레비전에 나와 토론의 목적과 흐름은 완전히 무시하고 미리 준비한 대로 대통령 인신공격만 해대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생방송의 특성을 이용해 악의적인 선동을 한다고 내가 생각하게 된 방청객’ 등을 향해 차가운 독설을 내뱉을 때, 그런 때 나는 거의 언제나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느라 용을 쓰는 중이다. 이것, 고쳐야 할 나쁜 습관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잘 안 고쳐진다. 내가 우리당 안에서 욕을 먹는 것도 주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매번 뒤돌아서서 후회하지만, 그렇게 냉소적인 반응이라도 내보내지 않으면, 분노를 지나치게 억누른 나머지 그만 암세포를 총궐기시키게 될 것만 같다. 시간을 내서 심리상담을 받아보아야 하겠다.
나는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오로지 못된 성격 때문에 생기는 일은 아니다. 정혜신 박사가 아마도 잘 모를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로 하여금 이런 못된 성질을 온전히 잠재우고 인격을 수양해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또 있다. 지난 3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노무현 후보와 노무현 대통령을 옹호한 나를 두고 안타깝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공히 알지 못하는 지점이다. 정혜신 박사의 고마운 지적을 들은 김에, 연정론이니 뭐니 하는 정치적 쟁점에 대한 나의 주장을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 골치아픈 장애물을 우선 좀 치우고 보자.
논리적으로 격렬하고 야박하게 부딪치는 나의 소통방식에 대한 정혜신 박사의 비판적 분석과 충고는 “객관적으로 볼 때” 옳은 지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내 어법이나 행동방식을 교정할 의향이 없다. 지나쳐서는 안되겠지만, 스타일 자체를 바꿀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몰라서 못 고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또는 알기 때문에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충고를 하는 동기는 보통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 집권당 지도부에 속한 유명한 정치인은 언제나 책임성 있게 국민을 존중하고 따뜻이 감싸 안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둘째, 앞으로 ‘더 큰 일’을 하려면 의견이 다른 사람도 포용하는 넉넉한 품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아마도 인간 유시민을 아끼고, 정치인 유시민에게 무언가를 더 기대하기에 내놓는 주문일 것이다. 나는 첫 번째 동기에 따른 충고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두 번째 동기에 따른 주문에는 응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은근히 반발하고 싶다. 나는 정치를 바꾸려고 정치에 들어왔을 뿐이다. 정치인으로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정박사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아마 모르지 않나 싶다. 정박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치를 바꾸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대통령의 선도투쟁
우리당 의원 한 분이 노무현 대통령을 일컬어 ‘선도투쟁’을 하는 사람 같다고 평했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도 ‘전선’을 열어나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이 나선 것일 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87년으로 날아가 보자. 사람들은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모든 집회를 봉쇄했다. 한 떼의 청년들이 화염병과 짱돌을 들고 진압경찰에 맞섰다. 그러는 동안 그 뒤편에 일시적으로 출현한 경찰력의 공백을 활용해 사람들은 연설회를 열었고 유인물을 돌렸다. 청년학생과 노동자와 각계각층 재야단체가 그렇게 죽고 다치고 감옥을 가면서 확보한 정치적 공간에서 무언가 전리품을 챙긴 것은 두 김씨를 필두로 한 보수 정치세력이었다. 두 정치 지도자가 종종 재야 운동단체와 청년학생들의 ‘폭력성’을 지적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그들의 ‘폭력적 투쟁’이 없었다면 양김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는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이 그런 선도적인 사업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이건 상황인식과 가치판단기준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통령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정말로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것이라면,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그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다면,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런 것인지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기득권을 다 내놓겠다면서 의제를 던지는 대통령을 향해, 이런 저런 도덕적 비난과 훈계부터 해대는 것은 현명치 않은 일이다. 단죄하고 비난하고 훈계하기 전에 먼저 실사구시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충분히 토론해 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비난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나는 이런 나의 생각에 잘못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정박사의 시선으로 보면 또 이렇게 논리적으로 부딪쳐 오는 내가 그리 탐탁지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자기만족’이라는 용어를 들먹이며 도매금으로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비난한 것은, 그들이 먼저 정박사가 말한 ‘지적 오만’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믿고 따를만한 정치적 지도자가 되려고 생각한다면 유시민처럼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정혜신 박사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 맞다. 그런데 나는 그런 존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박사가 들으면 또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시겠지만, 나는 지금보다 더 중요한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정치인으로서 하려고 하는 일은 아주 특별하고도 일시적인 과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17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기 전에, 1노 3김이 합의해 만든 ‘1987년 체제’를 종식하고 한국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제도의 변경을 이루어내고 싶다. 이것이 나의 정치적 목표이다. 비난받고 상처받는다고 해도 나는 이 목표를 향해서 간다. 누군가와 싸우기는 싫지만, 우리 정치를 지배하는 ‘1987년 체제’와, 그 체제의 잔명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낸, 또는 다른 동기에서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앙시앙 레짐을 유지하는 데 동원되는 사고방식과 논리적으로 싸우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내가 지금 이 순간 달리 선택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장집 교수의 ‘동떨어지지 않은’ 문제의식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대통령의 대연정론과 관련하여 나는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 정혜신 박사는 내 생각과는 ‘동떨어진 생각’을 지니고 있다. 노회찬 의원도, 최장집 교수도, 김동춘 박사도, 며칠 전 한겨레신문이 실은 ‘고언 시리즈’에 등장해 대통령을 걱정했던, 내가 무척 존경하는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들도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나와는 ‘동떨어진 생각’을 지니고 있다. 좋다. 섭섭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이제 그 문제를 이야기해 보자. 유시민이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든가, 토론 상대방을 깔아뭉갠다든가, 오로지 논리로만 소통하려 한다든가 하는 것은 인간 유시민의 문제일 뿐 소위 대연정론이 내포한 문제는 아니니 잠깐 잊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지금부터는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부딪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개정판 ‘후기’에서 최장집 교수가 펼친 주장 가운데 정치적 지역구도 문제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려보자. 최교수의 견해는 이른바 진보개혁 진영에서 나온 비판적 논리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크고 체계적인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내가 잘못 요약하지 않았다면, 최장집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중심적 문제의식: 한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보통사람들의 이해와 관심에 바탕을 두면서 동시에 능력 있는 정부의 창출을 통해 사회구성원 전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
2)민주주의 실패: 한국 민주주의는 이 점에서 실패했으며, 그 원인은 우리 정당체제가 보수 독점의 협애한 이념적 사회적 기반을 가진 탓으로 사회경제적 갈등과 균열을 제대로 반영하고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사회경제적 민주화 퇴보: 이로 인해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경제정책 및 사회정책에서 권위주의정부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이고 시장근본주의적인 경제독트린과 정책노선을 추구해 왔으며 노무현 정부는 더욱 공공연하고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진함으로써 사회경제적 수준의 민주화를 퇴보시키고 있다.
4)정당정치: 민주정부를 강하고 능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중심 메커니즘인 정당과 정당체제를 바로 세우고 튼튼한 사회적 기반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민주정치는 정당을 통하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폭넓게 표출하고 대표하게 함으로써 다수의 힘을 동원하고 권력을 획득하며, 그 과정에서 형성한 정책적 대안을 실현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동원하는 집단적 행위이다.
5)지역주의: 한국정치가 가진 문제의 궁극적 원인을 지역주의라고 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권정부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태도는, 현실로 존재하는 사회갈등과 균열요인을 제대로 대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권위주의 지배의 한 산물로서 반호남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바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특히 김대중 정부의 집권과 더불어 괄목할 만큼 완화되었다. 지역주의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지배적인 균열이 아니라 권위주의의 잔여범주로서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과 사회적 기반의 약함, 시민사회의 강한 보수 헤게모니 등으로 인해 작위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고 영향력을 가졌던 일종의 종속변수였다. 문제는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역주의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현재와 같은 정치적 대표체제를, 보다 민주화하고 갈등의 이념적 계층적 기반을 넓히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6)선거제도 변경: 지역갈등 극복을 정치개혁의 최우선 의제로 삼고 선거제도를 바꾸게 된다면, 기존 거대정당들은 규모의 이점을 나눠 갖게 되고, 보수 독점적 양당체제는 강화되며, 오히려 약회되고 있는 지역갈등구조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사회의 이익계층들이 대표될 수 있는 보다 민주적 제도개혁의 가능성은 사전에 봉쇄될 것이다.
7)결론: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최장집 교수에게 묻는다
잘못 요약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고 이야기를 계속하자. 최장집 교수의 견해 가운데 1)과 2)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3)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서는 반론하지 않는다. 4)는 내가 지닌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5)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 놓은 주장이라고 본다. 6)은 잘못된 사실 인식 또는 입증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7)의 결론은 5)가 내포한 도착적 인과관계와 6)에 나타난 사실오인에 의거한 주관적 추정에 불과하다. 이제 5)와 6)에 요약된 최장집 교수의 견해를 비판한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했다. 정치판이 보수 일색이라 이념적 폭과 사회적 기반이 너무 좁아서 국민들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정당들이 보통국민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가지고 대립할 수 있는 정책비전과 이념, 정책프로그램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정당들이 권위주의체제의 유산이자 종속변수인 지역주의에 함몰되어 정치가 엉망이 되었다는 견해다. 최교수는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해소하는 다른 처방은 필요하지 않으며, 정책정당을 잘 발전시킴으로써 정당체제의 이념적 지평과 사회적 기반을 넓히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논리를 원인과 결과, 또는 제도적 환경과 그 환경의 산물을 혼동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
최장집 교수에게, 그와 동일한 논지를 들어 대연정론을 비판하는 언론인, 지식인, 정치인들에게 다음 몇 가지를 묻는다.
1)과연 김대중 정부 이후 지역주의는 약화되어 왔는가? 소위 호남당의 영남 출신 대통령 후보, 그리고 비영남당의 영남 출신 대통령이 존재하기에 잠시 완화된 듯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2007년 대선에서 후보구도에 따라서는 2002년 대선 이전과 같은 극단적인 지역주의적 투표행태가 급속하게 복원될 가능성은 없는가.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정치의 현장에서 느끼는 지역구도는 여전히 철벽처럼 강고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은 지역주의에 전적으로 또는 크게 의존하는 정당이며, 열린우리당 내부에도 그와 같은 경향성은 뿌리 깊게 존재한다.
2)우리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이 개선되지 않은 것은 최교수의 시각으로 보면 비슷한 보수정당인 열린우리당(2003년까지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라는 두 거대정당의 독과점이 유지되는 탓이며, 진보정당의 진출이 지체되고 약화된 것은 뚜렷한 지역주의적 정당구도로 인해 사람과 자원과 아이디어와 표가 모두 두 거대정당에 몰린 때문이고, 이렇게 된 데는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선거와 비례대표 비율이 적은 국회의원 소선거구 제도가 엄천난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정당체제의 이념적 협애성이 지역주의의 위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적 정당구도와 거대정당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가 한국 정당체제를 보수일색의 협애한 공간에 묶어둔 원인이요 제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은가? 따라서 최교수의 주장은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어떤 알 수 없는 신묘한 방법으로 결과를 개선함으로써 원인을 없애라고 하는 도착된 논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3)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론은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인 지지를 받는 지역주의 정당과 중앙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거대정당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와 그 정당의 국회 의석 점유비가 일치하는 선거구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38%의 정당지지표를 얻고 51%의 의석을 차지했고, 한나라당은 36%의 정당지지표를 얻어 40%가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반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각각 13%와 7%가 넘는 지지를 받고도 3% 수준의 의석밖에 얻지 못했다. 중대선거구가 되든 독일식 제도를 도입하든 그런 방향으로 선거구제를 변경하면 보수 양당의 의석 독점 구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객관적 전망이다. 만약 우리가 독일식 선거구제를 가졌다면 민주노동당은 지난 총선에서 40개가 넘는 의석을 얻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거구제 변경이 보수 독점적 양당 체제를 강화할 것이라는 최교수의 주장은 대통령이 제안한 ‘지역구도를 극복하는 선거구제 변경’의 내용을 모르고 한 말로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한겨레신문>이 이러한 논리적 도착과 사실관계의 오인에 의거한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그야말로 무비판적으로 인용 보도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정하고 지적인 신문이라는 <한겨레신문>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이처럼 무책임하게 중계방송하고 말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정치인이다. 대학교수의 학술적 저서에 대해서 반론하는 것이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의 글은 언론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공격하는 예리한 칼처럼 활용되고 있다. 최장집 교수의 말 가운데서도 다음과 같은 것이 가장 아프다.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이 무언가 판단을 잘못해서 연정론을 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잘못을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려는 나쁜 의도를 지니고 일을 벌였다고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구체제의 산물이다
본론보다 잡설이 길어지긴 했지만, 다시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면서 글을 맺는다. 정혜신 박사는 나를 시험성적이 나빠 매를 맞는 친구들 심정을 전혀 모르는 머리 좋은 학생으로 묘사했다. 물론 비유라는 걸 안다. 그래서 사실을 밝혀둔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맞기 싫어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지만 시험성적은 4백 명 가운데 겨우 1백 등 근처를 오갔던 학생이다. 공부를 잘 하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고 매타작을 일삼은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공분을 느낀다. 평생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에게는 단 한 번도 맞아보지 않았던 내가 학교에 가서 날마다 매를 맞으면서, 나는 ‘사랑의 매는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정치인 유시민이 특별히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그리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애국심을 지니고 일하는 국회의원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자기 소신과 지향에 맞는 정당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정당을 함께 하면서 다른 정당과 경쟁하고 협력하는 그런 정치를 보고 싶다. 그런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데 내 힘을 쏟고 싶다.
나는 죽자고 한나라당을 미워했지만, 한나라당과 조중동만이 앙시앙 레짐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해 정치인 유시민도 예외 없이 1987년 탄생한 구체제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당은 대통령 탄핵안 표결을 육탄저지했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법안 처리를 육탄저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쌀 관세화 유예협정이나 비정규직 관련 법안 처리를 육탄저지한다. 자기가 찬성하는 법안은 ‘국회법에 따른 표결처리’를 주장하지만, 자기가 정말로 반대하는 법안은 육탄저지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국회의원들이다. 대한민국 정치인과 정당들은 입으로만 국민의 뜻을 존중할 뿐,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다수파가 다수파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피아를 구분해 죽기 살기로 맞붙는 대결적 정치의 표상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병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다. 대통령도 여당도 야당도 보수정당도 진보정당도 기업인도 노동조합도 국민도 모두 역사적 분열의 상처를 안은 채 정치적 분열의 열병을 앓고 있다.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분열마저도 서로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할 뿐,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마치 대통령한테서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통령을 조롱하고 훈계하고 비방하는 ‘일부’(이 말을 꼭 써야 한다는 것도 비극이다.) 언론인과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말씀드린다. 당신들의 말이 옳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희망적이겠는가. 그러나 잊지 마시라. 당신도 나도 앙시앙 레짐의 자식이라는 것을. 당신의 확고부동해 보이는 그 논리도 알고 보면 분열이라는 질병의 한 증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