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교사신문>(119호) - "바람의 검심"으로 본 동아시아의 근대화
<만화책을 보세요-04>
바람의 검심 1~28(완결) - 와츠키 노부히로 지음 / 서울문화사(만화)
올해 초(2013년 1월) 개봉된 영화 <바람의 검심>은 만화가 와츠키 노부히로(和月伸宏)가 지난 1993년 일본 만화잡지 《소년 점프》에 처음 발표하여 1999년쯤인가에 전 28권으로 완결된 동명의 만화를 실사 영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일본 만화는 먼저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뒤 그것을 단행본 시리즈로 출간하고,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으면 이것을 다시 OVA(Original Video Animation)으로 제작하는 방식인데, OVA는 대체로 공중파나 애니메이션 전문 케이블 방송국 등을 통해 방영된 뒤 DVD로 제작됩니다. 이것이 흥행에 성공하면 일종의 외전(外傳)이랄 수 있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거나 <바람의 검심>처럼 실사 영화로 제작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출판에서 영화에 이르는 생산·수익구조가 오늘날 일본의 만화산업, 애니메이션을 세계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
에도 막부 말기에 비천한 계급의 전쟁고아로 태어난 주인공 히무라 신타는 검술 스승으로부터 ‘켄신(剣心)’이란 이름을 받습니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는 시대입니다. 어찌보면 일본 사무라이(侍, 武士)의 단순한 액션 활극 만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는 역사 속의 실제 인물과 사건들 사이에 가상의 인물과 사건들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작품의 사실성과 흥미를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일종의 ‘팩션(faction)’인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지식은 물론 현대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유신의 의미와 당시를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을 느끼는 텍스트(text)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동력이 되었던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이후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야 합니다. 전국 시대를 끝내고 임진왜란을 통해 주요 경쟁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린 아들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권력을 물려주고자 했지만 그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도요토미 세력을 숙청하고 자신이 쇼군의 자리에 오릅니다. 세키가하라와 오사카 전투에서 잇달아 패한 도요토미 세력은 일본의 서쪽 끝 큐슈의 사츠마 번(薩摩藩)과 초슈 번(長州藩)까지 쫓겨나게 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후 각 지역의 영주인 다이묘들로 하여금 1년 중 반년은 에도에서, 나머지 반년은 영지에서 근무하는 ‘참근교대제(参勤交代制)’를 통해 반란을 사전에 봉쇄하고, 일본 내 각 지역의 거주 이전과 물류 이동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외국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쇄국정책을 통해 ‘에도 막부 300년의 평화’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막부의 쇄국 정책은 서양의 흑선(黑船)이 출몰하면서 힘을 잃게 됩니다. 쇄국정책을 고집할 수도, 그렇다고 개혁을 이끌 추동력도 상실한 막부의 권위는 점차 약화됩니다. 이때 막부의 감시 대상이자 오랫동안 서로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와 초슈 사이의 삿쵸 동맹(薩長同盟)을 체결시키며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람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유신지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입니다. 사츠마와 초슈 지역의 이른바 지사(志士)들은 ‘막부타도(幕府打倒)와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 와중에 벌어진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인물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의 영감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막부 말기의 칼잡이 켄신은 발도술(拔刀術)의 대가로 사카모토 료마 등과 함께 존왕양이파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히토키리(人斬り)’로 활동합니다. 히토키리란 막부 말기의 전문 암살자 혹은 살인청부업자들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하급무사도 될 수 없는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신지사들과 어울리며 열등감과 울분을 더욱 폭력적인 살인과 테러로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는 켄신이란 인물을 구상할 때 실존했던 히토키리인 가와카미 겐사이(河上彦斎)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합니다. 막부파와 반막부파 사이의 대결, 같은 반막부파 사이에서 벌어졌던 끊임없는 배신과 모략은 일본을 격동시켰고, 그 와중에 사카모토 료마도 불과 33세의 나이에 암살당합니다.
근대 민족국가 만들기(nation state building)의 세 가지 방법 - 혁명·내전·유신
서구보다 근대화에 늦었던 지역 대부분은 외세에 의해 식민지가 되거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는데, 일본은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가장 빨리 개항하면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동아시아 삼국은 비록 진행시점과 과정, 주체는 모두 달랐으나 폭력적인 경험을 거치며 근대화를 달성하게 됩니다. 일본의 ‘대정봉환(大政奉還)’, 중국의 국공내전, 우리의 한국전쟁이 그것입니다. 동아시아 삼국은 근대민족국가 수립 과정에서 내전(무력을 동반한 내부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국가를 만든다(War made the state and the state made war)”는 테제를 주장하여, 전쟁(폭력)이 근대의 국가형성(state-building)과 국민형성(nation-building), 정당성 창출의 근거로 이용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전쟁은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그것을 근대의 질서로 대체하는 역할을 하는데 한국전쟁은 남북한 양국의 지배집단의 국가형성과 국민형성, 정당성 창출의 근거로 이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막부가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대정봉환)하는 과정과 이후의 메이지 유신은 혁명과 달리 위로부터 온 혁신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으나 내전을 통한 새로운 정권 수립이란 점에서 이후 혁명에 버금가는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대정봉환이 한국과 중국의 내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좌우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발생하기 전에 벌어진 내전이었다는 것 - 그 덕분에 일본인들은 근대화 과정을 이념(선악) 대결보다는 애국지사들이 벌인 다소 낭만적인 권력 투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 이고, 다른 하나는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 ‘국민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전 국민이 동원되었던 총력전이었던 반면, 일본은 지배계급 사이의 내전 - 한·중의 경험과 달리 일본은 상대적으로 내전 기간이 짧았고, 지배계급 사이의 충돌이었기에 내전의 후유증이 적었던 대신 근대화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가 배제되어 이후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 이었다는 겁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중·일이 경험한 역사의 차이는 이후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후반부(특히 ‘인벌’편 이후)에 이를수록 일본 만화 특유의 과장과 억지스러운 이야기 늘이기가 작품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는 하지만 이런 차이에 주목하며 『바람의 검심』을 읽는다면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성찰도 함께 따라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은이) | 휴머니스트 | 2012
** '인천교사신문' 연재는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즐기는 연재 꼭지입니다. 개인적으로 만화 읽기를 즐기는 까닭도 있지만 만화라는 매체를 통하여(간혹 만화를 장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만화는 장르가 아니라 매체입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매체이지요.) 새로운 시각과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즐거움을 선생님들께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