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냐 플라스푈러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래서 야근한다!"
[프레시안 books]스베냐 플라스푈러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노동'을 '섹스'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스베냐 플라스푈러(Svenja Flasspöhler)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장혜경 옮김, 로도스 펴냄)는 현대사회의 노동이 더 이상 먹고살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즐기거나 즐길 수 있는 모든 향락을 압도하는 노동으로 새롭게 위치되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막스
베버로부터 한병철의 <피로사회>(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 이르는 여러 문헌들을 인용해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지방출장 중에도 틈만 나면 이 책을 꺼내 읽으며, 나 자신이 저자가 말하는 향락 노동자가 아닌지 고민하는
한편 저자가 펼쳐놓은 다채로운 지식의 향연, 다른 말로 촘촘한 요설(饒舌)들을 따라가느라 다소 힘겨웠음을 먼저 고백한다. 책의
원제이기도 한 1장 '향락노동-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부터 시작해 14장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모두 14개 장(章), 200여 쪽이 조금 넘는 책이지만 한두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등장하는 수많은 인용문구가 촘촘하다.
철학자들이 쓴 책들 가운데에는 두껍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책들도 많지만, 얇고 읽기 쉬운 책들도 제법 많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거닐고 있다 - 공산당이라는 유령이"라는 문구로 시작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맺음하는
<공산당선언>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읽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향방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책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역시 독일 철학자가 쓴 책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에 제법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물론 작년 국내에 소개되어 주목받았던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책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의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처럼 방대한 문헌을 읽고 책을 저술한 저자야말로 향락노동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야릇한 상상이 들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1장 '향락 노동-고통의 즐거움과 즐거움의 고통'만으로도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두 나왔는데, 구태여 부연일 수밖에 없는
나머지 장들을 왜 그리 힘들게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차라리 1장만으로 책을 만들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읽었을 테고,
후반부에 간단하게 제시하고 있는 해법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저자 소개를 살펴보니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30대 후반의 젊은 여성철학자로 현재 <철학 잡지(Philosophie
Magazin)>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매체에 철학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몇 권의 책을 냈으며, 그 성과를 인정받아
아르투어-쾨스틀러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첫 단락부터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무슨 취지인지 못
알아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 나 자신부터 그런 향락 노동자(Wir Genussarbeiter)인지 새삼 반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 동료는 물론 SNS의 지인들에게도 저자의 이 선언적인 구절에 대해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도 노동을
'섹스'는커녕 '휴가'보다 더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의 누구도 노동을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노동을 통해 향락같이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찾을 만한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왜 저자는 '왜 오늘날의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일에 매진할까? 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즐기지 못하는 걸까?'라고 물으며 현대사회에서 노동은 이제 다른 모든 향락을
압도하는 최고의 '향락'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다음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첫 단락이다.
오
늘날 우리에게 노동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서 일을 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의무 노동자가 아니라 향락 노동자이다. 이 단어는 몇 십 년 전부터, 실제로는 이미 200년 전 시민
계급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지속되어 온 발전의 정점을 표현한다. 인간이 제 몸을 망가뜨리는 노동을 기계에 떠맡기고 직업 교육을
통해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게 된 이래로, 노동이야말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은 이제 쾌락의 다른 원천들마저 몰아내고 있다. 섹스? 그럴 여유 없어. 휴가? 쉴 틈 없어. 실컷 놀아보는 건
어때? 에이, 너무 유치해. (8쪽)
향락 노동은 개인적 병리현상인가? 자본주의적 질환인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독일어 원제 'Wir Genussarbeiter'에서 'Genuss'란 '즐김, 향유',
'arbeiter'란 노동자란 의미이니 두 단어를 합치면 '노동을 즐기는 사람, 노동을 향유하는 사람', 즉 '향락 노동자'란
뜻이다.
저자는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우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중요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금욕과 신을 위한 근면, 재산 축적은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였고,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란 말을 '성장 사회'란 표현으로 교묘히 대체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고 말한다.
첫째, 신의 뜻에
따르려는 노력의 자리에 오늘날 노골적인 야망과 끝을 알 수 없는 인정 투쟁이 들어섰다. 부지런하게 주어진 일만 하는 사람,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해서 마감이 코앞이더라도 원칙적으로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
심지어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일을 향한 끝없는 열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주말에도 일을
하고 밤중에도 메일을 쓰는 사람, 출세의 기회라면 무조건 움켜잡는 사람, 때로 자신을 과대평가할 줄도 아는 사람들만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 보존을 할 수 있고 나아가 출세도 할 수 있다.
둘째, 베버와 달리 오늘날의 우리는 세계화된
바겐세일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죄악인 탐욕과 인색함이 널리 칭송받는 세상이다. 인색한 소비는
프로테스탄트의 근검절약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오늘날의 인색함은 절약하여 돈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주고 최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것이 요점이다. 바겐세일 자본주의는 낭비 자본주의이다. 저렴한 텔레비전이나 적당한 가격의 소파를
혹시라도 놓칠세라 꼼꼼하게 세일 광고를 살피고 경매 사이트에 들락거린다. 오늘날 향락이 노동이라는 사실은, 군중들이 한밤중에도
할인행사장으로 달려가, 서로 앞다투어 물건을 잡아채는 신종 국민체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자들은 절대 누릴 수 없었던 세속적 향락에게서 죄의 비늘을 벗겨내 줄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우리에게는 존재한다. 결백한
향락! 이것이 오늘날 웰니스 시대의 모토이다. 무알콜 맥주, 저지방 치즈, 사이버 섹스를 보라. (10~11쪽)
역사 이래 노동은 인간 존재, 인간의 도덕, 그리고 인간의 자화상을 형성해 왔고,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전통 속에 노동은 정치적
좌우,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서로 분리해낼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있던 무렵은 훗날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축적의 기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 컸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핵심을 자본이라 했을 때, 자본주의에는
가능한 많은 돈을 벌려는 상인 근성과 그렇게 모은 돈을 써서 인생을 즐기려는 향락주의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신약성서에도 나오듯 - 예수가 교회에서 세리와 고리대금업자의 돈 상자를 뒤집는 - 기독교는 상업적 행위,
영리목적의 장사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모든 향락에 대해 금욕적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돈을 벌기 위한 상업 활동에 아무런
터부가 없었으며 사람들이 마음대로 영리를 추구할 수 있었던 중국이나 인도 혹은 이슬람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했다손 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 의문에 대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 것은 프로테스탄트(신교도)들이었으며 그들은 근면과
절약을 좌우명으로 삼아 자신의 직업을 신에게 부여받은 '천직(天職)'이라 생각하여 신앙생활을 하듯 자기 목적적으로 노동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영성의 거장'이라 불리는 청교도 목사 리처드 백스터는 "만약 하느님이 어떤 방법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이 방법을 거부하고 이익이 적은 방법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가운데
하나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하느님이 요구하실 때 하느님을 위해 그
은총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육체와 죄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부자가 되려고 힘써도 된다"라며,
신도들에게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하기도 했다.
물론 서구의 근대인들이
모두 프로테스탄트들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자본가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처럼 일하기 위해 일한다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부르주아지에서 다시 노동자 계급에 침투하여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고, 근대에 이르러 가정과 노동 현장이 분리되면서
노동자가 마치 수도사들이 삼종 기도하듯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일을 한다는 생활 태도가 일상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란 세속화된 기독교이며, 자본가는 세속화된 수도원 원장, 노동자는 세속화된 수도사라 할 수 있다. 자본의 축적 과정이
신의 소명을 받든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자본의 은총이겠지만 제품을 만들기만 하고 스스로 소비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자본주의의 정신)는 - 생산된 제품에 대해 계속 금욕적이라 한다면 - 자본의 순환(성장)에 문제를 일으킨다.
자
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들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국가)가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주의란 자신들이 직접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제품을 과잉 생산한(과잉 노동한)
- 소비는 식민지, 타국인들에게 강제했던 - 국가가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를 말한다. 만일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없었다면, 즉
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만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생산과 소비는 국내에서 나름대로 자급자족에 만족하게 될 것이고, 특별히 예외적 상황이 아니라면 타국을 침략하거나 착취할
필요도 없으며 대자본이 축적되어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할 가능성도 없다.
예컨대 어떤 선진국이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산업을 증진하고 자본주의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할 때, 선진국은 원주민들에게 그들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사치품들을 제공(사치품을
생필품화)하여 맛을 들인 후 돈을 내지 않으면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완벽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의해 고용된 원주민들의 의식 또한 '자본주의화'되어야만 한다. 만약 어떤 원주민이 한 달분
급료를 받은 뒤 다음 날부터 한 달 간 출근하지 않는다면 자본에 의한 고용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식민화 과정에서 기독교화 과정이
필수적으로 병행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향락 노동은 비록 외견상으론 노동자 개개인의 정신적
병리 현상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상 더 많이 일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낸 일종의
사회적 질환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스푈러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향락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되는 길밖에 없는가?
이
쯤 어디선가 '파놉티콘(Panopticon)'에 의한 시선의 권력(미시권력, 문화권력)에 의해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던 미셸 푸코가 등장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플라스푈러는 뜻밖에 이 책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하다. 애정 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욕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 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해
끝없는 야망을 불태운다"가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성
장사회(혹은 성과사회)가 되어버린 현대에 노동은 인간 생활의 다른 모든 향락을 대체할 만큼 강력하고 유일한 향락(일에 대한
현대인들의 리비도적 집착)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례로 노동중독, 영어로 '워커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를
제시한다.
워커홀릭은 이런 강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지 않고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잃지 않기 위해 일에게 봉사한다. 하루 종일 요구
조건을 들어주고 연락이 끊어질까 봐 전전긍긍이며 언제나 대기 상태다.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위해,
혹은 중요한 순간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온라인 상태다. 누군가 그에게 무언가를 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워커홀릭은 자신이 언제나 대체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리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미리 알아서 복종한다. (110~111쪽)
이런 노동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2장에서 13장에 걸쳐 프로이트를 비롯한 다양한 사례들을 원용해 현대의
노동이 가상의 향락 노동으로 전락하는 문명적 과정을 면밀히 해부해 그 정신분석적 토대를 파악하고자 했다는데, 그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4장 '놓아두기의 칭송 - 무위에 대하여'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 고작 몇 개의
단락들이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라면 인간을 잡아줄 수 있는 단 하나는 자기
자신이다. …(중략)… 절대적 권력의 망상을 쫓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수영을 하는 원리와 아주 흡사하다. 물에 나를 맡기면 저절로 몸이 물에 뜬다. 하지만 겁이 나서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을 믿고 물을 잘 다룰 줄 알아야 몸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197쪽)
앞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1장에 압축되어 있다고 했는데, 향락 노동의 문제점도, 그 해법도 사실 1장에 이미 등장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노
동과 관계없는 향락은 강박적인 향락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한다. 그들은 "쓸모없는" 무목적성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공허하다고
느낀다. 또한 이중적 의미에서 불쾌로 느낀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
때로는 자신에게 때로는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런 이유로 과도한 향락 노동자들은 어린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잘 못 참는
경향이 있다. 놀이터에서도 열심히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손으로는 블록을 쌓으면서도 생각은 계속해서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향해 달려간다. 아이들은 오직 놀기 위해서 놀고 도대체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이들은 신비한 존재이다. 시간을
초월하며 비밀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더 높은 힘에 자신을 내맡긴다. 아이들은 운명에 몸을 맡긴 존재이며 부모와 신의 힘에
자신을 내던진 존재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신을 잊은 채 놀이에 몰두할 수 있다. 버팀목을 신뢰하는 자만이 놀이에 전념할
수 있다. (13~14쪽)
<개그콘서트>에 등장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우먼
박지선의 과거 유행어 "참 쉽죠! 잉"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플라스푈러는 우리에게 '아이들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운명에 몸을
맡기고, 물 위로 오르려고 버둥거리며 팔을 저으면 점점 더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니, 아이가 버팀목을 신뢰하듯 물을 믿고 물에 몸을
맡기라'고 말한다.
이런 물에 떠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물 위에
누워>라는 제목의 아도르노의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짐승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의 맹목적 분노"를 규탄하고,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
하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아도르노의 구절은
지난 세기의 작품이다. 오늘날, 인간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정신과 삶의 기반인 지구마저 망가뜨리고 있는 성장과 진보의 광기 한
가운데에서, 그의 잠언은 더욱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21세기에는 행동뿐 아니라 "그렇게 놓아두기"도 적절하고 타당하다.
(197~198쪽)
과연 우리 사회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버팀목을 신뢰하듯
사회를 믿고 몸을 맡길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중 1위인데, 8년 연속 1위 자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
인구 10만 명당 OECD 국가들의 평균 자살률은 12.8명인데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33.5명으로 평균보다 무려 2.6배가 높다.
언론에서는 청소년들이 학교폭력이나 학업 스트레스 탓에 자살하는 경우를 많이 보도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자살률 세계 1위가
청소년들의 자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나라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이유 중 하나는 고령화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노인인구는 늘어났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지 못한 탓에 경제적 극빈층으로 내몰려 생계가 어려워진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 퇴직 나이는 53세로 평균 취업연령을 군 제대 후 27세로 보면 평균
26년간 일하는 셈이다. 이것은 OECD 국가들의 평균 생애 근로 연수보다 10년 이상 짧다. 문제는 생애 주기로 보았을 때 이
시기가 자녀 교육과 결혼 등으로 생애 가장 큰돈이 드는 시기에 퇴직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수당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밥 먹듯 연장근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 우리의 연간 근로시간은 OECD
평균보다 440시간이나 길어서 세계 최장 노동 시간을 자랑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항목은 더 있다. 산재 사망률, 성별 임금 격차, 인구 10만 명당 산재 사망자 수, 노동조합 조직률
최하위 등에서도 대한민국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자아실현을 위해 섹스나 휴가보다 노동을 통해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장시간 노동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자기 직업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두 부류이다. 하나는 의사, 변호사, 교수같이 은행에 가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하기만 해도 은행이 알아서
그들이 종사하는 직종에 따라 가능한 신용대출 액수가 정해져 있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한 부류는 사람들에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다니는 부류가 그렇다. 모두가 선망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조차 장래가 암담하다고 하소연하는 시대, 정년이 보장되지 않아
불안한 시절을 보낸다며 우울해하는 노동자라 할지라도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불안하고 우울한 직업(직종)을 선망하는 타인들이 이미 모든 조사를 완료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타인이 선망하는 직업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세계에 속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런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는 단지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노력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더욱더 많은 자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어려워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2030세대를 일컬어
'삼포세대'라고 하는데 어느덧 삼포를 넘어 4포 세대, 5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스펙' 쌓기와 취업경쟁에 치여서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세대라 하여 '4포 세대',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세대라 하여 '5포 세대'라 한다는 것이다.
그
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이들 세대를 가리켜 '사토리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득도의 세대, 깨달음의 세대'라는
뜻이다. 사토리 세대는 지난 20년간 일본의 거품 붕괴 후유증과 장기 불황을 온몸으로 느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10대와
20대 초중반 세대를 말한다. 즉 사회 현실이 너무나 절망적이기 때문에 어떤 꿈도, 목표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 세대의 특징은 깨달음에 도달한 성직자들처럼 소비에 무관심하다. 이들은 자동차를 사려 하지도
않고 브랜드 옷을 입으려 하지도 않으며, 스포츠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고, 여행도 하지 않는다. 연애나 결혼에도 관심이 없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욕도 없으며 주목받는 일을 할 생각도 없다.(바로가기☞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 , "'삼포 세대'의 미래는 일본 '사토리 세대'?") 절망에 빠져 너무 이른 나이에 득도해버린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야 말로 플라스푈러가 제시한 해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세대가 아닌가?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에서 느꼈던 가장 큰 아쉬움은 빈약하게 제시된 해법보다 향락 노동(혹은 노동중독) 증상에 대한
원인과 진단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을 정치나 사회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체의
예술 지상주의는 결국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면서, 파시즘의 특징은 '소유관계는 일절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회적 모순을 정신의
강조를 통해 제거하려는 특유의 정신주의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향락 노동의 문제와 원인을 진단하면서 현대인들을
노동중독에 빠지게 하는 원인을 자본주의가 아닌 개인의 병리현상에서 찾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향락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를 해보아야 하겠지만, 향락 노동이 스스로를 과잉 착취하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라고 했을
때(자본주의적 착취를 자신의 행동원리로 적극 수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분석하지 않고, 원인을 노동자 개개인에게서 찾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일 이상이 아닐 것이다.
기사입력 2013-05-31 오후 7:13:48
* 프레시안측이 뽑은 글 제목이 내 의도와 약간 다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