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상공에 떠 있는 죽음의 제왕, B-52
폭격기의 제왕, B-52가 한반도 상공에 뜬단다. 키리졸브 훈련 때문인데 흔히 미국의 핵우산이라고 하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데, 핵우산의 촘촘한 살대를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이른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핵잠수함(잠수함발사탄도탄,SLBM), 그리고 공중발사탄도미사일(ALBM)이다. 이중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대륙간을 미사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국 근방에 설치될 필요가 없어 자국의 은밀한 장소에 배치되기 마련이고, 잠수함발사탄도탄은 그 자체로 은밀성이 최고의 장점이기 때문에 드러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무기가 지닌 현시효과에 의한 전쟁억지력으로 핵추진 항공모함을 미국 군사력의 집결체인양 떠드는 경향이 있지만 항공모함, 그 자체는 재래식 전력의 성격이 강하다. 다만 해군력이 주는 강력한 현시효과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1952년에 초도비행을 한 폭격기로 올해 환갑을 맞은 무기인 B-52는 현시효과란 측면에서 실제 운용 비용까지 매우 실용적인 무기이다. 개발 연도가 오래되다 보니 대중의 인식 속에 이 무기는 첨단무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이 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ALBM(공중발사탄도미사일), 다시말해 핵탄두를 실어나를 수 있는 핵미사일 발사 플랫폼이자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폭탄 탑재량을 자랑하는 전략폭격기로 향후 40년 이상(2040년까지) 운용할 계획의 현역 무기이자, 동시에 미래 무기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 책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중에서 B-52부분 일부를 인용(108~110쪽)한 것이다.
전쟁억지수단이 된 핵폭탄을 대신한 전쟁수단
전략폭격의 끝은 핵공격이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17초, 히로시마 상공 570m 지점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폭발했다. 핵폭탄은 십만 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섭씨 300,000도에 이르는 불기둥을 뿜어냈고, 1초 후 불기둥은 반경 250m로 부풀어 올랐다. 버섯구름은 7km 상공까지 솟아올랐고, 폭발로 인한 열 반응은 16km 상공까지 미쳤다.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폭발 즉시 그리고 며칠 동안 대략 14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 3일 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7만 명이 더 죽었다. 그 후 5년간 방사능에 피폭된 13만 명이 죽었고, 1975년까지 3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60년대 중반이 되자 미사일 기술의 발전이 전략폭격기의 존립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발사한다면 값비싼 전략폭격기보다 위력은 강하면서 값은 저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폭탄 개발비용이 20억 달러였는데, B-29 폭격기의 개발비용은 30억 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핵무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엔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될 수 없었다. 동서냉전기간 동안 수립된 상호확증파괴전략은 핵전쟁이 곧바로 인류의 멸망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연속적인 핵공격을 가해 만주와 북한 일대를 핵 오염 지대로 만들어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다행히 계획으로 끝났다. 이후에도 쿠바 미사일 사태 등 몇 차례의 핵전쟁 위기가 있었지만 핵무기는 사용되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핵무기는 너무나 강력한 파괴력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고, 덕분에 위력은 조금 약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전략폭격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B-29는 한국전쟁에도 사용되었다.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주축이 된 UN군은 1백만 회 이상 출격하여 한반도에 476,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공중전에 제트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UN군은 2천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특히 미국과 서방의 항공전문가들은 미그15(MiG-15)가 보여준 소련의 기술력에 경악했다. 지금까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미국의 제트전투기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뛰어난 전투기를 개발할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보잉은 제트 엔진을 이용한 폭격기 개발에 나섰고, 1951년 중반엔 미국 최초의 제트 폭격기 B-47(Stratojet)을 개발한다. B-47은 9.9톤의 폭탄을 탑재하고 6,437km를 비행할 수 있었지만 냉전은 더 크고, 더 강력한 폭격기를 요구했다. 1952년 4월 15일, 보잉은 B-52(Stratofortress)를 탄생시켰다. B-52는 길이 48.5m, 날개 길이 56.3m, 8개의 제트엔진으로 약 22톤(나중엔 27톤)의 재래식 폭탄과 핵무기를 탑재하고, 16,013km를 비행할 수 있다. 미국은 해외 기지가 아니라 본토에서 이륙해 지구상 어디든 폭격이 가능하길 바랐다. 보잉은 707 민항기의 설계를 이용해 공중급유기 KC-135(Stratotanker)를 만들었다. 이 비행기는 길이 41m, 날개 폭 39.6m에 최대속도 940km/h로 제트 폭격기와 비슷한 속도로 날면서 25,000갤런의 연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B-52 폭격기 개발 이후 한동안 미국에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략폭격기 개발이 주춤해졌지만 초강경 보수주의자였던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B-1과 스텔스 기능이 도입된 F-177, B-2 같은 최신예 전략폭격기들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B-52는 이들 폭격기들이 모두 퇴역한 이후인 2045년까지 계속해서 전략폭격기의 임무를 수행할 계획이다. 현재 B-52에 탑승하는 주요 승무원 대부분은 비행기의 기령(機齡)보다 어리고, 심지어 2대에 걸쳐 같은 비행기에 승무원으로 탑승하는 일도 있다.
B-52가 1950년대 중반에 개발된 기체인데도 다른 최신형 폭격기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B-52의 엄청난 살상능력이 지닌 현시효과(顯示効果) 덕분이었다. 1991년 벌어진 걸프전 당시 미군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은 매일 1천회 내지 1천 5백회를 출격했는데, 전략적 요충지였던 바스라(Basra) 서안의 이라크 정예 공화국 수비대는 3시간마다 한 번씩 B-52의 공습을 당했다. 당시 B-52는 고성능 집속탄을 사용하는 대신 표준형 500파운드짜리 폭탄만을 사용했는데, 지하 벙커에 자리 잡고 있는 이라크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긴 어려웠지만 심리적 효과는 대단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국적군은 이라크 병사들에게 B-52가 어떤 부대를, 언제 공격할지 미리 경고하는 전단을 뿌렸다. B-52는 예정된 시간에 예고한 부대를 정확히 공격했는데, 이라크 군으로 하여금 B-52의 공습은 도저히 피할 수 없으며 단지 항복만이 살 길이라는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전술이었다. ‘토마호크’ 미사일 같은 스마트무기들은 TV에 방영된 것처럼 이라크의 중요시설을 정확히 공격했지만 실제 전장에 나가있는 병사들의 사기를 꺾지는 못했다. 스마트무기는 전선의 일반 병사들을 직접 겨냥한 위협이나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52 폭격기들의 대대적인 위협은 집중적이고 파멸적이었으며 일선의 병사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 결과 이라크 병사들의 탈영병/포로 대 전사자 비율은 24.67대 1로 탈영병 수치가 높기로 악명 높았던 베트남전의 0.19대 1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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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상공에 폭격기의 제왕, 아니 그 죽음의 제왕이 떠 있다. 이라크 전쟁 발발 10주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2003년 3월 20일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4월 9일 바그다드가 점령되었고, 전쟁 발발 두 달만인 5월 1일 미국의 조지 부시 주니어 대통령이 항공모함 위에서 자랑스럽게 종전 선언을 했지만 전쟁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미국은 다시 지난 2011년 12월 종전 선언을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주장했던 이라크 전쟁의 세 가지 목적 "사담 후세인 제거, WMD 제거, 이라크 민주화" 중 유일하게 사담 후세인 제거만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미군 4,500여 명 전사, 3만2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다른 한 편 이라크 전쟁 발발 10년 사이 11만2000명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이 숨졌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17일(현지시간) 발간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보고되지 않은 희생자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라 만약 이 수치까지 감안한다면 사망자 수치는 17만4000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B-52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