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쟁이가 가고 새 글쟁이가 왔다 - 신순옥, 남편의 서가
한 글쟁이가 가고 새 글쟁이가 왔다
<남편의 서가>/신순옥 지음/북바이북 펴냄
[302호] 2013년 06월 24일 (월) 10:22:26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신간 서평을 하면서 출판평론가 최성일과 나의 인연을 펼쳐놓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내가 호형호제한 일도
없거니와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어른이 된 뒤의 일이며, 우리는 그야말로 일로 만난 사이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뒤돌아보니 새삼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울해지는 날이 꽤 많았다. 오래된 고향 친구, 같이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 없지는 않으나 1980년대 내가 만났던 책들과의 인연이 그러했듯 시대가 험난했던 탓에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여 저절로
스러진 인연들이 있었고, 사랑에 굶주렸던 탓에 우정으로 만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타버린 인연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 때문에 만난
사이의 우정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까. 어느덧 고인이 세상을 뜬 지도 2년이다. 우리는 친구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으나
언제나 벗이었다.
최성일은 나보다 몇 살 많았다. 그리고 이제야 말이지만 그는 곧잘 남들에게 편벽된 사람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출판평론’이란 것이 문학평론이나 미술평론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리가 잡힌 일도 아니며,
크게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내심 그것이 무슨 평론할 거리나 되느냐 무시하는 이들도 종종 만났으리라. 그는 사람들과 종종
논쟁했다. 듣기로 그중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유명 작가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투지 말기를 충고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는 나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뜨거운 사람이었다.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는 싸움을 마다치 않았다.
나는 그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 나서는 일마다 동감할 순 없었으나 그가 사회적 명리를 바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평가받는 일이 가장 두렵다.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들은 상대가 비밀리에 적은 글이 그렇게 궁금할 수가 없다. 남편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내
일기를 훔쳐보고 그것을 내 일기장에 증거로 남겼다. 고백건대 나 역시 남편의 일기를 자주 훔쳐봤다. 나는 안 본 척 시치미를 뚝
떼버리지만, 남편은 몰래 본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는 양심적인(?) 사람이다.” 아내의 일기장에 ‘일기 봤음’이라는 표시를
해둘 정도로 무섭게 양심적인 사람이 최성일이었다.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 가운데 아내에게 이처럼 높이 평가되는 걸 읽어본 것은
최성일 이전에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던 역사학자 김성칠(<역사 앞에서>)이 유일하다.
무섭도록 양심적인 사람, 최성일
그가 나를 좋게 봐주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몇 차례 그와 아내, 두 아이가 사는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겉보기에 그의 집은 보통 우리가 사는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남들의 몇몇 배는 될 법한 책 속에 살았기에 그의 집은
집이 책을 품었는지, 책이 집을 받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의 아이들이 “우리 집 책은 아빠 같다”라며 아빠의 서재를 그냥
두게 했다는데, 그의 책은 최성일이 남기고 간 거대한 기억일 것이다. 고인이 된 최성일은 편집자들에게도 까칠한 글쟁이였다.
그만의 미문(美文) 의식이 있었고, 그의 문장 원칙, 한국어 쓰기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조차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글쟁이가 바로 자신의 아내 신순옥씨였다. 나 역시 그에게 직접 아내 글솜씨 자랑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아내가 남편을 회상하고, 추모하며 책을 낸 것이 이번이 처음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록 최성일은 가고 없지만, 신순옥이란 새로운 글쟁이가 왔음을 비로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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