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영화/DVD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 2009)
windshoes
2010. 9. 14. 13:53
나는 SF영화와 좀비물, 그리고 epic(서사시)류의 영화들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다. 긴 글 읽기와 긴 글 쓰기를 선호하는 사람답게 영화도 시리즈물로 계속되길 바란다. 세헤라자데(이야기꾼)에게 매료당한 아라비아의 군주(독자)처럼 천일동안 읽어도 읽어도 물리지 않는 네버엔딩스토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취향이므로 당연히 "스타워즈", "에일리언", "터미네이터",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같은 영화들은 모두 DVD로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영화들은 되도록 극장에서도 보려고 한다. 이번에 개봉된 "T4" 역시 개봉 당일 극장에서 심야영화로 보았다. 영화 감상도 주로 집에서 DVD로 즐기는 것을 선호하는('rewind' 기능 때문에) 나의 영화감상 스타일상 웬만한 영화가 아니면 굳이 극장에서 보려고 하는 편은 아니다. 전작이었던 "T3"가 다음 영화를 위한 징검다리 영화 정도에 머물렀기 때문에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될 수밖에 없는 "T4"에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T4"는 졸작이다.
그저 그런 영화 "피라냐"의 속편 감독으로 데뷔했던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1984)"를 통해 '테크 느와르'란 평을 받을 만큼 그럴 듯한 영화를 만들어내면서 일약 주목 받는 신예 감독이 되었다. 타임머신을 통한 여행이란 소재는 사실 진부했지만 그는 현대의 인물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온 살인마가 구세주의 어머니를 살해하여 미래의 운명에 영향을 주려한다는 이야기 설정으로 본래의 이야기 구조를 뒤틀어 버렸다. 더군다나 미래로부터 온 살인마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었다. 비록 저예산 영화였고, 출연했던 배우들 역시 가능성은 있었지만 여전히 배우로서의 능력을 검증받지 못했던 보디빌더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린다 해밀턴, 마이클 빈 등 풋풋한 신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T2"에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키는 감독으로서 카메론의 능력은 감탄을 넘어 찬탄의 경지에 이른다. 연기능력이나 대사능력이 부족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는 기계인간(로못)이라는 설정으로 뻣뻣한 몸동작까지 커버되었고, 예산 부족으로 사이버틱한 장면이나 미래형 최신 병기 등을 사용할 수 없는 조건은 미래로부터 오는 인간은 알몸으로 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져올 수 없다는 설정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이런 설정들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여주었고, 긴박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이와 같은 카메론의 재능은 이제 명실상부한 헐리우드의 유명 감독이 된 이후 제작했던 "T2"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CG기술의 부족을 T1000을 나노머신이 탑재된 액체금속형 로봇이라 설정하여 도리어 강점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T4"가 이전의 "T1"이나 "T2"에 비해 졸작 내지는 범작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약점은 미래로부터 온 살인마 로봇의 추적이 아니라 관객들을 미래로 끌고 가서 이미 과거에 카일 리스(마이클 빈), 사라 코너(사라 해밀턴)의 입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재확인시켜주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T1"에서 미래로부터 온 연인을 믿지 못했던 사라 코너를 설득하기 위해 카일 리스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사실 이 과정은 이야기 구조상 사라 코너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영화 속 상황 설정을 관객들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과정으로서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T2"에서 이런 역할은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대신 죽은 아버지 카일 리스를 대신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이자 미래가 보내준 새로운 로봇 아버지 'T800(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 의해 수행된다. 그런 의미에서 "T1"과 "T2"는 미래 저항군의 리더가 될 존 코너의 성장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배경이 미래로 전환된 "T4"에서 감독은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오래된 미래'이자 이미 과거가 된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T4"의 감독은 마치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영화를 진행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크리스찬 베일이 분한 존 코너이지만 그는 "T4"에서도 여전히 배트맨처럼 연기할 뿐이다. 과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존 코너의 모습은 그처럼 결단력 있고, 단호하며 전투의 귀재인 저항군의 리더였을까? "T2"에서 에드워드 펄롱이 연기한 존 코너, "T3"에서 닉 스탈이 연기한 존 코너가 성장했다면 "T4"에서의 존 코너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맥지(MCG) 감독은 "T4"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부었지만 관객들이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까지의 "T"시리즈들의 액션 장면이 대단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될돌이켜 생각해보면 "T"시리즈는 액션영화라고 규정하기엔 액션 장면이 생각외로 많지 않으며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들처럼 속도감 있는 액션도,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보다 액션 장면은 매우 소규모로 구성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시리즈의 액션 장면은 뭔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 이유는 이 시리즈가 근본적으로 묵시론적인 전망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T4"는 그저그런 액션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이 영화의 복선이라거나 관객이 미처 예상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면 샘 워싱턴이 존 코너를 유인하는 반인반로봇의 존재였다는 설정인데 이 역시 영화 초반에 이미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겉으로 쉽게 드러난다.
게다가 '로봇인지 인간인지 회의하는 존재'란 설정은 게리 시나이즈가 고전SF소설의 반열에 오른 "화성에서 온 사나이"를 스크린으로 옮긴 "임포스터(Imposter, 2002)"은 물론 원작자인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원작을 응용한 무수한 작품들에서 차용된 설정이다. 어쩌면 "T4"의 운명은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가 끊임없이 외치면서도 운명적으로 흘러가는 전작의 성공적인 요소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타워즈" 역시 시대를 거슬러 "다쓰베이더"의 탄생 과정, "제다이"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전작에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둔 까닭은 이전의 "스타워즈"들에서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아무리 스펙타클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이야기(narrative)란 점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아무리 스펙타클한 요소가 뛰어나더라도 범작에 그치고 만다는 교훈을 "T4"는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