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유해 송환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까?
반가운 비를 몰고 온 손님, 박근혜 대통령
내정 때문에 위기를 맞은 정권은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법이다. 경제문제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 남북관계 파탄, 국정원 정치개입, 정상회담 기록 공개 등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박근혜 정부가 방중 외교에서 성과를 내고 싶은 조급증에 시달리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방중 이전부터 정권 출범 갓 100일을 넘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는 중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다는 식의 언론보도는 이번 방중 외교에 대해 청와대가 걸고 있는 기대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중 외교의 성과와 질이 예상처럼 대단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우리 언론이 과소평가 또는 푸대접을 받고 돌아갔다고 단언하였던 김정은의 중국 특사가 예상과 달리 미·중정상회담을 앞둔 시진핑 주석에게 북한 측 입장을 전달한 것은 물론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가서 이야기할 거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한·중회담은 시작부터 김이 빠졌기 때문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때, 우리 역사가 비교적 평온했던 것처럼 외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반도의 분열 상황은 그만큼 강대국들이 외교 하기 편해진다. 최근 중국의 기류에 일부 변화의 기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과 미국의 관계 역시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란 점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을 이용해 중국이 북한을 길들이려는 시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방증하듯 방중 외교 직후 발표된 합의문부터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한 한국의 의견을 지지했다고 발표했지만, 중국에 의해 곧바로 부인 당하는 아픔(?)도 맛보았다. 지금 우리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지나친 미국 중심 외교 탓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고,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해 중국 측의 기대가 큰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한두 차례의 방중 외교로 이런 상황들이 극적으로 개선되고,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박 정권은 출범 초부터 남북 정상회담 기록을 공개해버린 상황이지 않은가.
방중 외교의 성과로 내세울 것이 많지 않은 상황임에도, 우리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기간 동안 가물었던 중국에 비가 내리자 중국 현지인들이 반가운 손님이 와서 비가 내렸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전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연설의 서두와 말미에 중국어로 연설하여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했다고 전하는 등 한국 언론 특유의 호들갑을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 작게나마 이슈가 되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국내에 묻혀있는 중국군 병사들의 유해를 판문점을 통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박근혜 대통령은 물론 정부 인사들이 오늘의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 수준이 얼마나 박약한지 알 수 있다.
전쟁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인식 차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규모나 사상자 수치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있을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은 사상자의 수치로 전쟁의 승패를 평가하는 전통이 있다. - 이와 같은 전통은 과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개활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사상자의 숫자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이런 전통이 있기 때문에 미국은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도 승리했다고 주장(사상자 비율로 보면 중공군 측 사상자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한다. 전쟁을 이처럼 산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베트남전에서 단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것일지 모른다. - 우리나라 역시 정치·경제·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미국식으로 사고하는데 익숙해져서 한국 땅에 묻혀있는 중국군 유해를 송환하겠다고 하면 중국 측이 매우 감사하게 여기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북한 땅에 묻혀있는 미군 유해를 통해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앞서 전쟁의 승패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개념 차이처럼 전사자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희생자를 추모하는 열기는 뜨겁지만, 추모의 방식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육군 국가인 스파르타는 전사자의 유해가 그가 사용하던 방패에 올려져 고향으로 돌아와 매장되어야 했고, 전통적인 해군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조차 전사자의 시신이 자국 영토(고향)에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겼다. 전사자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영혼이 구천을 헤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도 전사자의 유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장수는 개선할 수 없었으며(심지어 해상전투에서도)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에 비해 같은 해군 국가였던 영국은 굳이 전사자의 유해를 자국으로 이송하여 매장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은 영국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단 한 구의 시신도, 단 한 명의 포로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체계를 정립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기까지는 전사자 유해 발굴 신원확인부대를 잠정 운용했으나 이후 1976년부터는 전담부대를 창설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몰자 추모식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전사자를 찾을 때까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보면 미국이 해군 국가로 출발했던 것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로서 ‘국가 만들기’ 과정에서 국민의 충성심을 북돋는 차원에서 생긴 전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파병된 중국군의 수치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이유는 우선 당시 중국이 그럴 만한 여력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왕수쩡의 『한국전쟁 -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글항아리, 2013)을 보면 당시 중국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상대는 중국이었다. 전쟁의 폐허에서 막 일어난 중국은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당일에도 중국 전역을 해방시키지 못해 인민해방군은 그때까지도 서남과 서북 지역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해방된 광활한 지역에서 신생 인민정권에 맞서는 국민당 군대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 해를 거듭하며 지속된 전쟁은 취약한 공업을 철저히 파괴했고, 애초 원시경작 상태에 있던 농업은 더욱 쇠락했다. 1950년 신중국의 농공업 총생산 가치는 불과 574억 위안으로, 달러로 환산하면 미국 농공업 총생산 가치의 끝자리 수에 지나지 않았다.(본문 13쪽)
이처럼 당시 중국의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추정치만 존재할 뿐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만, 미국 측 통계로는 당시 중공군 전체 사상자는 92만 명(북한군 포함 142~150만 명), 중국 측 통계에 의하면 전투 및 사고사망 11만 4천 명, 부상 38만 3천 명, 질병 치료 45만 명(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사망자 13만 3천~15만 2천 명 발표)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병력보다 화력에 우선했던 미국과 부족한 화력을 병력으로 보충했던 중국의 전략 개념이 달랐던 것처럼 이후 전사자에 대한 양국의 차이도 뚜렷했다.
중공군 유해 송환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까?
이제 중국이 지척이라 서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혹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신중국 건국의 주역들인 저우언라이(周恩來), 후야오방(胡耀邦),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돌아온 사람이 있는가? 기념관이 아니라 그들의 무덤에 갔었다고 한다면 틀림없는 거짓말이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잘 보여주듯 중국은 한때 무덤의 나라였다. 그러나 현대의 중국은 더는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 중국은 법으로 화장을 강제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 한 해 사망하는 인구가 6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들이 전부 무덤을 만든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하겠는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들이 세운 업적이나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기념될만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지만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선택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수십만에 이르는 중국 병사들을 한국에 파병시켰다. 그는 수십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 자식만 안전한 중국 땅에 둘 수 없다 하여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양계혜와의 사이에서 나은 장남)을 한국전에 내보냈다. 그는 참전을 위해 압록강을 건넌지 한 달 만에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자세한 내용은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2』권을 참조). 과연 그의 시신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에 있을까? 아니다. 여전히 북한 땅에 있다(1949년 중국 건국 이후 해외 참전 중 전사해 현지에 묻힌 중공군 유해는 대략 11만 5217구 중 99% 이상인 11만 4000구(추정)가 한반도에 묻혀 있다. 북한은 200여 곳에 중국군 기념지와 묘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1973년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평안남도 회창군 등 8곳에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조성 관리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회창군 열사묘에 묻혀 있다. 이 묘역엔 2009년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201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인 3남 정은을 데리고 참배했다).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입니다.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십시오.”
그리고는 이렇게 공식발표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 중국에게 남한 땅에 묻혀있는 너희 병사 시신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하는 한국 대통령과 그걸 무슨 대단한 성과인양 대서특필하는 언론을 보면서 과연 중국,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중국에 대해 아니,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까? 평소 중국 고전을 많이 읽고, 중국 노래를 즐겨 중국을 문화로부터 접근한다는 우리 대통령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이명박 전임 대통령보다는 조금 낫게 평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이 떠드는 것만큼 유해 송환을 통해 거둘 성과는 크지 않을지 모른다. 신뢰를 쌓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정상 간에 나눈 회담 내용조차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공개해버리는 정부라면 더욱더 그렇지 않겠나?